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무제
*
타닥-타닥-틱-
말랑한 볼에 불그스름한 기운을 띄운 신하율이 키보드 자판을 두드렸다.
깨끗한 책상과 별개로, 방바닥 노면에 너저분하게 뒹굴고 있는 빈 맥주캔들.
가뜩이나 술이 약한 신하율이 꽤 취해 있다는 방증이었다.
“으····”
손을 놀리던 신하율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찡그렸다.
냉수라도 떠오자 하는 생각에 바닥을 딛고 일어나려 했지만, 덜컥 제동이 걸렸다.
새근새근.
돌핀 팬츠 아래로 훤히 드러난 신하율의 허벅지를 베게 삼아 곤히 자는 마루 때문에.
····너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내가 올려줬나?
마루가 올려달라고 했나?
갖은 물음과는 달리 마루의 검댕이 같은 콧잔등을 살살 쓸어내리는 신하율의 손가락.
자는 와중에도 코를 씰룩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미소와 함께 단편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누나 그거 알아요? 강아지를 만지면 옥시토신이 나온대요.’
자신을 누나라고 부를 남자는 단 한 명뿐이다.
그때 세화에게 옥시토신이 뭐냐고 물으니 행복 호르몬이라 했지.
“·····진짜 약 주고 병 주는 게 어딨어···"
이렇게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마루처럼.
멀리서 지켜만 보아도 난 괜찮았는데.
왜 하필 그 장면을 봐 버린 건지.
취기를 빌려 스리슬쩍 서러움을 토해내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타닥-타닥-
신하율은 한껏 울 것만 같은 얼굴로 다시금 키보드를 두드렸다.
제목:제 이야기 들어주실 분 있나요····?
내용:친동생은 아닌데 진짜 소중히 아끼는 남동생이 있어요. 저한테 막 누나라고 부르면서 잘 웃고 스스럼없이 저 혼자 사는 집에 찾아올 정도로 친해요.
엄청 예쁘고 되게 착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라 아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여자 두 명이랑 자기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는 걸 봤어요····.
얘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그런 부분에 대해 넌지시 충고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타닥.
경쾌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타자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멈췄다.
이제 글을 올리기만 하면 된다.
“하아···”
····올리지 말까. 이런 걸 함부로 올려도 되나.
마우스를 잡은 손에 망설임이 들어갔다.
신하율은 취기에 심장이 마구 뛰는 걸 느끼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심장 소리는커녕 손에 다 잡히지도 않는 가슴만 느껴진다.
둥그런 모양으로 한참 위에 붕 떠 있는 손에, 이상하리만치 울컥한 신하율은.
“·····그냥 잠깐만 올리는 거야. 그런 다음에 지우자.”
글을 올린 후 몇 분쯤 지나자 하나둘씩 댓글이 달렸다.
사실, 문제 해결은 뒷전이고 한풀이에 불과한 글이었건만.
관심을 이렇게 많이 준다고?
댓글이 궁금해진 신하율은 순수한 얼굴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댓글1:대줄 듯 말 듯하면서 약 올리다가 앞에서 ntr을 찍어버리는 남고딩·····ㅈㄴ 꼴린다.
ㄴ이 글 쓴 년이 지금 동생한테 전화 걸었는데 이상한 소리 날 생각하니까 더 꼴리네 아ㅋㅋ
"·····!?"
·····이를 앙다문 신하율은 첫 번째로 댓글을 삭제했다.
댓글2:‘스스럼없이 집에 찾아올 정도로 친함.’=널 여자로 안 봄. ‘아껴주고 싶었다.’ ‘미성년자.’=잘 키워서 성인 됐을 때 잡아먹겠다고 다짐함. 근데 나 같아도 누나 거리면서 실실 웃음 흘리고 다니던 남자애가, 그랬다고 생각하면 슬프겠다····가 아니라 개꼴 ㄹㅇㅋㅋ 존나 불쌍하네.
ㄴ서로 마음을 열어가는 시기에 순애보 찍다가 금태양년 두 명 난입. 생전 처음 맛보는 조임에 넘어가 버린 동생은 돌아오지 않고·····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바라만 보던 어느 날. 집에 비디오 하나가 배달되는데····
“아····니···라고.”
신하율이 고개를 숙였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며 분노를 표출했다.
“니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이 사이트에 글을 올린 것부터가 잘못되었던 걸까.
그냥 순전히 답글이 빨리 달리니까 좋다고 생각했던 것뿐인데····
자신은 어찌 조롱당하든 상관없지만, 류세화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유희 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솟구치는 미안함에 마치 목욕을 앞둔 마루의 표정이 되어버린 신하율이었다.
추욱 쳐진 눈매로 글을 삭제하려고 마우스를 올린 순간, 댓글 하나가 더 달렸다.
댓글:그래서 니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걱정돼서 충고해주고 싶다는 건 너도 개소리인 거 알지? 글에 쓸데없는 사족이 많이 붙은 거 보니까, 너도 감정 있는 거 같은데····안 그랬으면 이런 글도 안 썼겠지. 술 먹고 쓴 거지?
ㄴ····맞아요.
ㄴ맞네. 글만 봐도 딱 너 견적 나오거든. 미성년자라 차마 대놓고 좋아하진 못하겠고. 그 와중에 다른 여자랑 그러고 있는 거 보니까 답답해 미칠 것 같고. 너 호구 같다는 소리 많이 듣지? 호구는 아니더라도 답답하거나 너무 착하다고.
ㄴ····아주 조금요. 1년에 한···번?
ㄴㅋㅋㅋㅋㅋ대답도 예상했다. 걔가 아무것도 모르고 네 집 가고 누나라 부르고 그랬겠냐? 너도 애매하니까 괴롭고 그러는 거지. 딱 알려 줄게. 어장인지 뭔지 확인하고 싶으면 질투심 유발해봐. 추하게 질척이는 것보단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살 애태우는 게 직빵이다. 많이 써먹어봐서 암. 아, 준비물 없으면 다 소용없으니까 마음 접어라.
ㄴ준비물이요?
ㄴ얼굴or몸매. 그럼 ㅂㅂ
“·····”
신하율은 대화가 끝나자 조용히 글을 삭제시켰다.
그러나 삭제되지 않고 고스란히 뇌리에 남아있는 한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질투심.
그건 컴퓨터를 끌 때까지도, 씻을 때도, 마루를 끌어안고 잠이 들기 전까지도.
백지처럼 변한 신하율의 머릿속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
내 일상은 수요일이 되어도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학교에 갔다가, 미나를 만나서, 체육관에 가고.
그래 모든 게 순조로웠지.
“세화야, 이렇게 치는 거 맞아?”
“전보다 많이 나아졌네. 어깨에 힘 좀 더 빼고.”
샌드백을 치며 묻는 미나의 이마에 구슬땀이 흐르고 있었다.
참 열심히 하네·····라는 생각이 든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그 감상이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세화, 어디 아픈 데라도 있나?”
“아닙니다. 팀장님.”
어느새 다가온 이시아가 살짝 내 어깨를 짚는다.
“그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도 좋아.”
“괜찮습니다. 그냥 혼자 생각할 거리가 조금 있어서 그래요.”
손사래를 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타투이스트에게 보낸 카톡이, 아직도 읽히지 않았다.
하루를 마다하고 연락해오더니, 오늘 아침부터 아무 연락도 없다.
막상 내일이 작업 일인데.
“·····뭐,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일이 좀 있어서요. 중고나라 같은····”
물 흐르듯 거짓말을 선보이며 다시 생각에 잠기려던 참이었다.
“·····제 입술에 뭐 묻었습니까?”
“아, 아니다. 입술에 뭐라도 발랐나 해서····되게 빨갛네.”
무언가 불편한 듯 눈을 찡그리며 내 입술을 노려보던 이시아가 허둥지둥거렸다.
“딱히 바른 건 없습니다.”
“·····설마 피부도?”
“못 믿겠으면 만져보셔도 됩니다.”
나를 여기 남자로 취급하는 것에 반발심이 차올라, 내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이게 다, 여기 사내새끼들이 비비크림 같은 걸 발라대는 탓이다.
번화가만 나가봐도 허연 달걀 대가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눈화장 같은 여자의 영역까진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
“·····그럼 한 번 만져보마.”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희미하게 떨리는 이시아의 손가락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나 반쯤 닿기도 전에, 미나가 이시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웃고 있는 입과 대조되게 싸늘한 미나의 눈이 인상적이었다.
“언니. 운동 안 하세요?”
이사아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미나에게서 손을 뺐다.
“스파링 하러 왔지. 세화랑 말이야.”
“죄송합니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다음에 해도 될까요?”
이 상태로 스파링을 했다가는, 맞기만 하다가 끝날 것이다.
작업을 하루 앞두고 잠수를 타버린 타투이스트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
“진짜? 아니, 아니 어디 아파?”
웃음꽃이 만개한 얼굴로 우려를 내뱉는 미나.
“····아프면 쉬어야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하는 이시아에게 다시 한 번 죄송하다 말했다.
그리고 체육관을 나와 미나와 함께 이시아와 갈라지려는 순간이었다.
“어디 가지?”
“집으로 가야죠. 팀장님도 들어가세요.”
“내 차 놔두고 헛걸음하지 마라. 둘 다 따라와.”
무뚝뚝하게 말한 이시아가 멋지게 뒤로 돌며 손을 까딱였다.
굴곡진 등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코트 자락처럼 휘날렸다.
“·····짜증 나네, 진짜. 차 아니면 자랑할 게 없어?”
“미나야.”
“·····응.”
미나의 중얼거림에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이내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
“알았어····미안해.”
“왜 또 기죽고 그래. 어깨 펴.”
작게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리자, 울상을 짓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내 말 하나에도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미나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분명 처음엔 이러지 않았는데.
대체 내가 뭘 했기에 얘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키스 한 번이랑 포옹 몇 번 말고는 한 게 없는데.
그 후, 이시아의 차에 타서 거의 집에 다 와 갈 때쯤에도.
원래 있던 걱정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해진 미나에 대한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겠어. 폭주하지 않기만을 바래야지.
나한테만 의존하지 않게 노력도 기울여보고.
사랑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
그렇게 다짐하며 옆에서 열심히 운전하고 있는 이시아에게 말했다.
“팀장님. 편의점 근처에서 잠깐만 세워주실래요?”
“왜?”
“계속 팀장님 차 얻어타는 게 미안해서, 커피라도 사드리고 싶어서요.”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데····그러고 싶다면야····고맙게 받지.”
이시아의 대답이 그녀의 입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