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1화 〉무제 (61/94)



〈 61화 〉무제

히터를 틀지 않아도 차 안에 맴도는 훈풍.
주차장을 나가면 에어컨을 틀어야 할 정도의 날씨.

그런 여름의 한 구절은 그녀에겐 겨울바람만큼이나 시리고, 차디찼던 마음을 녹인다.
바닥이 꽁꽁 얼고 서릿발이 휘날리는 마음의 겨울.

이시아는 눈을 감았다.
가슴 안.
썩지 않게 보관해왔던 친구의 시체를 꺼내며 추억 또한 꺼냈다.

정확한 기일이라도 알면 좋으련만.
그러질 못하니 근래 날마다 친구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 시기가 끝나는 날짜라도 대략 안다는 것이 다행일까.

그렇게 있던 시아는 눈매 끝에 예쁘게 자리한 눈물점을 매만지는 것으로 추모를 끝맺고자 했다. 친구의 농담이 귓가에 선연히 들려오자 시아가 웃음을 지었다.

“기생 누이 같이 생겨먹어서, 남자 하난 잘 꼬시겠다고. 근데 어쩌지.”

어릴 적부터.
가녀린 고양이 상 덕분에, 여자 평균 신장을 훌쩍 넘어섬에도 불구하고 얕보이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말투도 최대한 딱딱하게 뱉었고, 누구보다 상여자처럼 거칠게 행동했더니.
더는 얕보이지 않았다.

그건 해가 갈수록 시아만의 심볼이 되었고, 곧 시아의 성격 자체로도 변했다.
성유진의 휘하에 있을 때도 더욱 장점으로 작용한 성격이지만···

“···남자들이 무서워하는  문제지. 당최 이유를 모르겠군. 여자가 든든하면 좋아해야 마땅한 거 아닌가. 아무튼, 이제 알겠나 임소연? 나는 아직 남자 손도  잡아봤···”

시아는 문득 떠오른 기억에 말을 잠시 멈췄다가, 낯선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허리를 맞댄 적은 있네.”

뜬금없이 이뤄진 그 남자애와의 스파링에서.

류세화.

도통 겉만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가워 보이나, 사실 속은 정반대인 아이.
···모순  자체다.
껍데기만 보고 속아 넘어간 시아는, 고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차 클랙션을 이마로 짓눌렀다.

빠아아앙-

듣기 싫은 소리가 차창을 넘어 지하 주차장 전체를 울렸다.
그저 임소연과 함께한, 한 줌 만의 추억이 남아있던 클럽을 지키고자.
성유진에게 그런 아이를 유흥거리로 던져 주며 포주 행세를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왜 자신은···그 사실에 경멸과 환멸을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그녀가 올 때를 대비한 많은 대책을 강구 했으나, 그중 세화를 클럽에서 내보내는 것은 없었다.

성유진에게 밉보여 클럽을 놓게 되면 안 되니까, 라는 한심한 이유로.
전에 한 번 그리했다가 차디찬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사정했다.
심지어 그녀가 오기 전, 남자를 해고한 것임에도.

그때 알았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친구를 그렇게 만든 러시아의 흉수에게 복수조차 할 수 없고, 그저 홀로 남아 빛바랜 추억만을 끌어안고 지키는 것 외엔····하등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너는 이런 나를 보며 어떻게 생각할까.”

이미 떠난 친구에게 하는 말인지, 세화에게 하는 말인지.
그 깊이를  수 없는,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려던 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정신을 일깨웠다.

“이미···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다만, 처음 몇 번은 어떻게든 막아보마. 그다음은····.”

시아는 잇던 말을 멈췄다.

그다음은?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할 거지?

뇌리를 짓누르는 물음들이 끔찍하게 무겁다.
자연스레 관자놀이를 누르던 시아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

잘 알지도.
얼마 보지도 않은 남자애 하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단계까지 온 게 신기해서.

고개를 의아하게 기울여 보인 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웃었다.

“미안하다 친구야. 자꾸 흔들리네. 모든 게 그만두고 싶어져.”

다시 한  깊게 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지한 시아가 차 문을 열었다.
매끈히 뻗은 긴 다리를 먼저 바닥에 내디딘 시아는 가방을 챙긴 뒤, 목적지로 향했다.

스트레인 이종격투기 학원.

***


학원 건물.

시아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누군가 손을 들이밀었다. 놀란 시아가 열림 버튼을 누르자 반가운 얼굴이 곡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아이고, 큰일 날 뻔했네. 고맙다 시아야.”

험악한 덩치, 험악한 얼굴의 관장님이 시아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구릿한 담배 냄새가 코끝에 내려앉는  느끼며, 시아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별말씀을요.”

“그래, 그래. 오늘도 운동하러 온 거냐?”

“예.”

“참 옛날부터 꾸준해서 보기 좋아. 요즘 애들은 잠깐 왔다가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금방 찍 싸고 가는데. 그걸 또 달래야 하니 원. 남자랑 다를  없다니까.”

한탄하던 관장님이 손가락으로 구멍을 만들어 보이며 검지를 넣었다 뺐다를 반복한다.
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친구가 음담패설 하던 모습이 떠올라 미소를 머금었다.
이래서 관장님이 정겹다. 친구와 성격이 판박이니까.

“그래도 기분이 괜찮아 보이십니다.”

“어, 그 남자애 또 왔거든.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걔만 쳐다보는 년들도 있긴 한데···맞다. 시아야. 너 사귀는 남자 없냐?”

뜬금포로 던져진 질문에 시아가 잠시 당황하자, 관장님이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순진한 척은. 임마, 그 몸매랑 그 얼굴로?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해. 내가 너였으면 젊을 적에····”

“남자 사귈 시간도 없습니다.”

“농담  번 해본 거다. 네가 남자랑 담쌓은 건  알지.”

“······”

“표정 펴 임마. 침울해 하기는. 그 뭐냐, 저번에 너랑 스파링하면서  섞었던 남자애있지?  진짜 진국이더라. 보통 남자애 같지가 않아.”

“····설마 세화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그래,  잘생긴 회원님. 요즘 말론 예쁘장하다 해야 하나? 무튼, 이름도 아는 거 보니까···관심이 좀 있었던 모양이네."

“예? 아뇨 그게 아니라····”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먼저 내린 관장님의 얼굴에 한층 더 음흉한 웃음이 짙어졌다.

오늘따라 관장님이 유독 농담이 많다고 생각한 시아는 뒤따라 내리며 물었다.

“그런데 세화에 대해선 왜 물어보신 겁니까?”

“네가 하도 목석처럼 사는  불쌍해서 그런다. 시아야, 모름지기 여자라면···자기가 점 찍은 남자는 지켜야 하는 법이다.”

관장님이 학원 문을 열다 말고 시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뺏기지 말고 잡아 임마. 저런 남자 보기 진~짜 드물다. 원래 운동하는 남자가···알지? 밤에 여자를 아주 그냥···”

“아니 세화랑은 그런 사이가···!”

“문신 때문에 좀 날티 나서 그러냐? 괜찮아, 임마. 요즘 경험 없는 애들이 어딨다고. 잘생기고 착하기만 하면 됐지. 들어가서 얼른 말 걸어. 옆에 애한테 뺏기기 전에.”

“·····?”

듣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려 관장님의 입을 막으려던 시아가 의뭉스런 표정을 지었다.

‘우연히 세화가 운동하러 온 건 알겠는데, 옆에 애는 누구지? 같이 올 사람이 있나? 미나는 그만뒀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시아는 관장님을 따라 학원에 들어섰다.


그리고선 학원 안을 천천히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입구 근처에서 샌드백을 치면서도 어딘가를 흘끔거리는 여자가 보인다.

 시선을 따라가 보자, 유독 튀는 외모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깨 근처까지 내려온 은빛 단발의 소녀와···동양인보다도 더욱 진한 칠흑 머리칼을 갈기처럼 휘날리는 장신의 남자아이.

속으로 어, 어? 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살금살금 그들에게 다가간 시아.

파아앙-!

“이게 제대로 치는 거야. 아까 너처럼 치면 손목 다쳐. 이건 나중에 자세히 가르쳐줄게. 다음, 가드 올려봐.”

군더더기 없는 자세를 선보이며 샌드백을 쳐 보인 세화가 미나의 등 뒤로 돌아갔다.
분명 수상쩍게 다가가고 있는 자신이 보였을 위치였는데도, 세화는 오직 미나를 지도 하는 데만 집중했다.

잠깐 봤지만, 진지하게 가라앉은 세화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연이어 미나의 어깨를 짚으며 말하는 폼이, 사실 프로 선수가 아니었을까 의심될 정도.

“힘 빼고, 자세는 이렇게···”

가르치는 것조차 정확히 들어맞는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세화가 딱 달라붙어 있는 미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여인네들이 수두룩했다.

아무리 미나가 자기 친구라지만, 여자 몸에 저렇게까지 닿는 것도 세화는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호감이라도 생겨 마음을 열지 않은 게 아니고서야···설마 그런 단계까지 갔나. 썸 같은 그런.

흠.

순수하고도 풋풋함이 피어오르는 상상에 마음이 풀어지려던 와중, 잊고 있던 의문이 일었다.

풀어진 안면근육을 다시 굳혀 보인 시아가 무게를 잡으며 걸어갔다.

그리고 세화에게 말을 걸기 전, 그가 먼저 등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어떻게 알았지? 말도 없이 뒤에서 다가갔는데.”

“인기척이 느껴져서요. 방금 봤기도 하고. 근데···표정이 바뀌셨네요? 아까는 기분 좋아 보이시더니만.”

···들켰다. 못 본 거 아니었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찔린 시아가 변명을 하려는 찰나, 미나도 화들짝 놀라며 시아에게 말했다.

“언니?”

“어, 그래. 잘 있었지? 근데 왜···세화가  가르쳐주고 있냐. 그만두기로 한 거 아니었어?”

“저 몰래 여기 와서 혼자 샌드백 치고 있더라구요. 그것도  치면 모를까, 위험하게.”

언뜻 보면 차가운 세화의 말투였지만, 가늘게 좁힌 눈매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짐작한 시아의 입에서 장난스러운 미소가 새어 나왔다.

소중한 동생인 미나가, 딱 봐도 사랑에 미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기에.
시아는 미나에게 어깨동무를 걸치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제대로 먹힌  같은데.”

미나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어깨동무를  시아는 세화에게도 장난스레 말했다.

“잘 됐으면 좋겠네. 보기 좋아.”

“잘 되긴요. 쓸 만해지려면 멀었죠.”

기대와는 달리 엉뚱한 대답이 돌아오자 오기가 생긴 시아는 다시 말을 꺼내려 했으나, 곧 세화가 알면서도 반격한 것임을 깨닫자 당했다는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녕 자신이 바뀌지 않는다면····저 좋아 보이는 풍경도 머지않아 깨질 것이다.
세화랑 미나  다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한 원망이 전부····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니까.

그렇다면 역시····

“팀장님.”

“·····?”

세화의 한 마디가 시아의 심상을 비집고 들어와 깨트렸다. 시아가 왜 그러냐는  쳐다보자 세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스파링 한 번만 할까요? 저번엔 제대로 마무리를 못 지었으니까.”

“····이미 네가 이겼는데 굳이?”

“운으로 얻어걸린 승리는 찝찝해서요. 미나한테도 견식 좀 시켜줄 겸 해서.”

운이라. 확실히 자신이 그···익숙치 않은 스킨쉽에 한눈팔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랐겠지.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필요해요. 팀장님이.”


*


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헤드기어가 필요하냐는 세화의 말에 고개를 내저어 거절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위였다.
밑에서는 미나가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고.

····왜 멍청하게 넘어갔을까. 마법에 홀린 것만 같았다.
자신이 필요하다는 말이 시아를 순식간에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런 뜻이 아닌  알고 있는데····

“이번엔 제대로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라. 마운트로 가기도 전에 끝낼 테니.”

분명 그렇게 호기롭게 말했건만, 세화는 역시 강했다.
그의 긴 리치 때문에 단도를 들고 창에 맞서는 느낌이었다.

무시하고 파고들어 공격하려 해도, 절묘한 공격들이 위험하게 가드를 두들겼다.
또 잽싼 몸놀림으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링이 아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나 남자치고 정말 대단한 일.
그러니 불쑥, 안도감이 고개를 치켜든다.

이토록 강하다면 그 위기도  이겨내지 않을까 하는···하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일신의 무력과는 상관이 없는 별개의 문제니까.

돌연, 시아의 몸이 충격으로 휘청거렸다.

가드로 올리고 있는 팔에 세화의 발차기가 작렬한 것이다.
그때와 똑같은 양상으로 흘러간 경기에, 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결국 그때를 반복했다.

돌진으로 세화를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는 것.
진지하게 임하기로 마음먹은 시아였기에, 한눈팔지 않고 세화의 허리를 감싼 양다리를 조였다.

“봐요. 팀장님이 제대로 하니까 발리네.”

 차이는 어쩔 수 없다는  힘없는 말과 상반되게, 세화는 시아의 밑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비틀었다.

그걸 누르기 위해 시아가 세화를 감싼 허벅지를 더욱 조였다.

그러니 하체와 하체가 비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결국 판세가 굳혀질 때쯤, 세화가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다 생각한 시아는 기특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잘했어. 이제 항복해라. 여기서 네가  수 있는 게 없····”

“····잠깐만요. 제가 졌으니까 빨리 내려오실래요?”

어딘가 당혹스러워 보이는 세화의 말이 끝나고.
시아는 밑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얼굴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을 미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동자에서 읽었다.
자신을 향한 얕은 배신감과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동공.

미나가 좋아하는 세화 위에 올라타 얼굴을 붉히고 있는 자신····망할.

이럴  알았다. 그냥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짧은 후회를 마친 시아가 급히 일어나려던 그때, 미나가 각오한 일이라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버텼다.

·····왜?

그걸 본 시아의 마음 한구석에서, 미묘한 배덕감이 미세하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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