〈 50화 〉담배가 문제(1)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날 때, 평소와는 다른 상쾌감이 느껴질 때가.
그리고 그건, 매우 위험하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
나는 뻑뻑함도 느껴지지 않는 눈을 크게 떴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 시간부터 확인했다.
전원 버튼을 누르니 액정에 하얀 글씨로 나타난 시간이 보인다.
6:50 토요일.
출근 시간은 오후 8시까지. 이것저것 합치면 꽤 빠듯한 시간이다.
내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냈다. 내가 이불을 덮고 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건 중요치 않았다.
"좀 더 자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모였다.
페챠랑 유리도 아까 포지션 그대로 탁자에 앉아있었고. 이 양반들은 여기서 계속 살 건가.
눈매를 살짝이나마 가늘게 뜨며, 이모를 바라보았다. 이모는 귀여운 손자 재롱을 보는 할머니 같은 눈을 띄우곤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자고 있을 때는 그렇게 천사 같더니."
"····"
살짝 접혔던 눈매를 콱 구겼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이모 눈에는 내가 다르게 보일테니. 여기서 아득바득 그런 표현 같은 것 쓰지 말라고 대드는 건 또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지····.'
어찌 됐건 지금은 괜한 곳에 한눈팔 때가 아니라, 침대에서 삐걱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샤워부터 하기 위해 눈을 비비적거리며 화장실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습관적으로 상의를 벗으려 아래서부터 위로 말아 올렸다.
"!"
헛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급히 돌렸는지 뼈가 우두둑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슬그머니 옷을 다시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내 집인데. 옷도 마음대로 못 벗네.
"····너 뭐 하려 한 거냐?"
얼굴이 도깨비처럼 변한 이모.
"도련님···· 조금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얼굴에 미약한 홍조를 매달은 페챠가 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
감탄사를 내뱉은 유리가 두 쌍의 매서운 시선에 급히 쭈그렸다.
***
"이제 출근해야 하니까··· 샤워하려 했다고?"
"예."
이모의 떨떠름한 반응. 설마 진짜 보호한답시고 아예 나가지도 못하게 여기 가둬둘 건가.
이제까지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뿐더러 이 한국에서 그다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았기에 탐탁지 않았다. 나에 대한 자신도 있고.
"그럼 일단 나가주랴?"
"····?"
깔끔하게 물러나는 이모를 의뭉스레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눈빛을 오해한 듯 페챠와 유리에게 손짓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들은 물 흐르듯 문밖으로 나갔다.
"····뭐지."
분명 거센 반발을 예상했는데. 이모가 저리 빠르게 수긍하고 물러날 줄은 몰랐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서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샤워 호스의 수압이 내 몸에 닿자마자 잡념을 떨쳐냈다.
***
로자는 시가를 피우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샤샤가 이제 건전히, 또한 성실히 살아간다는 사실에.
예전에 샤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액정 너머 조카의 목소리에선 죽음이 배어 나왔었다. 그 방향성을 몰랐기에 심장만 졸이던 시절이었다.
그때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건만, 어느새 이 머나먼 타지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학교도 다니면서 알바까지 하다니.
그 강박적인 소유욕과 집착욕만 버린다면, 누군가의 좋은 남편으로 행복하게 지낼 것인데.
'다 그 엿 같은 대물림 탓이다. 심지어 그년 옆에서 착 붙어있었으니 그 성정을 닮아갈 수밖에.'
아니면 핏줄 때문인 걸까. 시가를 빨아들이는 로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찌 됐든 이제부터 자신이 잘 보듬어주면 될 일.
로자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부하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고생한다. 그래도 미안하지만 너희를 아직은 못 놔주겠다."
"그런 말씀 말아주십시오."
"맞아요···오히려 눈 호강도 하고 좋···악!"
저건 매를 버는구먼. 로자는 유리의 이마에 딱밤을 튕기며 페챠에게 물었다.
"슬슬 시간 됐냐?"
"네. 들어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로자는 다시 한 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발을 뗐다. 기특한 조카가 있는 집으로.
*
"····샤샤. 옷은 갈아입어 야지. 일하러 갈 때 그렇게 입고 가도 사장님이 뭐라 안 하냐?"
"네? 아. 이게 거의 유니폼인데요."
"··어디서 일하는데?"
"클럽 가드로····."
로자의 안광이 시퍼렇게 발했다. 어떤 찢어 죽일 년이 저렇게 입히고 일을 시키는 가 해서. 심지어 클럽 가드?
당장에라도 총알 몇 발을 그년의 대갈통에 박아주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로자가 온갖 방법을 떠올리며 표정이 프로처럼 변해가던 중, 샤샤가 급히 말을 이었다.
"제가 지원한 거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일단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나가볼게요."
"잠깐."
샤샤가 스카잔을 멋지게 휘날리며 집을 나가려 할 때, 로자가 그를 멈춰 세웠다.
"이모가 묵인하는 대가로, 네가 해줘야 할 게 있다."
"····어떤 거요?"
***
"페챠. 유리. 길거리에서는 떨어져 다니면 안 될까요? 사람 많은 곳에서 이렇게 다니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나는 타들어가는 속과 별개로 최대한 싸늘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이모가 말한 조건은 페챠와 유리를 호위로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클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택시에서 내렸다. 왜냐.
마주치는 사람마다 이쪽을 요상하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페챠랑 유리가 내 뒤에서, 양옆에 서며 경호하듯 따라오고 있는 탓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여자의 키가 170이 넘으면 힘깨나 쓰겠거니 생각한다. 그런데 그를 넘기는 여자들이 양복을 입고 남자인 나를 따라온다면?
그건 각자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겠지. 두려운 눈으로 이쪽을 흘끔 보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을 때 그녀들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네, 도련님. 놈팽이 같은 년 못 붙게 하라는 말씀이···."
"···페챠. 저게 합당한 이유 같나요? 집 근처에서는 아무 말 안 할 테니 지금은 멀리서 따라오세요. 두 분 모두 외국인이라 눈에 너무 띕니다."
뭔가를 꾹꾹 눌러 담은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던 페챠가 내 말에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 찰나였다.
"설마 멀리서 경호하는 걸 못해서 그러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닙니다."
"보여드리고 싶네요. 기다란 거 하나만 있으면 다가가기도 전에···."
살짝 그녀들의 자존심을 긁자 원하던 반응이 나온다. 나는 클럽 근처까지 와서야 몸을 돌려 그녀들에게 당부했다.
"여기는 사람도 많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일 끝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그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는 힘 없이 고개를 저으며 클럽으로 들어갔다.
*
오늘은 뉴페이스가 있었다. 공고 보고 들어온 신입 가드라던가. 시아가 직접 모든 가드를 뽑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듯한 젊은 여자. 유예리는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드는 듯 이것저것 잘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을 때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주하나입니다, 선배님."
"류세화에요. 그리고 그렇게 안 부르셔도 돼요. 저도 어제 들어왔으니까."
"아, 아니에요. 그래도·· 그냥 선배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럼 편한 대로 불러주세요."
부끄러운 듯 말을 좀 더듬었지만,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여린 사람 같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겠거니 하며 관심을 접고 데스크에서 일어나 업무에 복귀했다.
그렇게 평소대로 진상을 맞이하고.
잠깐 담배를 피우려 자리를 비웠을 때 번호를 따이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빛을 잃었던 하늘이 밝아질 때쯤, 유예리의 술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며 퇴근했다.
··· 귀신같이 따라붙는 페챠와 유리는 덤이었다.
*
"여기서 내리십니까?"
"네 살 게 있어서. 페챠. 혹시 신분증 있으세요?"
"예."
어제처럼 편의점 근처에서 택시를 세웠다.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페챠에게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보로 레드 한 보루만 사다 주실래요?"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무덤덤하게 말해오는 페챠에게 괜찮다고 말하자 그녀가 곧장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나는 유리를 이끌고 편의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잡았다.
살면서 담배 심부름 같은 걸 시킬 줄이야. 자괴감이 들지만 내 주종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다.
미나가 준 건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내가 피우던 담배에 비하면 감질맛만 났기에.
그나저나 하율도 빨리 만나고 싶은데·· 또 정신이 샤샤의 것으로 바뀌어 버릴 까봐 그러질 못한다.
바로 근처에서 하율이 일하고 있는데도 들리지 못하는 건 다 저 이유 때문.
집에 가서 빨리 타투이스트나 알아보기로 다짐했다. 손가락에 무슨 문구를 새길지에 대한 고민도.
***
'으아···또 외국인이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갈 때쯤 찾아온 외국인 여자에 하율은 내심 긴장했다.
이 분도 세화처럼 한국말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영어라도.
하지만 다행히-
"말보로 레드 한 보루 주세요."
그녀는 꽤나 능숙히 한국어를 구사했다.
하율은 밝게 웃으며 신분증을 확인한 뒤에야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세화랑 같은 거 피시네. 심지어 한 보루···.'
비흡연자인 하율로서는 담배를 왜 피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자해를 했던 세화가 떠올랐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꼭 담배를 찾더라. 그래서 그런 걸까.
하율은 아래서 뒤적거리며 겨우내 찾아낸 담배 한 보루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결제를 마치고 나간 뒤에야 하율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으읏···."
그다음 순서로 찌뿌둥한 고개를 삐걱거릴 때 문득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조금 전에 나간 손님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광경이, 안 보려 해도 안 볼 수가 없었다.
실로 살벌한 기세가 풍겨오기에 하율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으려다 안도하는 듯 숨을 내쉬더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살짝 호기심이 치민 하율은 테이블을 정리하는 척 밖으로 나와 벌써 한참이나 멀어진 손님의 등 너머로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띄웠다.
"저거 세화인가···?"
하율은 후다닥 뛰어가 벽에 몸을 숨기며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대충 검은 머리에, 옆에 서 있는 여자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가 서 있는 정도만 보였다.
"···스토커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거야."
순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의문이 일은 하율은 착각이겠거니 생각하고 편의점으로 돌아가려 했다.
근데 인간의 직감이라는 건 쉽게 무시하기는 힘든 법이었다.
아주 잠깐만-이라고 중얼거린 하율은 벽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하율은 첩보영화를 찍는 듯 건물마다 몸을 숨기며 아주 천천히, 멀리 서 있는 남자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옆의 여자는 누굴까 해서.
'····어?'
손님이 걸어가는 방향이 남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가만히 서 있는 남자와 여자.
'····이 방향은?'
하율은 들키는 것 따윈 걱정하지 않고 과감히 거리를 좁혔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손님과 그들이 아는 체를 했다. 그런 후에야 남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세화?'
분명 자신이 골라줬던 스카잔. 세화가 입었던 검은색 나시. 피부색과는 이질적인 거뭇거뭇한 색. 아마··문신일 터였다.
멀리서 봐도 모를 수가 없었다. 여자 두 명은 세화 뒤로 빠져 그를 둘러쌓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갔으나 하율은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들을 계속해서 따라갔다.
큰 가슴 위로도 둥둥대는 고동이 느껴지는 것 같다.
손님이었던 그녀가 세화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뭔가를 소곤거리자 하율의 긴 속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아닐 거야."
뭐가 아니라는 건지. 하율은 애써 차오르는 불안감을 부정하며 눈으로 그들을 쫓았다.
업무도 내팽개치고 미행하고 있다는 건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들이 남겼던 발자취가 가시밭길 같다. 분명 다가가면 찔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하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이 한 건물 앞에서 우뚝하고 섰을 때.
하율의 심장도 멈추는 듯했다.
그곳은 세화의 집이었다.
때문에, 한달음에 달려가서 세화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여자들이랑 같이 너 혼자 사는 집까지 왔냐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지 않겠냐고··· 애써 좋은 말로 달래가며.
하지만 하율에겐 그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믿기 힘들게도 세화랑 그녀들이 사이좋게 집에 들어가 버렸으니까.
하율은 세차게 흔들리는 동공으로 세화의 집만 바라보았다.
볼을 꼬집어 본다.
느껴지는 감각 탓에 눈꼬리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