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송곳니는 자신을 잊지 않는다(2)
"·····"
다 쓴 메모를 들고 한참이나 훑어본 뒤,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각인했다.
앞으로는 내가 끌고 갈지언정, 누구에게 끌려가진 않겠다.
이 세계에서는 유부녀 킬러, 조조.
그, 아니. 그녀의 명대사를 내 식대로 바꿔 다짐하고 있자니 내가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역시 위인들은 말 한마디에도 헤아릴 수 없는 뜻이 있다.
비록 성별이 다 바뀌어버린 게 웃겨서 좀 깨긴 하지만.
나는 목을 뒤로 한 채 팔로 눈을 가리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웃음을 멈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종이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 커버를 올리고 물웅덩이 위에서 종이에 불을 붙였다.
"안전하게 살아야지."
혹시라도 누가 종이를 보고 의문을 품으면 곤란하다. 나는 가만히 선 채 손에 들린 종이가 서서히 타들어 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렇게 형체를 잃고 잿가루가 되어버린 종이를 변기에 넣고 내리고서야 나는 침대로 돌아왔다. 이불 속으로 몸을 넣고 뒤척거리는 와중에 언뜻 불안한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오늘 또다시 샤샤의 꿈을 꿔버린다면···내일 내가 정신을 되찾고자 할까. 이상해진 걸 못 느낄 수도 있어. 손의 상처도 이젠 써먹기 글렀는데··'
"아."
곰곰이 생각해보던 나는 좋은 묘수가 떠올랐다는 듯한 소리를 뱉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머니를 더듬으며 핸드폰과 담배가 고스란히 있다는 걸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
담벼락을 등진 채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초를 검지에 끼고, 스마트폰 액정을 토독토독 두들겼다.
한시라도 빨리 타투이스트를 찾아 문신을 새겨야겠단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예약 날짜가 되면 타투이스트가 전화도 해줄 테니, 정신이 바뀐 위급 상황이 오면 날 일깨워 줄 거고.
비록 좆만하게 몇 글자 새기는 거지만, 이왕 할 거 잘하는 사람한테 받고 싶다는 욕심에 연신 페이지를 넘겼다.
'이 사람은 퀄이 별로고.'
'얘는···'
매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마음에 드는 타투이스트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연초를 입에 물고 후읍 연기를 내뿜던 와중, 눈에 띄는 작업물이 보인다.
홀린 듯 페이지에 들어가 몇몇 그림들과 작업자를 확인한 뒤에, 결론을 내렸다. 모든 요건을 고려해도 이 사람이 제일이라고.
'근데 인기가 많아 보이는데··내일 되면 예약 못 하는 거 아닌가? 일단 빨리 전화해보자.'
조급한 마음에 지금이 밤이라는 생각도 미처 하지 못하고 톡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블로그 보고 작업 문의하려고 연락 드렸습니다.]
곧 톡을 읽었다는 표시인 (1)이 사라지자 화색을 짓다가 날카로운 답신이 돌아오자 표정을 굳혔다.
[제 블로그 보고 오셨으면 분명히 그것도 봤을 텐데요. 서로 예의는 지키자고.]
확인해보니 정말로 문단 맨 끝에 [늦은 밤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서로 예의는 지킵시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역시 급해서 좋을 게 없다. 인제 와서 또 다른 사람 찾기도 귀찮고, 그냥 저자세로 나가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이 작업자님 아니면 안 되겠다, 해서 조급한 마음에 결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면 전화로 사과드려도 될까요?]
그러나 몇 분이나 기다려도 답신이 오지 않자 씁쓸히 담배를 물던 와중, 전화가 걸려왔다.
*
"아, 뭔 전화를 하재 또."
몸에 문신이 가득한 그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블로그에도 큼지막하게 밤엔 연락하지 말라고 써 놨는데 그걸 못 본단 말인가.
오늘 낮에도 수많은 사람을 응대할 만큼 인기 타투이스트인 그녀는, 답장 따위 하지 않아도 수입엔 지장조차 가지 않았기에 마저 그리던 도안이나 그리려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펜을 탁ㅡ내려놓았다.
"언 년인진 모르겠지만, 아니 예의는 지켜야 할 거 아냐, 예의는."
불만이 들어찬 얼굴로 폰을 집어 든 그녀는 이 무례한 의뢰자한테 톡을 보냈다.
[전화번호 주세요.]
[감사합니다. 010-XXXX-XXXX]
"감사는 무슨. 어차피 작업 안 해줄 건데."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고 상대방이 여보세요를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말할게요. 솔직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요? 전화까지 하자고 하는 건 무슨 심보입니까. 마음이 상해서 작업은 못 해 드릴 것 같네요."
ㅡ그 부분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어?
전화 너머로 들리는 낮게 깔린 음색과 자신의 조막만 한 가슴을 울리는 묵직함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띄웠다.
···남자였다. 심지어 목소리도 존나 잘생겨서, 덩달아 얼굴까지 궁금해진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진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흠. 뭐 아셨다면 다음부턴 주의해주세요."
ㅡ네, 감사합니다. 그럼 혹시 작업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계속해서 파고드는 묵직한 목소리에 아주 살짝 음흉한 생각이 샘솟는다.
"그러면···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미성년자는 안 받는데, 혹시 민증 찍어서 보내주실 수 있으세요? 얼굴까지 나오게."
ㅡ음···민증이 아직 안 나왔는데 어쩌죠? 제가 러시아에서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녀는 저 황당한 변명을 듣자 작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럼 예약은 못 잡아드려요. 솔직히 믿기 힘든 부분도 있고요. 한국어를 너무 잘하시잖아요."
ㅡ그러면···얼굴 사진 찍어 보내드려도 되나요?
"···진짜요?"
ㅡ네. 전화 끊고 톡으로 사진 보내드릴게요.
"아, 잠시만요. 그럼 메모지에 의뢰자, 라고 써서 같이 보내주세요. 죄송하지만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일 수도 있으니까 인증 겸해서. 막상 예약 잡았는데 손님이 미성년자라 펑크나면 저도 손해가 크거든요.
ㅡ이해합니다. 어려울 거 없죠.
뚝.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뜻밖의 수확에 기대감으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기다렸다.
"진짜 러시아 사람인가 보네. 아, 왔다. 자, 어떻게 생겼는지 볼까요···"
흥얼거리며 사진을 확인한 그녀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대충 양손으로 멀리서 찍은 듯한 셀카에도 굴욕 없는 미모. 만사가 귀찮은 것 같은 얼굴로 물고 있는 메모지.
"···뒤지네. 입에 물고 있는 거 시발···뭐 유혹하는 거야?"
····아주 여자 미치라고 고사를 지내는 구만.
얼굴에 이어 떡 벌어진 어깨와 남성의 상징인 목젖. 목에 그려진 여우도 묘하게····색정적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바라보던 그녀가 조심히 전화를 건다.
ㅡ확인하셨나요?
"물, 물론이죠. 혼혈이셨나 보네요. 키도 크신가··?"
ㅡ네. 한 180쯤 돼요. 아무튼, 그럼 작업 해주시는 건가요?
"당··당연하죠. 근데 제가 작업이 좀 많이 밀려서·· 이번 주 일요일 어떠세요?"
ㅡ죄송한데···더 빠르게는 혹시 안 될까요?
수작이 막혔다. 쉬는 날 이 손님만 받고 나가서 같이 커피라도 한잔 하려 했는데.
입맛을 다신 그녀는 스케줄을 되짚어본 뒤 말했다.
"이번 주 목요일은 될 것 같네요."
ㅡ좋네요. 저녁 7시에 가능할까요?
7시라···사실 예약한 손님이 있긴 하지만.
"그럼요. 나머지는 톡으로 안내해드릴게요."
가끔 힐링도 해야지.
그녀는 전화를 끊고 그 시간을 차지했던 여자 손님에게 보낼 사과 메세지를 작성한 뒤 내일 낮으로 예약 발송을 보냈다.
*
"엽떡 좋아 하냐고···뭐야 이런 건 왜 물어봐?"
누가 보아도 타투이스트의 사심이 잔뜩 들어간 톡에 헛웃음을 짓긴 했으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대화를 마치고, 슬슬 자기 위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기도했다. 딱 목요일까지만 엿 같은 꿈만 꾸지 않게 해 달라고.
아니 이왕이면 평생 꾸지 않게 해주면 좋겠다.
"···내일부터 운동도 열심히 나가야겠네. 개새끼들 다 팰라면 몸도 미리 달궈 놔야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나타샤는 말없이 유리잔에 술을 따랐다.
주황색 액체가 넘실거리며 투명한 면을 따라 흐르더니 책상을 적신다.
"폰다님 오셨습니다."
"응. 잘했어."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속삭이듯 말하자, 나타샤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여자가 나가고 얼마 뒤, 금테 안경을 쓴 여자가 딱딱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열심히 설명을 시작하는 폰다를, 나타샤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토해내는 폰다.
왜 이렇게 안쓰럽고 웃기지.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몰랐네."
폰다의 말을 끊은 나타샤는 잠시 고민하는 척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수고했어. 오늘도 고마웠어, 폰다."
"그럼 나가기에 앞서··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타샤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안에 경호원들···왜 다 내보내셨습니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서."
순간, 폰다의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폰다는 오늘도 헛된 기대를 품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저택에 홀로 남게 된 나타샤는 다시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미 잔은 가득 차 더는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도.
"네 몸에 새긴 것들 전부 다, 내가 해준 건데. 앞으로도 내가 해주기로 했는데. 약속했잖아, 누나한테만 받기로."
그렇게 술 한 병에 담긴 액체를 비워낸 나타샤가 서랍으로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오직 나만 얻을 수 있는 권리였어, 샤샤. 그래도 이해할게."
언뜻 보면 슬퍼 보이기도 하는 나타샤가 서랍을 열었다. 익숙한 손길로 안에서 대검을 찾았다.
눈앞으로 칼을 꺼내 든 나타샤는 차가운 날을 어루만졌다. 손길은 애완동물을 보듬어주듯이 부드러웠다.
그녀조차도 알 수 없는 행위를 무표정으로 반복한다.
스르륵.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타샤가 일어나자 매끈한 허리 옆에 매달린 권총이 달랑거렸다.
"근데 이해 못 하겠어. 기억 잃은 건 미치도록 좋아. 좋은데··누나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애원하듯 내뱉은 말처럼 손에 쥔 칼날을 힘없이 밑으로 늘어뜨리고, 남은 한 손은 허리춤으로 가져간다.
"많이 고민했어. 내 한국 이름도. 너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도."
나타샤는 칼을 능숙히 휘리릭 돌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널 사랑해주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말을 끝맺은 그녀가 권총을 뽑아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쏘아낸 총알이 문을 뚫고 지나간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그녀가 우아하게 발을 내디디며 문을 열었다.
권총을 집어넣고 바닥에 널브러져 피 거품을 게워내는 여자를 무심히 집어 올렸다.
죽어가는 눈이 자신을 마주했다.
나타샤는 마지막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검으로 그녀의 목을 베었다. 피 분수가 터지며 볼에 다다닥 튀었다.
생을 마친 그녀의 등 뒤로 퓨퓩거리며 뭔가가 박히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것에 살짝 미소 지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던 나타샤가 검을 든 손가락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훔치며 시를 읊듯이 말했다.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아."
구슬픈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옆을 돌아보았다.
어두운 복도를 밝히는 건 유리창 너머 달빛뿐이 없기에.
빛을 취한 그녀는 이제 됐다는 듯 지그시 앞의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진득한 살의가 그녀를 덮쳤지만, 그녀는 오직 한 곳만 바라보았다.
"나에게 세상은 오직 너야. 샤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