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무제
“·····”
이시아는 불과 몇 초 전 보았던 미나, 그리고 류세화를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
가슴 안쪽으로부터 시작된 찌릿한 감각이 뇌수까지 뻗친다.
가슴에 진 어두운 응달 깊숙이 박아놓았던, 근심이란 것을 태워버리고도 남을 만큼 강대한 감각.
‘그, 그만둬야···’
이시아는 쇠사슬에 속박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은, 쇠사슬을 제 목에 걸며 칭칭 감는 자신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잘못됐다.
하지만 지금, 이시아의 뇌리를 가득 채운 건 누군가의 절망과 세화의 은은한 향이었다.
이 시기.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사방을 찔러대는 어두운 감정이 아니다.
그래, 축복이다.
하지만 악마가 내린 축복이다.
사과를 먹으라고 속삭이려는 뱀이 서서히 발치에 다가온다. 물리면 돌이킬 수 없다. 미나와의 관계도, 세화에게 품은 동정과 연민도····다 공허해지겠지.
‘·····’
흐물거렸던 이시아의 동공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미간에서 내려온 땀방울이 우연히도 눈물점에 도달하기 전, 이시아가 허벅지를 슬쩍 들려는 찰나.
짝ㅡ!
“읏!?”
여자와는 달리 확연히 큰 류세화의 손바닥이 이시아의 다리를 철썩 때렸다. 반사적으로 이상한 신음을 냈다는 걸 자각한 이시아는 류세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내려오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못 들으신 것 같아서.”
이시아는 미안한 얼굴로 말하는 류세화를 보며 허둥지둥 내려왔다.
몇 번을 말했다고?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 당황한 이시아는 그의 손을 보며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느새 글러브도 벗은 채 스트랩만 감긴 손.
바로 밑에 있는 사람이 경기 중에 글러브를 벗고 있었는데도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미, 미안하다. 못 들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명백한 이시아의 실책이다. 사실 스파링을 빙자한 성추행을 저질렀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사실 뺨 싸다귀를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사과하며 고개를 숙인 이시아는 힐끔 시선을 올려 류세화를 보았다.
역시···무표정. 평소에도 냉랭해 보이는 무표정을 잘 짓곤 했지만, 지금 이시아에겐 다르게 와 닿았다.
예전, 스스럼없이 여자를 대하듯 남자를 대하던 이시아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실수는 그것과 궤를 달리하니까.
정작 류세화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드디어 가라앉았네.’
이시아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스파링을 하던 중.
뜬금없이 자신의 물건이 화가 날 기세였기에 급히 이시아를 밀어내려 했다.
‘쌓인 건지 뭔지···아니 갑자기 서고 지랄이야.’
설상가상으로 이시아가 도통 내려오질 않으니 그때부터 필사적으로 하반신의 감각을 차단하려 애를 썼다.
이곳이 별세계라 망정이지 자칫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비록 상대가 좋았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삶에 각인된 본능은, 자연스레 미안함을 불러일으킨다.
나, 류세화는 여기서 나고 자란 가짜 남자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제가 더 죄송하죠.”
여기 남자라면 할 리가 없는 말을 내뱉는다.
그 이후, 안 그런 척하며 류세화의 눈치를 보던 이시아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 물었다.
“네가 왜 미안하지?”
“그렇게 말씀하시면····딱히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없고. 굳이 하나 꼽자면 음, 팀장님 다리 때린 거?”
그게 왜?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시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렇다고 몸을 확 뒤집자니····팀장님 다치실까 걱정도 됐고요.”
이시아는 류세화의 무표정에서 한 점의 거짓도 찾을 수 없었다.
이 남자의 사고가 낯설었다. 관장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일반적인 남자와 달리 진국이라 했던가.
그렇다 해도 이건····너무 한데.
분명 그 상황에서 기분이 나빴어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위험할까 봐 일부러 손으로 쳐 주었다라.
‘도대체 뭐냐···너.’
만약 이시아의 남동생이나 오빠, 남자친구였으면, 밤낮으로 그 멍청하기 짝이 없는 착함과 무방비함을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류세화는 남이니까, 여기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가도 될 것이다.
“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사과하지 말고····화도 좀 내고 그래라. 내가···다음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리마.”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빛나고 있는 금빛 한 쌍이, 아름다워서.
“다음이요?”
“아, 음····”
“그러면 저야 좋죠. 마침 실력도 키워야 했는데 잘됐네. 앞으로도 부탁드릴게요.”
류세화가 기분 좋게 눈매를 휘자 금빛 달이 반으로 줄어든다.
그것에 이시아는, 왠지 모르게 아쉬움을 느꼈다. 이내 그걸 느꼈던 것이 무색하게도 곧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얀 눈매 아래 절반이 가려진 달을.
그 주인인 류세화가 목을 옆으로 당기며 말했다.
“오늘 스파링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내려가죠.”
류세화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철창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시아는 제자리에 서서 그를 눈에 담았다. 담지 않으려 해도 담긴다.
널찍한 어깨와 등. 짧은 반바지 사이로 꽃의 술처럼 예쁘게 갈라진 다리 근육들.
순간 뇌리에 다시금 윙윙 맴도는 관장님의 말.
‘운동하는 남자가 죽인다니까?’
·····무슨.
손을 휙휙 내저은 이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만 좀 하고 머리에서 나가···”
“성격 급하시네요. 지금 열었어요.”
목소리를 싸늘히 죽인 류세화가 반문해오자 이시아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것도 잠시, 손을 떼며 변명했다.
“그,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그냥 잡생각이 좀···”
“농담 한 번 해본 거예요. 사실 다 들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거둔 류세화가 귀를 톡톡 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에 이시아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그때, 그녀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척 봐도 침울해 보이는 미나를 달래주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는 류세화를 보며.
“미안. 이번 경기는 좀 그랬네. 다음엔 제대로 보여줄게.”
누가 보아도 이시아의 지금 모습은, 츄르를 눈앞에서 뺏기고 망연자실한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가녀린 이시아의 몸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떨렸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몰랐다. 단지, 누군가 등을 쿡쿡 찌르며 떠미는 것 같은 감각이 피어오를 뿐.
“·····”
아, 설마 그런 걸까. 자신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류세화를 자신의 악연에 끌어들인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생기는 건 당연하다.
이시아는 애써 표정을 되돌린 뒤 둘에게로 다가갔다.
***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이시아의 제안에 류세화는 미나를 쳐다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서슬 어린 안색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다음부턴 운동 강도를 좀 낮춰야 하나 싶었다.
빨리 집을 보내야겠단 걱정에, 묵묵히 거절하는 미나를 조용히 타일러서 설득했다.
그 과정이 끝나자 이시아는 어딘가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그들을 인도했고.
결국, 이시아를 따라나선 둘은 지하 주차장에 홀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외제차와 마주했다.
“팀장님 차에요? 엄청 좋네요.”
“흠, 흠. 그래? 안에 타면 더 좋을 거다.”
그 말에 헛기침한 이시아가 키를 꺼내며 버튼을 눌렀다.
차의 눈이 우렁찬 빛을 내뿜었다.
류세화는 입을 작게 벌리며 감탄했고, 시아의 뿌듯함은 짙어져 갔다.
다만. 미나만은 순수히 감탄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러는 언니에 대한 작은 원망과 초라함이 푸르게 빛나던 눈동자를 바닥에 처박는다.
그때, 누군가 잡아끄는 손길에 미나가 고개를 들었다.
“안 갈 거야?”
“으, 응? 아, 미안 갈게. 근데····너 조수석 타려고?”
“둘 다 뒷좌석 타면 실례야.”
“아····그렇지.”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 류세화가····살짝 얄미웠으나 미나는 그를 따라 조용히 차에 탔다.
사실 세화가 잘못한 건 없지. 그냥 자신이 속 좁게 구는 것일 뿐이니까.
도대체 언니가 뭐 했다고 이러는 걸까.
그냥 운동하다 보면 몸 좀 닿을 수도 있고····차도 나중에 좋은 거로 사서 세화 태워주면 되는 거지.
작은 주먹을 몰래 움켜쥔 미나는 차가 출발하자 뒷좌석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지하 주차장을 나오니 어둑해진 밤이었다. 미나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창밖을 구경했다.
높이 솟은 빌딩들이 환하게 빛나는 걸 보고 있자니 서정적인 감정이 차오른다.
“더우면 에어컨 틀어줄까?”
“음···괜찮다고? 알았다. 불편하면 말하고····”
계속해서 이어진 이시아의 말에 미나의 신경이 살짝 곤두섰다. 그럴 리 없지만, 정말 그럴 리 없지만 왜 언니가 세화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이시아는 분명 저런 사람이 아니다. 무뚝뚝하고 엉뚱한 사람의 표본인데.
갑자기 저렇게 배려심 깊은 사람으로 변모할 이유가···없는데.
“대단하시네요 팀장님. 저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이런 차도 타시고요.”
“····나이 차이가 왜 안 나.”
순간적으로 뱉어버린 미나의 말에 주변이 얼어붙었다. 미나도 아차 했지만,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법.
그렇게 만들어진 정적을 깬 건 세화의 웃음 섞인 말이었다.
“그래,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하지. 팀장님 23살이셨나요?”
“····차가 왜 이리 막히지.”
말을 돌리는 이시아를 보며 미나는 또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왜, 왜 찔리는 사람처럼 저러지?
문득 익숙한 기억이 떠오른다.
류세화의 친한 누나라는 그 하율이라는 언니와의 만남이.
·····비록 비겁한 술수였지만. 그때도 자신이 류세화의 나이를 들먹였을 때.
그 언니의 반응이 지금 시아 언니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그 알싸한 분위기가 말이다.
‘····언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죠?’
미나는 가슴을 졸이며 조심스레 미끼를 던졌다.
“언니, 저 세화랑 같이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왜?”
“아, 그냥 집도 가깝고····얘기 좀 하다 들어가고 싶어서요.”
“·····상관없지. 당사자가 괜찮다고 한다면.”
경계심이 깃든 목소리는 불안했지만, 쿨하게 수락하는 태도에 살짝 마음이 놓인다. 아주 살짝.
“감사해요, 언니.”
“세화는 괜찮아?”
“예.”
망설임 없는 류세화의 허락에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내린 둘은, 차 안에 있는 이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미나도 찝찝함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이시아가 말했다.
“그럼 내일 체육관에서 보지.”
“무슨····말이에요 언니?”
“아. 세화가 부탁한 거다. 앞으로 스파링 상대 좀 되어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기꺼이···응하기로 했지.”
언뜻 즐거워 보이는 이시아의 얼굴. 결국, 미나는 참지 못하고 창문 가까이에 다가가 속삭였다.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한데····”
“스파링 할 때 너무 가까이 붙지 말라고?”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둘이 사귀나?”
“····아니요.”
이시아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걸 본 미나의 조그마한 머리에, 오직 한 가지 생각이 날아와 꽂혔다.
연인도 아니면서 유난 떨지 말라는 듯한 비웃음?
미나는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이시아의 태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이래서 고양이 관상은 믿지 말라 한 건가.
·····장난, 장난이겠지? 언니가 이럴 리가 없···는···데.
안절부절못하는 미나의 모습이, 이시아는 즐거웠다.
아까부터 자신을 그리 경계해대는데 모를 리가. 그래서 일부러 연기를 좀 했더니 반응이 아주 뜨겁다.
그게 너무 재밌었다. 모든 걱정이 사라진 빈 공간에 쾌감만이 자리한 그 느낌이.
한편으론 자기를 믿지 못한 미나가 괘씸하기도 하고. 아무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를 뺏을 리가 있나.
자신이 류세화에게 품은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 자신했기에 이시아는 장난을 지속했다.
“노력해보지. 근데 세화도 따라줄까? 너도 봐서 알겠지만, 일반적으론 제압하기 힘들어. 너무 거칠어서 말이야.”
말을 잇던 이시아는 너무 어두워진 미나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너무 심하게 한 것 같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너무 과하게 연기를 했던 탓인가.
이제 다 장난이라고 말해야 할듯하다. 그리고 응원한다고 말을····
“맞아요. 키스할 때도 거칠더라구요.”
돌연 서큐버스같이 웃으며 이어진 미나의 말에, 이시아의 안에서 무언가가 깨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