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담배가 문제(2)
"이제 슬슬 들어가지 않을래요?"
내 말에 페챠와 유리가 품에서 슬며시 손을 뺀다. 그녀들의 정장 상의에 볼록 튀어나온 미세한 둔덕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모퉁이만 돌면 집이 있는데도, 들어가지 못하고 계단에서 이러고 있는 건 다 페챠의 말 때문이었다.
'누군가 미행 중입니다. 먼저 들어가 계시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
페챠의 귓속말에 그녀를 슬쩍 바라봤었다. 이내 그녀의 눈을 보곤 그녀를 말렸다. 그녀가 알아보겠다는 방식은 아마··절대 평화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토커같은 새끼가 아니라 우연히 길이 겹친 선량한 시민이라면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었다.
결국은 내 자취방이 있는 건물에 들어오고 나서도, 그녀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들의 마지막 타협이자, 내 안전을 추구하는 마지막 안전장치였다.
그로부터 끝끝내 그 수상스러운 미행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괜한 말로 걱정시켜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상하네."
네가 이럴 리가 없는데-라는 눈빛으로 페챠를 바라보는 유리와 대조되게 페챠가 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할 게 뭐 있어요.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나는 페챠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그리고서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지는 느낌과 동시에 수면이 절실했으니까.
"···감사합니다."
눈썹을 꿈틀거린 페챠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섰다.
'이제 좀 자겠···'
덜컹!
"····?"
집에 들어오니 이모가 컵라면을 후룩후룩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모가 시선을 컵라면에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조카 왔냐. 너희도 고생했다."
"··입에 좀 맞으세요?"
나는 어색함이 담긴 목소리로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는 입을 쓱 닦으며 말했다.
"어. 맛있네. 너 먹을 거였으면 미안하다. 몇 박스 더 사올까?"
"괜찮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입 데여요."
설마 먹는 거 가지고 뭐라 할까.
내가 오히려 걱정까지 해주자 이모는 어색한 젓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촉촉히 젖은, 심지어 부담스럽기까지 한 시선을 회피하며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내 엉덩이가 맞닿는 순간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액정에 띄워진 이름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샤샤. 누구냐?"
"잠깐만요."
자꾸만 기분이 둥실둥실 해지고 의도치 않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전화를 받으며 무언가를 기대했다.
"네, 누나. 무슨 일이에요?"
ㅡ···세화야. 혹시 오늘 밤에 시간 돼?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도 이렇게 목소리가 힘없진 않을 텐데.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무슨 일 있어요?"
ㅡ그건 아니고··· 그냥 얘기하고 싶은 게 좀 있어.
목소리만 들어선 꽤 심각해 보이는데.
"오늘은 좀 곤란한데··· 혹시 내일 밤은 안 될까요?"
ㅡ····.
나도 하율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오후 8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가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 다 합치면 너무 시간이 애매하니까.
하율이 침묵에 잠기자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누나 그러면···"
ㅡ··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꼭.
마지막 단어를 단단히 강조하는 하율이 귀여웠다. 그 덕에 표정이 풀렸다.
"네. 내일 봐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눈웃음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꼭 봐야 할 이유가 뭘까. 고민 상담? 기분이 안 좋아 보였으니 의지할 사람이 필요한가?
"··샤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구나. 친한 사람이냐?"
이모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친한 누··"
나는 하율을 누나라고 소개하려다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하율은 21살이다. 나는 22살이고. 뭔가 억울 한데.
살짝 머리칼을 쓸었다. 일단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대충 소개하기로 했다.
"친한 여자에요. 저 많이 도와주고 잘 대해줬던."
"사귀냐?"
"··· 아니요?"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
싸늘하게 물어오는 이모에게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율과 친하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고 뜬금없는 질문도 웃긴 탓이었다.
저게 딸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인가··· 하고 상상해보려다 나 자신이 뭔가 역겨워지려 해서 그만두었다.
내가 고개를 저어 부정한 이후로 이모에게선 말이 없었다.
조금 싱겁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으로 타투이스트를 검색하다 몰려오는 졸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
자고 있는 조카를 본 로자는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가며 억눌렀던 숨을 토해냈다.
조카가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만 가끔 예전의 모습들이 새어 나온다.
온갖 것으로 점철된 샤샤의 금안이 간간히 보일 때마다 두렵다. 그게 가져올 결과도.
그저 조카가 지금의 눈빛을 끝까지 가지고 있길 바랄 뿐 이었다.
"걱정마십시오. 저희가 잘 보좌하겠습니다."
"···저도요."
자신이 편치 않은 기색을 보이자 부하들이 위로 한 마디씩을 건넨다.
로자는 그녀들을 마주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를 지운 발걸음으로 조심히 다가간 로자는 조카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로자는 손가락으로 조카의 얼굴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네 연인의 미래는 둘 중 하나일거다. 네가 파멸시키거나.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지거나.
자신의 말을 듣고 있으면 좋겠다. 동시에 듣지도 말았음 했다.
"너는 사랑을 잘못 알고 있어, 조카야. 네 누나한테 배운 건··"
로자는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다 가짜야."
***
출근 3일 째다.
분명히 짧은 나날이었으나 나는 이미 팀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가끔 오는 손놈들을 앞장서 쫓아내고,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아끼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알바라는 건 참 색다른 경험이었다. 물론 좆같은 새끼들을 만날 땐 좆같긴 했지만 재미는 있었다.
지금은 담배를 피우러 흡연장에 가고 있었다. 오늘은 항상 같이 가던 유예리 대신 , 어제 들어온 주하나와 함께였다.
오늘은 유예리가 아프다고 출근을 안 했다.
대수롭지 않게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오늘은 선배한테 술 마시자고 얘기할 사람이 없겠네요."
"그러게요. 예리 선배가 빨리 나으셔야 할 텐데."
농담조로 말문을 연 하나는 방긋 웃었다.
"예리 선배랑 많이 친하셨어요?"
"그렇다기보단·· 직장 동료로서의 걱정?"
하나는 아-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근데 귀찮지 않으셨어요? 항상 끝나고 선배한테 술 마시러 가자 그랬는데. 솔직히 예리 선배가 왜 그랬는지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그렇다고 거기에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요."
"우와··· 마음이 넓으시네요. 솔직히 처음엔 무섭다고 생각했어요. 막 여기저기 문신 있어서·· 선배가 무섭다는 게 아니라 무서운 여자친구 있을까 봐요."
주하나가 실실 웃었다. 살짝 미소 지은 나는 내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보이긴 하죠."
"농담이에요. 근데 아도니스는 무슨 뜻이에요?"
주하나가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가리켰다. 나는 뜸을 들이며 대답을 미뤘다.
전에 이름만 검색해보니 어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이랬는데,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러니.
한 가지 신기했던 건, 이 세계라면 신들의 성별도 바뀌어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단, 아예 바뀌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제우스에게 강간당하는 여자들의 반응을 보면 아주 기뻐했으니까.
내가 보기엔 거의 야설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로 그러니까 신화지, 하는 여론이 대다수였긴 하지만.
회상을 마치고 궁금해하는 듯한 주하나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그냥 아무 단어나 새긴 것 같은데."
"····아. 그러시구나."
주하나가 입을 닫았다. 나도 더는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
"선배. 담배 하나 피우고 갈래요?"
퇴근 시간이 되니 기분이 좋은 듯한 주하나가 물어왔다.
대답을 잠깐 미루고 하늘을 바라봤다.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퍼진 하늘이 보인다. 거기에 취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하곤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댔다.
ㅡ페챠입니다. 지금 가도 될까요?
"네. 제가 말한 곳으로 오세요.
전화를 끊자 눈을 반짝거리는 주하나가 보였다.
"와, 선배. 방금 러시아어에요? 친구랑 통화한 거죠?"
"네."
"한국말도 잘하고 러시아어도 잘하고. 선배 너무 사기네요. 전 둘 다 못하는데."
주하나의 자학적인 농담에 빙그레 웃었다.
"뭐 어때요. 일단··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미안하지만 먼저 가 볼게요."
"아, 아쉽네요. 그럼 나중에 봐요!"
멀어져가는 주하나를 잠깐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유예리보다 그녀의 성격이 더 활발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
아침에 일어난 하율은 퀭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있다가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손에서 딱딱한 감촉이 아닌 부슬부슬한 털이 느껴졌다. 마루였다.
"마루야아··"
몸을 돌린 하율은 마루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마루를 보니 문득 세화가 생각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학교 갔겠지···."
앓는 소리를 낸 하율은 마루를 놓아주고 마른세수를 했다. 오늘 세화를 만나는 게 옳은 선택일까.
그 여자들은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알았냐면서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진 않을까.
사실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추잡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율은 핸드폰으로 인터넷 뱅킹을 들어가 내역을 확인했다. 입금자명에 세화의 이름으로 찍힌 것들이 눈에 띄었다.
처음엔 병원비도 없어서 자신을 부른 세화가 몇십만 원에 달하는 돈을 보내고 있었다.
혹시 부모님이 돈을 보내준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혼자 살지. 보통 가족끼리 이민을 오잖아.
세화랑 사생활에 관련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자신이 빌려준 돈과 한사코 거절했지만 세화가 막무가내로 보내버린 마루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까지.
어떻게 단시간에 돈을 벌었을까 하는 이성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하율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단정 짓지 마, 신하율."
자신을 향해 중얼거린 하율은 다시 뒤로 쓰러졌다.
마루의 동그란 이마에 얼굴을 부비부비 비벼대는 것으로 상념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그런 노력에도 살과 살이 섞이는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막아낼 수 없었다.
"····인생이 시궁창 같아."
중얼거린 하율은 팔을 들어 눈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