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시들어가는 꽃(2)
*
'···결국, 자리까지 피하는 거니.'
누군지도 모를 사람과, 어색한 러시아어로 얘기를 나누는 세화.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운동 기구를 만지작거리는 헤어 밴드를 찬 아줌마들이 가득한 공원.
이 정겨운 광경 속, 나만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거 같다.
하율은 살짝 시선을 올려 아까 바라보던 하늘을 다시 눈에 담았다.
살던 지방보다 조금 더 탁한 하늘이나, 이제는 자신의 이불처럼 편안한 서울의 하늘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말처럼.
상경 직후 모든 게 낯설었던 하율 또한, 이곳에 자신만의 둥지를 틀어가는 중이었다.
피곤하고 힘든 생활의 연속이어도 즐거움은 있었다.
허나 잔인하게도,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거센 비바람은 둥지를 걷어갔다.
"···누나?"
"응. 난 괜찮아."
하율의 입가에 어이없는 실소가 매달리다 자취를 감췄다.
그 즐거움의 정체와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비바람의 정체도 깨달아서.
"그럼 먼저 가볼게요. 미안해요."
"아니야. 미안할 거 없어."
하율은 훌훌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가 불편하다면 놓아줄게. 역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나 봐.
가까워졌다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너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네.
···· 난 지금까지 뭘 한 걸까.
"누나. 그리고."
무거운 세화의 목소리가 어깨를 짓누른다.
하율은 자연스레 세화의 뜻을 직감했다.
풀린 눈으로 세화를 마주하며 이 인연을 끝낼 선고를 기다렸다.
"다음에 저 일 하는 거 보면 아는 체라도 해줘요."
"···?"
"누나가 제가 하는 일 싫어하는 거 알고는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또 나쁘진 않아요."
그걸 가까이서 보라고···?
"세, 세화야 나는 그런 거 싫··"
"놀다 가라는 거 아니에요. 저 일 하는 것만 입구에서 지켜보라는 거지. 저도 누나가 안에서 노는 건 싫어요."
"····으응?"
살짝 웃은 세화가 담담히 건네는 말에, 어색한 부분을 느꼈다.
하율은 손가락을 붉은 입술 위에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입구는 뭐고 안에서 노는 건 또 뭐지? 세화가 직접 그걸·· 하는 게 아닌가?··· 다 말도 안 되는데.'
"바쁘면 안 와도 돼요."
"아, 아니야. 그럼·· 너희 집으로 오라는 거야?"
"아뇨, 저 일 하는 곳이요. 발키리."
"····?"
혼란스러움에 생각할 권리를 뺏겨 버린 하율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세화는 그런 하율을 잠시 응시하다 핸드폰을 한 번 들여다보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이제 진짜 가볼게요. 다시 연락할게요."
"으, 응. 잘 가!"
하율은 떠나가는 세화를 바라보다 느닷없는 의문 조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뭐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짚어가려 해도, 뇌리를 가득 메운 물음표를 걷어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
하율과 헤어진 후.
서서히 속도를 높여가던 발걸음은 이내 뜀박질이 되었다.
앞머리가 흩날리며 이마를 철썩철썩 때렸다.
그 덕분인지, 머리를 가득 채우던 잡념 덩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오진 않았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공원에서 집 가는 길이 원래 이렇게 멀었나, 하는 생각.
그로부터 가로등 수십 개는 족히 지나칠 무렵··
"하아, 하아·· 오지 말라니까 말 좆도 안 들어요··."
내 원룸이 있는 건물 입구까지 오고 나서야 달뜬 숨을 토해냈다.
허리를 숙여 무릎을 잡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진데, 느닷없이 찾아온 이유가 뭘까··
"·····"
모르겠다.
그나마 지금 알 수 있는 건 이거 하나뿐.
앞이 깜깜하다. 슬며시 눈을 떠 보아도, 어두운 건 마찬가지.
터벅, 터벅.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랐다.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가만히 있는 센서등에 이 건물의 수준을 느끼며 감탄했다.
한 편으론 사람보다 나은 거 같기도 했다.
"누구는 하지 말라고 친절히 경고까지 해주는데도·· 기어코 이 사달을 내거든."
그렇게, 문 앞까지 오고야 말았다.
'이모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 자유로운 생활은 물 건너간 건 확실하고.'
"···망할."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문을 벌컥 열었다.
열자마자 흐릿한 인영들이 보였지만, 내 눈은 오직 그녀들을 향했다.
"와, 왔어. 드디어 왔어! 세화야! 제발, 나 좀 풀어줘!"
"화, 확인해보세요. 진짜 아는 사이 맞아요··."
축 늘어져 있던 혜민과 수영이 옆을 번갈아 보며 애원해댔다.
나는 조용히 신발을 벗으며 천천히 그녀들 앞까지 다가갔다.
이내 한쪽 무릎을 쪼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녀들과 조용히 눈높이를 맞췄다.
"····?"
"내 말이 별로 와 닿지 않았나 봐. 이렇게 좆대로 행동하는 거 보면."
"그, 그, 그게 아니야·· 네가 우리 죽··"
혜민이 이빨을 딱딱 부딪친다.
나는 허탈함과 분노가 섞인 뒤틀린 미소를 자아냈다.
"어떡할 건데. 다 들켰잖아."
이모한테.
*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어머니, 제발!'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격언이 있다. 여자는 아랫도리를 조심해야 한다고. 자궁이 뇌를 지배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머니·· 다 죽게 생겼다고요··'
'차라리 죽어버리라 하고 싶지만, 마지막으로 참으마. 내 다리는 그만 붙잡고 일어나. 골프채로 부수기 전에.'
'아, 알겠어요. 내려놓으세요. 그럼 이제 진짜 찾아가나요··?'
'그거라도 안 하면 이대로 죽겠지. 그리고 남자라는 족속 상,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니 찾아오라는 뜻일 수도 있고.'
'그래도··.'
'그 세화라는 놈, 인내심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아. 오늘 당장에라도 가라. 가서, 무릎 꿇고 빌어.'
'··당장 가보겠습니다.`
'혜민아.'
'네··.'
'내가, 차 좀 타고 다닐 수 있게 해줘라.'
'····죄송합니다.'
*
그 뒤로 혜민은 수영과 함께 꽤 긴 시간 택시를 타고, 세화가 보내준 주소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1억을 꾹꾹 눌러 담은 케이스 하나를 품에 안고서.
지금 자신들은 유배 가는 죄인 마냥 맨몸으로 가야 했다.
감히 고급 진 차를 타고 편하게 가서,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때문에 운전기사가 딸린 차도 빌리지 못하니.
케이스를 주렁주렁 들고 갈 바에 차라리 모양새라도 좋아 보이게 가는 것이 낫다, 라는 게 어머니의 의견이었다.
어차피 돈 욕심이 크게 없는 세화니까 이해해 주겠지. 중요한 건 자신들의 진심 아닌가.
일단 이렇게 준비했다고 견본을 보여준 뒤, 용서를 받아낸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최대한 빨리 가져오겠다고 하면··
···이미 정리가 끝난 얘기.
그의 집 문 앞에 선 그녀들은 비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수영이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똑, 똑.
"····"
아무도 없나?
다시 한 번 수영이 두들겼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절박해진 그녀들은 허둥지둥 하다 움직임을 멈췄다.
··뚜벅, 뚜벅.
저 멀리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그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으스스한 이 복도까지 흘러왔다.
혜민은 저도 모르게 케이스를 꽉 안으며 어두운 복도 입구 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 아니잖아."
이윽고 그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모자에 마스크를 끼고 있으나 몸의 굴곡은 여성의 것이란 걸. 키는 자신들보다 훨씬 컸으나 세화보단 작았다.
'한 번만 더 두드려보고 전화 해보자.'
그녀들은 여전히 문에 딱 붙어 선 채, 다시 문을 두드리려다 멈칫했다.
"····?"
"헤헤, 그 케이스 안. 잠시 볼 수 있을까요."
너무나 또박또박한 발음은 한국인의 것이라고 보기엔 살짝 어색했으나, 그녀들은 그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초조하고 절박한 심정은 위화감조차 씹어 삼켰다.
오직 지금. 그녀들의 머리엔 세화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과 무사히 돈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뿐만이 최우선 의제로 자리 잡고 있었으니.
"누, 누구세요? 케이스는 왜요?"
"아, 제가 이 건물 경비거든요! 못 보던 여자 분들 같은데 수상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쪽 복장이 경비에요? 그냥 가세요. 그쪽 일 아니에요."
"흐··· 그럼 그냥 힘으로 뺏을게요."
이어지는 괴한의 말에 긴장한 혜민은 품에 있는 케이스를 더욱 꽉 조였다. 문득 옆을 보자 수영이 하-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아줌마 강도에요? 애초에 케이스를 왜 보려는 건데. 누구에요 당신?"
"····"
혜민은 수영의 거친 말에 눈을 휘둥그레 띄우다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렇게라도 가오를 잡아야 할 때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듯. 포식자가 사냥을 포기하게.
뜬금없이 케이스를 보여달라는 여자가, 안의 돈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뺏기면·· 세화가 돈 어딨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이건 그냥 돈이 아니었다. 목숨을 일시 연장해줄 계약금이었다.
하지만 되도 않는 허세였는지, 강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끅끅 웃어댔다.
"경찰 부를까요? 저희도 싸움 잘해요."
"적당히 해·· 칼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없는 것 같은데. 양손에 아무것도 없잖아. 일단 내가 앞에서 막을테니까, 넌 계단으로 냅다 튀어."
"야··."
"지금까지 내가 받기만 했잖아. 네가 원인 제공한 건 맞는데·· 그래도 그때 먼저 튄 건 미안해서."
혜민이 글썽이는 눈으로 수영을 바라봤다.
여자들의 뜨거운 우정이 모락모락 열기를 내며 피어올랐다.
"어차피 나 달리기 못해. 그리고··일단 살아야지. 지금 돈 잃어버리면, 다시 가지러 갈 시간 없어. 나중에 밖에서 다시 만나자."
"··고맙다."
잠시 후 그녀들은 속삭이느라 맞댄 얼굴을 떼며 괴한을 주시했다.
"회의 다 끝났어요? 그럼 이제 보여 줄 수 있는 거예요, 응?"
강도가 모자 앞 챙을 푹 누르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셋 둘 하나 하면 내가 먼저 뛴다. 내가 저년 잡고 있으면 도망가."
"야 ··이수영. 위험하면 당장 도망 나와라."
"둘 다 말이 없네··· 아 진짜 각박하게. 그거 하나 보여주기 어렵나."
강도의 푸념을 들으며 수영이 주먹에 힘을 주었다.
혜민은 다리에 힘을 단단히 주고 달리기 자세를 잡았다.
"셋, 둘, 하나!"
혜민은 쏜살같이 튀어나간 수영의 등을 아련한 눈으로 쳐다보며 뒤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앞서 간 수영이 고사리 같은 주먹을 괴한에게 휘둘렀다.
쉭-
"·····?"
치이이익ㅡ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뜬 순간, 혜민의 발아래에 무언가가 질질 끄는 소리를 내며 배달되었다.
발끝에 툭툭 차이는 게 있었다. 혜민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려보았다.
"으앗, 깜짝이야. 놀랬잖아요. 안 그래도 새가슴인데··."
유리는 눈물을 닦는 척 손으로 흑흑하는 흉내를 냈다.
그러다, 유리가 모자챙을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싸늘한 갈색 안광이 꼬리를 끌며 따라왔다.
"이제 확인해도 되죠?"
가방을 들고 있는 혜민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케이스에 손을 뻗었다.
"자, 뭘 가져 왔길래 그렇게 꼭꼭 숨겼을까요. 것도 도련님 집 앞··· 어."
유리는 열어젖힌 케이스를 탁 닫으며 빤히 혜민을 쳐다보았다.
"그럴 이유가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