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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화 〉동기화가 진행 중이니 꿈을 바꾸지마세요 (1) (52/94)



〈 52화 〉동기화가 진행 중이니 꿈을 바꾸지마세요 (1)

*

등굣길 이었다.
풍경은 여느 때와 같았다. 아스팔트 바닥을 데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볕. 짧아진 사람들의 복장.
나는 지금 여름 속을 걷고 있었다.

"이모."

내 부름에 이모가 고개를 돌렸다. 찡그린 미간 겹겹에 물방울이 스며 있었다.
벌게진 얼굴과 살짝 벌린 입에선 열기가 새어 나왔다. 나는 반대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이모."
"···왜."

다시 한 번 부르니 그제야 대답을 해준다. 비록 짜증이 배어 나온 말투였지만.
무더위가 이모의 심기를 건든 듯했다.
고심하듯 입술을 매만졌다.


"코트는 벗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너 학교 데려다주기 전까진 안 돼. 나는 항상 여기서 꺼내거든. 아니면 허리에라도 차고 싶지만··· 한국에선 안 되니까."

이모는 날 바라보며 자기 가슴 쪽을 톡톡 두드렸다. 이내 말을 마친 그녀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돌더니 눈을 살짝 찌푸린다.
나도 뚱한 눈으로 저 앞을 응시했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회사원도. 어딘가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다른 학교 교복의 학생들도.
그중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은 이쪽을 바라보더니 속닥속닥 거렸다.

'오늘도 여전하네.'


페챠랑 유리와 다닐  만큼은 아니었지만, 피부 하얀 색목인을 신기하게 여기는  말이다.
인적 드문 주택가라면 몰라도 여기는 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다.
그 말은 즉, 여기 사람들은 외국인들도 많이 봐왔을 거란 얘기였다. 그런데도 저럴 정도라니. 대한민국에 안전지대는 없네.

어쨌거나 내가 전에 이모에게 일렀던 주장을 다시 관철할 때가 왔다.
그게 뭐냐 하면···

"이모. 보고 있어요?"
"확실히. 시선이 많이 끌리긴 하네."
"그럼 제가 말했던 거 다시 생각해주세요. 어디 갈 때마다 뒤에 누구 따라붙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외국인이라 어딜 가도 튀는 데, 이모도 그렇고 페챠랑 유리도 그렇고  외국인 이니까 좀··. 평소에는 저런 시선보다 배는 더 받아요."

손가락을 들어 사람이 몰린 정면을 가리켰다.

"흠.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닐 텐데."

이모가 실눈을 뜨며 내 얼굴을 흘끗 본다. 보나 마나  얼굴을 칭찬하며 다 너 때문에 그런 거라고 넘어가려는 수작이다.
저번에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였다. 자기들이  집을 보러 간 그녀들이 돌아온다면 이렇게 이모와 독대할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니.

"이런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저도 많이 양보했다고 생각해요. 집, 사생활. 물론 좋은 뜻으로 하시는  알고 있지만, 저로서도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제가 기억을 잃었어도 이거 한 가지는 똑같아요. 제약받는 건 싫다. 진짜 죽기보다 싫다."
"····."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내 입에서 단호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문장의 끝에는 과장을 섞고, 거짓 또한 조금 섞었다.

내 냉정한 대답에 이모가 침묵에 잠겼다.
나는 쓸데없이 부드러운 내 머리칼만 쓸며 이모의 대답만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원하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도시의 부품들이 질러 대는 비명만 들려올 뿐.

출근길 도로에선 차가 빵빵대는 경적이. 걸음을 옮기며 지나친 핸드폰 매장에선 시끌시끌한 노래가 고막을 괴롭힌다.
 엿 같은 소음이 뭉치고 뭉쳐 이곳을 싸구려 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만든 것만 같다.

"····"

우리는 아무  없이 걸었다.
관객들의 어깨와 부딪혀도.
카메라 플래시처럼 발하는 사람들의 눈에도 아랑곳 않고 학교 입구까지 도착했다.

고개를 돌려 이모를 보았다. 종아리까지 내려온 검은색 코트. 품이 넓어 이모가 한층 더  보였다.
이모는  안의 권총 때문에 옷을 벗지 못했다.  더운 날씨에도.

저절로 내 눈가가 뭔가에 짓눌린 듯 내려갔다.


"·· 일단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그 코트는 이제 좀 벗으세요. 더우니까."
"거참. 내가 알아서 어련히 잘  텐데."

감정을 최대한   말은 차가운 정적에 얼음을 더하는 격이었지만, 이모는 그 안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웃어제꼈다.
그녀가 호탕하게 웃을 때마다 어깨가 들썩인다. 푸석한 금발이  움직임에 따라 팔랑거렸다.

그 날갯짓이 서늘했던 분위기에 훈풍을 가져온다. 나조차도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로.

"··· 생각은 해보마."
"뭘요?"
"네가 말했던 거. 내가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도 있긴 하니. 미안하다."
"·····."

이모는 그리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이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히 투정 부려서 죄송해요."

***


드르륵.

교실 문을 열었다. 다른 것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내 옆자리를 응시했다. 비어있다.
순간 눈이 차갑게 식는 걸 느끼며  자리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그녀들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색이 물든 머리에 가슴골까지 들어찬 문신들.


"아, 안녕··."

혜민과 수영이었다. 조용히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이제 가라고 손짓하니 그걸 본 혜민이 급히 말했다.


"세화야·· 혹시 아침에 그분은 누구야? 코트 입고 있던 여자."


누굴 말하는 건지 잠시 생각한 나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이모."
"그, 그렇구나. 더위를  타시는 것 같길래·· 신기해서 물어봤어."


하긴 이 날씨에 코트 입고 다니는 사람이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더위를 안 타시는 건 아니지."
"····?"


그럼 왜? 라고 묻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혜민에 싸늘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혜민이 입을 다물자 나는 다시 손을 내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혜민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수영이 잡아끄는 손길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수영에 주던 눈길을 거뒀다.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미나가  때까지 엎드려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며칠에 걸쳐 쌓인 피로는  눈가를 찔러 댔다. 얼른 감으라고 재촉하니 버텨낼 여간이 없었다.

'씨발··· 또 그 패턴 나오는  아니겠지. 좆같은 꿈 꾸게 하는··'

나는 저절로 스르륵 눈이 감겼다.

*


오늘의 꿈은 무서웠다.

'오늘 멋졌다 아들. 상대가 꼼짝도 못 하던데.'
'아 오지 마시라니까··· 설마 엄마도 왔었어요?'
'당연하지.  엄마가 가자 한 거야. 당신 말 좀 해봐. 아까 그렇게ㅡ 소리 지르면서 응원하더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아유,  무서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네.'

그 뒤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목한 가정이다. 내 원래 집이기도 했다.
뚱뚱한 아빠가 앉았다가 부숴 먹어 수리한 의자. 때가 탄 소파.  위에 걸린 가족사진이 든 액자.

집의 온기가 몸에 퍼졌다. 몸을 둥글게 만 태아가 되어 엄마의 배 안에서 부유하는 것 같이·· 아늑했다.

이곳은 부서지지 않았음 했다.
그러나  될 것이다. 이건 잔인하게도 현실이 아닌 꿈이었으니.


나는 지금을 기억하니까.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망막에 도장을 찍듯 그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내가 이상한  부모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싱긋 웃었다.

'임마, 갑자기  울어.'
'얘가 원래 감수성이 좋잖아요. 이겨서 좋은 거겠죠, 결승전이었는데. 고생했어. 우리 아들.'

나는 이상하게도,  꿈을 깨고 도망가고 싶었다.


*


····언제부터 자고 있었던 걸까.
미나는 옆에 있는 사람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늦잠을 잔 터라 선생님에게 잡혀서 시달렸었다. 그것도 교문에서.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짜증에  한숨을 내쉬며 좋은 하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좋은 날일지도."


미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흑발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세화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머리카락 몇 올 만지작거리는 거로 깨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있기를 잠시, 미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자기는 틈만 나면 내 머리 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몰래몰래 하고 있을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근에 세화는 이상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연인 같은 스킨쉽이 늘었다.
미나를 뒤에서 안거나 손을 잡는다던가 하는. 심지어 하굣길에서도.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그때  이후로.

순간 미나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업 중인 선생님과 그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이쪽은 신경 쓰지 않을 듯하니 다행이었다. 혹시 몰라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이번엔 안 당해."

미나가 머리를 흔들자 은발의 끄트머리가 따라 살랑인다.
결의가 담긴 눈으로 세화의 뒷통수를 흘기듯이 쳐다봤다.

지금은 곱게 자고 있어도 금세 종이 치면 일어나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사실 괴롭힘이 맞는진 모르겠지만··하여튼.
또 어리숙하게 바보같이 있을 순 없다. 이번엔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 애매하게 마음 주는 못된 여우를 당황하게 해야 마음이 풀릴 듯했다.

"··나만 당하는 건 억울하니까. 깨어나면 봐."

그리곤 펜을 들어 잠시 놓쳤던 수업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상했다.

'왜 안 깨지?'

벌써 점심시간이다. 그것도 애들이 전부 나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미나는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무덤덤한 척 세화를 깨웠다.

"·····어?"

그러다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흔들어도 세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세, 세화야?"
"그냥 자게 놔둬. 자는 거 맞아."

뒤에서 듣기도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굳은 표정의 혜민이 서 있었다.
미나도 표정을 딱딱히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


"왜?  먹으려 가야 하는데. 신경 꺼."
"하. 내가 충고 하나 할게. 우리 친구였으니까."
"··· 또 이상한 소리  거면 밥이나 먹으러 가."


혜민은 입꼬리를 늘이곤 고개를 숙여 미나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다 죽어 너. 얘  하는 사람인지 알면··"
"알아. 마피아였잖아."
"네가 어떻게 알·· 아니다. 너도 잘 아는 건 아니구나."
"어쩌라고. 지금은 아니니까 상관없잖아. 사람을 죽였어, 뭘 했어."


혜민이 꺼림칙하게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그래.  해봐. 아··· 그리고 내가 말했다는  세화한테 비밀로 해주라."
"···너 바보야?"


미나는  이런 멍청한 사람이 다 있느냐는 눈으로 혜민을 바라봤다.
무슨 흑막처럼 다가와선  저래? 아마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뽐내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럴 거면 사전에 약속이라도 하던지.

"애초에  믿고 말해준 거야··?"
"어··· 아니, 나는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씹."

그제야 자신이 병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은 혜민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이리저리 변명을 덧붙이려던 혜민은 미나의 뒤를 가리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 나는 먼저 갈게! 진짜 비밀로 해줘야 해!"
"···왜 저래?"

어리둥절해진 미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미나는 흠칫 떨었다.
엎어져 있던 세화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일어나있었다.
미나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세화가 정신을 차린다면, 장난스럽게 자신에게 손을 뻗어올 것이다.

홍조를 띄운 미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세화의 어깨를 흔들어 비몽사몽 한 듯한 그를 깨우려 했다. 일단 밥은 먹으러 가야 했다.


"세··세화야. 일단 일어나."
"·····아. 와있었네. 너 기다리다 자 버렸어."
"나, 날?·· 너 괜찮아?  좀 치워봐."

미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껴 세화의 손을 거두려 했다.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다.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그렇기에 동공이 흔들렸다. 떨리는 시선으로 조심히 손을 뻗어 갔다.


덥썩.

미나의 여린 손목이 크고 단단한 손에 잡혔다. 그렇게 드러난 세화의 한쪽 얼굴을 보며 미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안 좋은 꿈을 꿨어. 아니 좋은 꿈인데··."
"·····."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세화가 눈을 떴다. 낯설었던 최근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금빛이 물에 젖어 일렁였다.
놀란 미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는 것 말고는·· 자신이 할  있는 게 없었다.

이럴때 어떻게 해야 하지. 인터넷으로 본  많은 데 막상 떠오르는 게 없다.
고개를 푹 숙인 미나가 속으로 자조할 때 세화가 아무렇지 않은  담담히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부, 부탁? 이상한 것만 아니면  괜찮··"

그 평온한 말투에 속아 넘어간 미나는 다시 평소처럼 대답했다.
미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세화가 서서히 다가왔다. 미나는 호흡도 멈추며 숨을 죽였다.

"··왜, 왜? 이번엔 뭐하려고···· 어?"

흑색의 머리카락이 볼을 살랑살랑 간질였다. 불안정한 숨결이 어깨에 닿았다.
···· 하얗던 교복의 가슴팍이 서서히 회색으로 젖어 들어갔다.

미나는 조용히 팔을 뻗어 넓은 등을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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