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시들어가는 꽃(4)
*
정수리가 지금의 허리조차 오지 않는 시절의 로자는, 선악을 구분 짓길 좋아했다.
허나 세월이 흐르고 눈높이가 하늘에 닿아갈수록, 그것은 무가치하고 너무나 가벼웠다.
음지에 몸을 담가버린 언니를 악으로 규정하고 선을 집행한다면 자신에겐 무엇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니까.
수많은 임무를 거친 그때의 자신 또한, 별반 다를 게 없어졌음을 깨달았기에 잣대를 들이밀지 못했다.
하여 아직도 기억이 난다. 새벽녘에 호호 차가운 입김을 불어가며, 언니가 마피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눴던 얘기가.
'진짜 미친. 나중에 낳을 자식한테 부끄럽지도 않아?'
'자식은 안 낳을 거다. 나 레퀴엠이야.'
'낳아 봤자 뺏겨서 그래? 지금이라도 나가면···'
'그럼 죽음이지. 로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가만히 있어라. 우리는 위에 끈이 많아. 고작 일개 요원 하나가 어떻게 해볼 조직도 아니고. 같은 팀한테 죽기 싫으면 조용히 지내.'
'·· 언니, 병신이야? 그런 싸이코 같은 데를 왜 들어간 거야?'
'돈.'
그 짤막한 한 마디에 탁자를 엎고 주먹질을 벌였었다. 다시는 언니를 보지 않으리라 홧김에 다짐하기도 했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자는 알게 되었다.
나날이 쌓여만 가던 아버지의 병원비는 꼬박꼬박 납부되었고.
일찍 가장이 되었던 언니가 자신의 학비를 대줬었다는 걸.
언니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이다.
그걸 무어라 할까. 선? 악?
'·· 통장 안 보여줄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후원금은 무슨.'
'미안.'
'다시는 그딴 구라 치지 마, 씨발. 그것도 모르고·· 나만 나쁜 년 됐잖아.'
해가 바뀌고 달력이 넘어갈수록 자매는 더욱더 깊어졌다.
'형부는·· 괜찮아?'
'늘 똑같지. 애 찾으러 간다고 난리 치는 거. 오늘 보니까 결혼반지도 뺐더라.'
'하아·· 그러니까 왜 숨겼어.'
'안 그러면 나랑 결혼해줄 리가 없잖아.'
'·· 애는 안 불쌍해?'
'첫 번째 애는 어쩔 수 없어. 다음 애를 기약해야지. 남편도 언젠간 이해할 거야.'
'언니··· 형부 사랑하는 거 맞지?'
'그럼.'
*
"다시 한 번 재고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던 페챠가 로자에게 말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단단함이 깃든 어조에, 로자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머리칼을 쥐어뜯듯 넘겼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합니다. 근래 보여주신 모습을 보면 정말 기억을 잃으신 것 같기도 하고요. 연기로 그런 눈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페챠의 말을 들으니 어렴풋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자신을 걱정하던 샤샤의 모습들.
그럼 아까는 왜 흔들린 건지, 제발 누구라도 알려줬으면 하는데.
"그리고·· 그 이름을 언급하신 건 너무하셨습니다. 도련님도 방법을 몰랐을 겁니다. 그걸 가르쳐준 게·· 그녀 잖아요."
"·····."
"지금 실수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디 올바른 방향으로··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로자는 눈을 부릅뜨며 페챠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페챠는 묵묵히 그 시선을 견뎠다. 도리어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으로 로자를 마주했다.
"이거 하나는 알아주십시오. 둘 중 어느 도련님이라도, 전 첫날 살아남았습니다."
결국, 거칠게 일렁이던 로자의 불꽃은 나무를 집어삼키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
길게 한숨을 내쉰 로자는 터덜터덜 걸어 집을 나왔다.
아무도 없어 황량하기만 한 복도 한가운데에 선 로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이 떴다.
00:01.
ㅡ그때 이후로 첫 통화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레퀴엠의 현 2인자, 올가 폰다. 조력자도, 뭣도 아닌 애매한 관계.
"목소리가 좋구나. 그때 네 보스랑 찾아와서 도와 달라고 빌던 때랑은 다르게. 역시 출세가 좋지? 폰다."
ㅡ언제 적 얘기를···.
"닥치고. 네가 말했었지. 샤샤가 기억을 잃었다고. 근데 내가 볼 땐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ㅡ흠·· 그럴 리가 없는데.
"··· 지랄하지 마. 이거, 그년도 알고 있냐?"
ㅡ·· 예의는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조용한 복도에 로자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예의? 언제고 지 보스 잡아먹을 생각밖에 없는 년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하는구만."
ㅡ·· 대물림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집어치워. 네 권력욕은 다 알고 있으니까. 이 상황도 다 네가 만든 거 아닌가? 일부러 샤샤를 건드려서 내가 찾아오게 하고. 영악한 조카는 그런 날 이용해서 재기한 뒤, 네 보스랑 상잔하는 시나리오. 좋은 그림이야."
ㅡ처음 그것들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제가 이 일을 일임받은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중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도 있긴 하지만·· 일단 사진 보냈습니다.
"뜬금없이 무슨··"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귀에서 뗀 로자는, 눈을 찌푸리면서도 액정을 가득 메운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기기 시작했다.
길게 묶인 포니테일의 여성과 데이트를 하는 사진. 보기만 해도 화사해지는 외모의 여자와 함께, 샤샤는 즐겁게 웃고 있었다.
비에 젖은 채 개를 품에 안고 또 다른 여학생과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도.
사진을 넘기는 로자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역시 얼굴값을 하는 건지, 주위에 꼬인 여자들도 한 가락 한다.
그래 이렇게 사는 조카를 바랬다···· ?
···그럴 리가.
로자는 눈을 크게 뜨며 사진 안의 얼굴을 담았다.
늘 짓던 싸늘한 미소가 아니다.
진실로 행복해서 웃는 듯한·· 미소.
분명 복수심과 온갖 분노가 차올랐을 터인데, 이런 표정을 지으며 살아갔다고?
"····처음부터 연기였을 가능성은?"
ㅡ글쎄요. 신분까지 세탁하며 도망쳤는데, 누가 자신을 몰래 지켜본다는 걸 예상이나 했을까요. 국장님이 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아, 이제 그렇게 부를 수도 없군요. 죄송합니다. 입에 익어서."
"··· 지금 날 도발해서 좋을 게 있나?"
ㅡ이제 이용 가치가 사라진 거 같아서요. 끝났잖아요. 국장님과 조카의 관계. 많이 공들였는데 아쉽습니다. 이제 그가 기억을 찾으면 국장님을 어떻게 볼까요. 기어코 상처를 헤집으셨네요.
····주변 정리부터 해야 하나.
"···· 많이 컸어 폰다. 그때 싸그리 쓸어버렸어야 했는데. 소중히 보살피던 짐승이 나라를 뒤집어 놓기 전에 말이야. 그리고, 샤샤는 기억을 잃지 않았어. 리초바를 말했을 때··"
ㅡ으음. 제가 생각하는 건 좀 다릅니다. 기억상실이란 게 뭐, 영원히 간다는 보장도 없고. 오히려 그 말로 인해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게 아닐까요?
"뭔 개····"
욕을 내뱉으려던 로자의 뇌리에 격렬한 전류가 흘렀다. 동공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펼쳐나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이, 맞지 않는 조각의 아귀를 맞추는 듯 맞물렸다.
그럼 정말로··· 본능에 따랐던 거라고?
로자는 즉시 전화를 끊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아까 있던 장소에 도달했을 때, 조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착잡한 듯 눈을 내리깐 채 있던 조카가 자신을 발견하자 물음을 뱉었다.
"··· 하실 말씀 남았나요?"
"샤샤. 아까 그 표정은·· 왜 지은 거야. 모르는 사람이라며."
샤샤의 입술 위엔 깨물어 피가 흐른 자국이 져 있었다. 로자는 눈이 질끈 감고 싶은 걸 참았다.
"···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는데 그냥 몸이 반응하네요. 믿기 힘드신 거 아는데·· 진짜로 그래요."
자신조차 모르겠다는 듯 괴롭게 눈을 찡그리는 샤샤를 보며.
"미안·· 미안하다. 정말 미안··"
"이모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다 제가 먼저 잘못한 건데."
사과하는 샤샤의 모습에 그때가 스쳐 지나갔다.
'미안, 미안해 언니. 내가 멍청해서··'
'네 잘못 아니다, 로자. 이것도 다 내 업보겠지. 나중에 샤샤나 좀 잘 봐줘.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그리고 나타샤한테 복수한답시고·· 괜한 짓거리 마라.'
'···· 얼마나 남았어?'
'몇 개월 정도 남았겠지. 그걸 마셨으니까. 그 안에 샤샤를 안전한 데로 옮겨야 돼.'
로자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혹여나 자신이 벌인 짓이, 다시금 샤샤를 진창으로 끌어들인다면.
나로 인해 잠깐의 달콤함조차 빼앗기고 꿈에서 깨어난다면···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로자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샤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괜찮다니까요. 이모. 저 봐요."
로자는,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망할.
기억을 잃은 모습이든 기억을 찾은 모습이든, 잔인한 건 똑같다.
*
사람 키만큼이나 높게 솟아있는 정체 모를 비석 앞으로, 한 여자가 천천히 다가섰다.
사뿐한 걸음을 뗄 때마다 허리 너머까지 내려온 회백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고고히 빛나던 호박색의 안광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꼬리를 물며 따라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오는 이 묘지를 조용히 만끽했다.
바닥에 깔린 꽃들에선 향긋한 풀 내음이 올라오고, 벌레 지저귀는 소리가 자장가 같은 이곳.
"나 왔어."
비석을 받치고 있는 단을 등지고 살포시 내려앉은 그녀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차가운 돌을 쓸었다.
"오늘 아빠 기일이라며. 부하가 알려줬어."
그녀는 허리춤에 찬 권총을 톡톡 건드리며 노래하듯 말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그녀는 암적응을 마친 눈으로, 비석에 쓰인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이것도 의미 없는 짓 아니야? 아빠 여기 없잖아."
이 크나큰 묘지 비석 아래에는 썩어가고 있는 관만이 잠들어 있었다.
그 안에서 푹 쉬고 있어야 할 망자는, 육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몇 살 때더라. 아빠가 나 구한다고 온 날."
자식을 되찾고자 권총 하나 들고 그곳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남자이면서 어찌 그리 용감할 수가 있었는지.
그 지옥 같던 곳을 보낸 장본인 중 하나가 찾아왔다는 게 의외였긴 했지만.
하지만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그는 옷이 찢긴 채, 여자들이 번갈아가며 배에 올라타는 신세가 되었다.
그 짐승 같던 행위가 마무리된 후, 그녀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은 죽고 없는 보스가 어렸던 그녀에게 총을 쥐여주며 건넨 말에.
작은 손 크기 탓에 흘러내리려는 총을 다잡아가며 그의 앞까지 다가갔다.
총알이 텅 빌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고, 나타샤는 그날부로 뭔가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살아갔다. 샤샤라는 이름의 소년을 보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