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무제
내가 빙의한 육체의 장점 한 가지를 꼽는다면 청력이 좋다는 것이다.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이 귓속말하는 것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청력.
그 탓에, 때때로 곤란해지고는 했다.
“맞아요. 키스할 때도 거칠더라구요.”
바로 지금처럼.
멀리서 들려오던 대화가 끊겼다. 털털거리는 차의 엔진음을 들으며,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런데도 아무 사이가 아니다?”
“그건·····”
얼핏 들으면 맹수가 으르렁거리듯이 묻는 이시아와, 언제 승리자의 미소를 띄웠냐는 듯 급격하게 수그러드는 미나의 얼굴.
이상함을 느낀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 명은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는데, 한 명은 이해가 가질 않네.
“흐음. 왜인지 알겠군.”
“·····왜요?”
“네가 한 말이 다 거짓이니까. 먼저 장난 친 건 사과하마. 너도 발끈해서 아무렇게나 말한 거지?”
“아! 장난이셨어요? 다행이다.”
“·····그래. 근데 대답은?”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운전석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미나가 내빼려는 순간, 무언가에 잡힌 듯 미나가 우뚝 멈췄다.
“그래서. 키스했냐고 묻잖아.”
“·····그게 왜 궁금한데요, 언니는.”
····더는 못 듣겠다.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아?”
나는 즉시 다가가 미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미안해. 금방 끝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돼?”
“어. 안돼. 너 지금 몸 상태 많이 안 좋아 보여서, 빨리 집 보내야 할 거 같거든. 나랑 얘기할 것도 남아 있다며.”
“·····그으래?”
순식간에 화사해지는 미나의 얼굴을 보며, 나는 미나가 했던 것처럼 운전석 창문에 얼굴을 댔다. 방금까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이시아가 표정을 거두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팀장님도 이제 들어가실 거죠?”
“음·····그래야지. 근데 나도 몸이 좀 안 좋은 듯하다. 아까 스파링하다가 팔을 다쳤는지···”
“정말이세요?”
생각해보니 이시아의 가드를 뚫으려고 발차기를 너무 세게 차긴 했다. 그 외에도 참 여러 군데 두들겼고.
‘····잘못 맞으신 건가?’
부상당했을 때의 그 개 같은 기분은 나도 잘 안다.
급격히 밀려 오는 미안함과 걱정, 그리고 훌륭한 스파링 상대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이시아의 팔을 잡았다.
“여기 누르면 아프세요?”
수년간의 선수 생활로 다져진 야매 진단법. 나는 이시아의 팔과 어깨를 짚어가며 물었다.
“어, 어?”
“····세화야 그만해도 돼. 언니가 항상 자기 몸 튼튼하다고 자랑했거든. 쇠파이프로 맞았는데 멀쩡하다고 그랬었나? 제 말 맞죠, 언니?”
기가 찬 듯 하ㅡ짧게 숨을 뱉은 미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 그랬으면 내가····”
“으, 음. 이제 그만 해도 될 거 같다.”
“····진짜 괜찮으세요, 팀장님? 병원 안 가보셔도····”
“···당연하지. 농담 한 번 한 거다. 여자가 겨우 그 정도로 다치면 여자가 아니지. 그럼 내일 보자. 아, 미나 너도 꼭 와라. 내일은 제대로 보여줄게. 빨리 성장하려면 많이 봐둬야지. 동의하지, 세화야? 우리는····그런 거 잘 알잖아.”
그렇다고 말해줘-라는 듯 창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날 바라보는 이시아.
진짜 고양이 같네. 예쁜 고양이.
반사적으로 미소가 지어지는 걸 막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시아가 만족스러운 기색을 띄웠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몰아 떠났다.
빛을 발하던 차량의 라이트가 사라지자 주변이 어둠에 휩싸였다.
그렇게 남겨진 우리 둘 사이에.
덜덜거리던 엔진음이 그리워질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미나였다.
“····담배 하나만 줄 수 있어?”
"안 돼. 아, 저번에 나한테 담배 준 건 돈으로 줄게."
"왜·····너도 피잖아. 너는 되고 나는 왜 안돼?"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미나를 훑었다.
허벅지에 걸쳤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짧았던 교복 치마는, 딱 달라붙는 레깅스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 위는 교복 안에 넣어 입던 박시한 티.
그걸 보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누그러진다.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다음에는 이런 말 안 할게.”
돌이켜보니, 아까 전까지 시아와 얘기하며 날을 세우던 목소리가 예기를 잃고 나풀거린다.
그 나약한 목소리에 실린 간절함에 설득된 나는, 미나를 담벼락으로 데려갔다.
얼마 전 이모가 페챠랑 유리를 이끌고 미친 듯이 무언가를 찾던 담벼락.
그곳에서 결국 연초 하나를 미나에게 건네주었다.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곧이어 미나는 살포시 연초를 입에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큰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왜? 담배만 달라며.”
그렇게 말하며 연초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인 뒤 라이터는 잽싸게 집어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인한테 담배를 부탁하고 말이야. 곧이곧대로 들어줄 수는 없지.
“·····”
미나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푸른 달빛 같은 눈동자가 작은 원망으로 물든다.
삐진 듯한 미나가 입에서 연초를 빼려는 찰나였다.
“장난이야. 다시 물어.”
슬쩍 웃으며 물고 있는 연초 끝으로 미나가 문 연초에 맞댔다. 미나의 연초에도 불이 붙으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듯 미나의 눈이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됐다고 생각해 몸을 빼려는 순간, 휘청거리는 미나를 붙잡았다.
“괜찮아?”
“으, 응. 오랜만에 피웠더니····이거 진짜 세다.”
“····그거 때문이었어?”
오늘 운동 때문에 무리한 줄 알았네. 철렁였던 가슴을 속으로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 해. 얘기할 거 있다며.”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인 미나가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시아 언니랑 스파링 할 거야?”
“어.”
“기분 안 나빠? 여자랑 그렇게 몸 맞대는 거····”
“딱히? 운동 중에 그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거부감 같은 건 없어.”
원래 세계라면 내가 아니라 그쪽을 걱정해야 할 판인데.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하자, 미나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어떤 여자가 갑자기 너한테 손대면 어떨 거 같아? 그때는 싫지?"
“예를 들어 어떻게?”
“····누가 너를 껴안는다거나, 손을 잡는다던가.”
자신도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미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미나야. 너 지금 내가 팀장님이랑 몸 좀 닿았다고 그러는 거 같은데, 난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그걸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는 거지. 딱 그 정도일 뿐이야.”
“····그럼 나한테 키스했던 건, 너한테는 뭐였어?”
"······"
"겨우 그걸로 유난 떠는 게 바보 같은 것도 알아. 그냥, 그냥 기약 없는 기다림이 너무 힘들어서 그래····그것도 아무렇지 않은 행동의 일부였던 거야?"
그렇게 들렸구나. 내 상식대로 뱉어버린 말이 미나에게는 다르게 와 닿은 듯했다.
아마 여기 기준으로 치면····너무나도 무방비한 남자라고 내 입으로 말해버린 셈.
그런 가치관의 남자를 좋아하니 괴로웠겠지.
분명 내가 자기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전은 없고 다른 여자랑 허물없이 지내니까.
"·····"
원래도 가녀린 미나의 몸이, 창백한 달빛을 받아 더욱 가냘파 보인다.
그런 미나를 보며 조용히 할 말을 가다듬었다. 그때의 내가 온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나를 잃고 싶지 않아 했던 행동임은 변함이 없었기에.
그렇다고 좋아해서나, 사랑해서였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오직 나만을 위해 했던 이기적인 행위였다. 문득 웃겼다. 이미 그따위 짓을 저질러 놓고선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꼴이라.
애써 웃으려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오직 이 상황에도 쓸데없이 침착하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에서 나갔다.
“네가 나 때문에 화나서 떠날까 무서웠어. 그래서 놓치기 싫어 그랬던 거야. 보다시피 내가···성격이 좀 뒤틀렸거든. 너한테 상처가 됐다면 미안해. 혹시 이제 내가 싫으면····”
스륵.
가녀린 여체가 쓰러지듯 내게 안겼다.
작지만 단단한 팔이 내 등허리를 휘감았다.
떠나려는 사람을 못 가게 붙드는 것처럼 단단히 옥죄인다.
“····미안해····. 몰아붙여서 미안해. 네가 너무 가지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어.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는데, 다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만 보면 미칠 것 같아.”
그저 미나는 애원할 뿐이다. 작디작은 사랑이라도 괜찮다고.
들썩이는 미나의 어깨. 지금 그녀는···두려워하고 있다.
나를 향한 감정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머리가 새하얘진다.
“널 보며 아빠를 떠올린 것도, 전부····”
“괜찮아, 괜찮아. 더는 얘기 안 해도 돼.”
급기야 미나의 트라우마로 보이는 것까지 터져 나오려 하자,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나를 달랬다.
손가락에 걸린 부드러운 은발을 잠깐 응시하던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살았던 세계까지 이해해 달라고 하진 않을게. 너한텐 당연하지 않은 일이 내게는 당연한 일이니까. 근데 나는····이미 거기에 물들어서 변할 수가 없어. 그래서····걱정돼. 앞으로도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 할까 봐.”
“····괜찮아.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힘내 볼게. 네가 마음을 열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가만히 기다릴게.”
내게 안겨 들썩이던 어깨의 움직임이 잦아든다.
순간, 지금 내 안을 채운 것이 샤샤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그냥 이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너를····"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예쁜 목소리로 속삭이는 미나의 말에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메아리치듯 나도-라는 공허한 울림을 돌려주며, 그 안에 소유하고자 싶은 마음만 가득 채웠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내 주변에 시한폭탄처럼 둘러싼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전에 말이다.
하지만 차라리, 그편이 미나에겐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고마워.”
이딴 대답밖에 못 돌려줄 바엔.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
그 시각.
제 앞에 앉아 있는 강아지와 대화하며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따로 뜯은 강아지 용 육포를 꼼꼼히 찢어 먹여주는 손길이 왠지 모르게 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