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무제
딸랑ㅡ!
편의점 문이 열리며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다.
들려오는 인사가 없자 카운터를 바라본 남자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가워하는 기색을 띄우다 고개를 기울였다.
신하율이 알아차릴 수도, 볼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괴로움에 틈만 나면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니까.
이 시간대 근무자가 펑크를 낸 탓에, 자고 있을 시간에 나와 있는 것도 한몫했다.
때문에.
금빛 눈이 자신을 향해도, 남자가 시선을 거두며 조용히 매장을 거닐어도.
그가 계산이요-라고 말할 때까진 신하율이 생각에서 깨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눈이 그렇게 퀭해요. 요즘 많이 힘들어요?”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신하율을 생각에서 확 끌어내었다.
“세화····?”
*
띡ㅡ
신하율은 류세화가 가져온 커피 세 개를 스캐너로 찍었다.
그다음은 얼마입니다ㅡ를 말해 줘야 하는데.
“·····”
그러면 지금 느끼고 있는 거리감이, 더 강해질 것 같기에 말하질 못했다.
그리고 너랑 쟤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 꿈 깨라고 누군가 비꼬는 것 같아서.
····얼굴 보고 싶은데.
류세화를 보면 떠오르는 낯 뜨겁고도 가슴이 에이는 상상에, 고개를 들기가 두려웠다.
입을 꾹 닫은 신하율 대신에 류세화가 말했다.
“아직도 화났어요?”
“응?”
“저랑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없고 해서요. 그래서 아직도 화났나, 하고.”
묘하게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말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샘솟는다.
만지려 손을 뻗어도 몸을 내주지 않으며 고고히 있던 맹수가, 내게 머리를 비벼오는 느낌이라.
그러나 속 편한 생각관 달리, 파블로프의 개처럼 신하율의 몸이 재빠르게 반응한다.
“아니! 아니! 내가 너한테 화 날 일이 뭐가 있겠어····.”
말을 뱉고 잠시 후, 유감스럽게도 공원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그건 류세화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겠지.
“저 클럽에서 일하는 거, 누나가 싫어했잖아요. 이젠 괜찮아요?”
“그건····함부로 말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주제넘었지?”
“그런 말 하지 마요. 저희 사이 멀어 보이니까.”
손을 내저은 류세화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어····그, 그래.”
네가 꺼낸 우리 ‘사이’라는 말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이리 가슴이 간질거리는지.
신하율의 얼굴에 웃음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싸늘히 식었던 심장은 다시 뛰고, 활력이란 것이 몸 곳곳으로 퍼지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눈가에 웃음을 띄곤 시선을 내려 매대를 본 신하율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커피를 세 개나 샀네.
세화가 원래 커피를 이렇게 좋아했던가?
매대에 놓인 커피들을 유심히 쳐다보는 신하율.
그런 신하율을 물끄러미 보던 류세화가 살짝 웃으며 커피 하나를 집어 들었다.
“먹어요. 누나 때문에 일부러 하나 더 산 거예요.”
“····나 때문에?”
단숨에 무장해제가 되어버린 신하율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 커피를 받아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으, 음····세화야. 손 잠깐만 펴줄 수 있어?”
“·····아, 죄송해요.”
멍하니 신하율의 얼굴에 시선을 두고 있던 류세화가 커피를 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커피를 받아든 신하율은 그게 보물이라도 된 양, 소중히 감싸 쥐며 배시시 웃었다.
“남자가 나한테 뭐 사주는 건 처음이네····고마워. 잘 먹을게.”
“····그래요? 기쁘네.”
“응?”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신하율이 되물었으나, 류세화는 당황함을 감추려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머쓱해진 손가락으로 눈두덩이까지 꾹 누른 탓에 그걸 본 신하율이 울상을 짓는 건 덤이었다.
“흉터 어떡해·····연고라도 잘 바르지.”
류세화의 왼 손가락에는 여전히 그날의 상처가 기록되어 있었다.
상처뿐만 아니라 그와의 두 번째 만남도, 그날의 풍경까지.
남자가 아니라 ‘세화’의 손가락에 저런 흉터가 남았다는 것에 가슴이 아팠다.
익숙하다는 듯 굴었던 행동도 여자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그런 게 있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낫긴 했으니까, 어차피 곧 지워질 거예요.”
····또 저런다.
저리 대수롭지 않게 말할 때마다 왜 그랬던 건지,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그래도 다행이었죠. 그 전날에 누나가 번호 안 줬으면····”
“어, 어? 그, 그건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준 거야···”
“굳이 변명 안 해도 괜찮아요. 알고 있었어요.”
뭘 안 다는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뭘 생각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신하율은 문득 류세화의 문신들이 다행이라고 느꼈다.
다가가던 여자들도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을 보면 한 번은 멈칫할 테니까.
노는 남자라고 생각하거나, 뒷세계에 종사하는 여자친구를 둔 것 같은 모양새.
실은 저렇게도 순수한 아이인데.
아니면 질 나쁜 여자들은 더 쉽게 보고 달려들라나.
그럼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미 꼬였을지도 모른다.
또다시 눈앞에서, 여자들과 걸어가던 류세화가 아른거린다.
하지만 신하율은 이겨내 보기로 결심했다.
“혹시 여자친구 있어, 세화야?”
“아뇨.”
없다고? 그럼 그때 그 여자들은····누구야?
라는 물음을 삼킨 신하율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왜? 너 정도면 엄청····꼬일 텐데.”
“글쎄요.”
류세화가 씁쓸히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게 익숙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듯한 웃음.
그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대체 왜.
신하율의 작은 주먹이 꽉 쥐어지며 부르르 떨렸다.
가지런한 손톱이 손바닥을 꾸욱 누르며 아픔을 주었지만, 시린 가슴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직도 생생한 세화의 방 풍경.
손에서 넘쳐흐른 피로 흥건해진 바닥. 널브러진 옷가지와 깨진 유리 조각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했을까.
몰랐어도, 더 잘해야 했는데. 무지는 죄라는 말이 이렇게 와 닿을 줄이야.
방향을 상실한 자책이 마음속 깊이, 더 깊이 파고들며 입술을 깨무는 와중, 부드러운 감촉이 일었다.
“입술 깨물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요. 무슨 일 생겼죠?”
“아, 아이야.”
신하율의 붉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류세화의 손가락.
덕분에 그녀의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혀, 혀 닿으면 어쩌려고?’
류세화가 함부로 자신의 입술에 손을 댔다는 것보단, 그런 걱정이 앞섰다.
사실 천년만년 이러고 있어도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딸랑-!
“어, 어허오헤요!”
“····왜 늦나 했더니.”
갑작스레 들어온 손님의 목소리에 류세화가 손가락을 빼버렸다.
그제야 시뻘겋게 익어가던 감정을 진정시킨 신하율은 손님을 마주했다.
어여쁘지만, 고양이같이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손님이 신하율을 향해 경계심을 뿜어냈다. 하악질이라도 하는 듯했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있긴 한데 여기서 파는 건 아니군요.”
이시아의 언짢은 시선이 류세화를 향하자 신하율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불똥이 튀었다.
“혹시 누구····”
“아, 팀장님.”
“커피 사 온다 해놓고····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는 사이? 팀장님?
신하율의 눈에 불똥이 사그라드는 대신 의아함이 깃들었다.
대화를 듣고 있자니 손님은 류세화의 상사인 듯했다.
이윽고 대화를 끝낸 이시아가 팔짱을 낀 채 신하율에게 물었다.
“세화 친한 누나셨군요. 근데 세화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던데····”
“아, 제가 자꾸 입술을 깨물어서····”
이시아가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포개며 묻자, 그녀에게서 뿜어나온 남다른 기세에 주눅이 든 신하율이 찔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말이 없던 이시아는 매대 위의 커피에 시선을 주었다.
“다 계산됐으면 가져가겠습니다.”
매대로 성큼 다가온 이시아가 신하율에 가깝게 놓인 커피까지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
신하율은 재빠른 몸짓으로 커피를 집어 들며 몸을 돌렸다.
“····이건 제 거에요.”
"·····?"
“제가 사준 거 맞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세요, 팀장님.”
“····그럼 미나 것까지 다 산 거군. 알겠다.”
이시아의 목소리에서 섭섭함이 내비쳤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신하율은 알 수 없는 통쾌함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내 류세화를 배웅하려 밖으로 나온 순간,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또다시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만 가볼게요.”
흠집이라도 내면 인생 종 칠 것 같은 외제차에 류세화가 몸을 실었다. 신하율에게 손을 흔들며.
어쩐지 팀장이라는 여자에게서 부티가 흘러나오더라니.
이상한 말투를 빼면 뭐 하나 부족한 점도 없는, 완벽한 여자.
상사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하 직원도 태워주나.
누가 봐도 속이 빤히 보이는 의도였다. 그것도 아주 새까만.
“·····”
곧 출발하려는 차를 보며 신하율의 안에서 조그마한 복수심이 피어올랐다.
“·····저거 불법 주차인데.”
확, 신고해버리고 싶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란 걸 느낀 신하율은 카운터로 돌아와 힘없이 걸터앉았다.
이겨내 보자고 의지를 불태우던 게 허무했다.
또한, 류세화에 대한 감정이, 친한 동생을 대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깨닫고.
기회조차 희미해진 걸 알았을 때,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으니까.
“나한테 잘 해주지 말지. 왜 자꾸 희망 품게 만들고····”
신하율은 실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아플 바엔 류세화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다만, 이거 하나만 알고 나서.
어쩌면 당연한 것.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그럼에도, 미련을 놓지 못한 것.
“····너한테 난 뭐였을까.”
신하율이 눈을 감았다.
눈을 질끈 거리자 긴 속눈썹이 위태로이 떨렸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슬며시 눈을 뜬 신하율은 앞에 놓인 커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질투심 유발····같은 게 통할까.”
물론 넌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럴 게 분명하지만.
신하율은 두 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
신하율:무슨 요일에 출근해? 지나갈 일 있으면 인사하려고.
류세화:금토일이요.
달리는 차 안.
나는 별생각 없이 신하율의 문자에 답한 뒤, 운전하는 이시아를 바라봤다.
“입술은 왜 자꾸 깨무세요, 팀장님.”
“습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