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유서(1)
“팀장님. 제가 계속 깨물지 말라고 옆에서 알려드리는데 멈출 수 있지 않아요? 습관이라면서요.”
“·····”
“그러다 입술에 피 납니다.”
편의점에서 출발할 때부터 이어진 이시아의 ‘습관’은, 차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져 갔다. 신하율에게 했던 것처럼 팀장님 입술을 누를 수도 없고.
답답함에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
뭐지. 지금쯤 도착했어야 하는데.
편의점에서 내 집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물론 걷는 것과 굽이진 도로를 차로 이동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만, ‘거의 다 와 간다’라는 느낌을 받기엔 이상하단 얘기.
계기판을 확인하려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려던 차에, 이시아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무시하고 속도를 확인하니 속에서 볼멘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럴 거면 차를 왜 탈까, 하는 불만.
팀장님 운전 실력이면 이렇게 느리게 갈 리가 없는데, 하는 의아함에 옆쪽을 곁눈질하니.
불만인 듯 가늘게 뜬 눈매, 작은 입술을 깨작거리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내가 사준 커피까지 무심하게 톡톡 두드리는 이시아가 눈에 들어왔다.
아·····설마.
남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경고등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이게 왜 이 세계에서 울리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혹시 기분 안 좋으세요?”
“·····음.”
이시아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애매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나를 흘깃 보는 것이 뭔가 알아주길 바라는 듯했다.
일면식도 없는 여자라면 어쩌라고ㅡ하면서 무시했을 텐데.
하필이면 내 상사가 저러네.
눈치가 젬병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나는 골몰히 생각했다. 어떤 단추부터 잘못 꿰였을까····.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답을 찾았다.
이시아가 매만지고 있는 커피 캔에서.
설마 저런 거로 삐졌을까? 살짝 어안이 벙벙했지만, 한 편으론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이시아에게 말을 붙였다.
“혹시 녹차 같은 거 좋아하세요?”
“·····차는 왜?”
“생각해보니까 커피로 퉁 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팀장님한테 차 한잔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실례일까 해서요.”
순간 이시아의 고개가 확 돌아가 내 쪽을 향했다.
“·····어디서? 지금 연 찻집이 있나? 아니, 내가 찾아보지.”
“그런 거창한 게 아니고, 그냥 제집에 있는 거로 타드릴 생각이었는데·····이건 싫으실까요?”
‘습관’이란 말은 거짓이었는지, 이시아의 붉은 입술을 괴롭히던 이가 쏙하고 자취를 감췄다.
그리곤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이시아를 보며 안도했다.
내 제안이 마음에 든 것 같아서. 설마 이시아 성격에 남자 집 간다고 좋아할 리는 없으니까.
비록 타투이스트와의 문제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만.
혼자 끙끙 앓으면서 핸드폰을 붙잡고 있어 본들, 어차피 그쪽에서 연락을 안 받으면 말짱 도루묵.
‘그럼 어쩔 수 없지.’
새 작업자를 구하는 수밖에.
***
집 근처에서 차를 세운 후.
미나와 이시아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온 나는 문을 열기 전 이시아에게 말했다.
“집이 좀 더러울 수 있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아. 어차피 남자 집에 오래 있지는 않을 테니까.”
살짝 긴장한 듯한 이시아의 목소리가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아까처럼 뻣뻣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는 누가 봐도 기분이 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다.
하기야 차 태워줘서 고맙다고 커피 사주는데, 남들이랑 똑같이 하나씩 나눠 주면 성의를 의심받을 수도 있겠지.
굳이 차를 세우는 수고스러운 일까지 해줬는데, 돌아온 결과가 평등한 보상이라면.
사람마다 다르지만, 당연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이시아에게만 커피를 주기도 뭐했고····.
미리 사놓고 다음 만남 때 주는 게 베스트였는데.
마음만 앞서서 멍청하게 행동한 게 잘못이지.
짧은 반성을 마치고 도어락 버튼을 누르고 문을 활짝 열었다.
이시아는 여느 때와 같이 당당한 걸음을 선보이며 집에 들어섰다.
슬픈 토끼처럼 힘없이 귀를 쫑긋거리는 미나랑은 정반대로.
“왜 그렇게 서 있어? 안 들어가?”
문고리를 잡은 자세 그대로 미나에게 물었다.
“나, 나도 들어가도 돼?”
“어. 그러려고 따라온 거 아니야?”
“·····맞긴 한 데, 진짜 괜찮아? 혹시 내가 너 방해하는 건 아니지?”
내심 기대했던 게 막상 현실이 되니 겁이라도 난 건지.
최대한 자제하려는 듯 미나가 표정을 갈무리해보지만, 이미 얼굴에 띄워진 그늘은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억지로 웃는 건 왜 이렇게 안쓰러운지.
나는 은근슬쩍 들어오라고 보채는 이시아에게 양해를 구하며 문을 닫았다.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마음껏 집구경을 해도 된다 말하니 군말 없이 들어가더라.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갖게 된 우리 둘.
나는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미나의 눈을 등대 삼아, 할 말을 골랐다.
“많이 힘들어?”
“·····아니야. 버틸 수 있어. 너 귀찮게 안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차라리 안아달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문드러진 마음을 억지로 하나하나 붙이며 웃어 보일 바엔 그게 더 나았을 텐데.
나를 이런 충동에 빠지게 할수록 너만 힘들 텐데.
“·····아.”
내 손이 미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작고 갸름한 턱선, 오똑하고 작은 코, 입을 맞추면 녹아버릴 듯한 부드러운 볼.
장님이라도 미나가 어떤 외모를 지녔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이목구비.
“이런 네가·····나를 왜 좋아할까. 왜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몸을 던질까. 그것도 나를 위해서.”
어느새 볼에 머물고 있던 내 손이 미나의 머리를 빗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답이 없네.”
“·····읏.”
위태롭게 떨리는 미나의 속눈썹이, 질끈 감은 눈을 매만지던 내 손가락을 간질인다.
“너도 모르겠지?”
그러다, 손을 간질이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연이어 고요한 숲처럼 잔잔한 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랑 있으면 이상해. 자꾸 의지하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데 지켜지고 싶어. 오히려 내가 세화 너한테 묻고 싶어.”
미나의 말에 눈을 가리던 손을 거뒀다. 가림막이 사라진 자리에 청염(靑炎)처럼 타오르는 두 쌍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너는 왜 나를·····이렇게 만들까. 넌 알고 있어?”
지금까지 보여줬던 약한 모습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미나는 동공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세화야. 맹수는 사람을 먹으면 다시는 잊지 못한대. 그 맛을.”
“그럼 네가 그 맹수야?”
왠지 굴욕적인 느낌이 드는 비유에 웃음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미나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목을 감쌌다.
“내가 너한테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나를 잊지 않았으면 해. 다른 사람을 맛볼 때도, 내 생각이 들게끔.”
“·····.”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나자, 목을 감싸 쥔 손에서 꿀꺽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암적응을 끝마친 망막에, 미나가 배시시 웃는 모습이 새겨진다.
“내 욕심일까?”
“·····토끼라고 생각했는데.”
불여우였네.
***
“세화 네가 원래 입술이 빨개서 다행이다.”
“그것도 있고. 네 틴트가 잘 지워진 덕도 있고.”
나는 후레쉬를 켜 입술에 남은 미나의 흔적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본 다음 문을 열었다.
안에서 후다닥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미나가 홀가분한 움직임으로 먼저 들어갔다.
“언니! 뭐 하고 있었어요?”
확연히 밝아진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따라 들어가니, 서랍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이시아가 보였다.
“어디 앉아라도 계시지····”
“·····지, 지금 앉으려고. 여기 앉으면 되나?”
이시아가 멋쩍은 움직임으로 식탁을 앉으려던 순간, 뒤에서 사진 한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어쩐지 뭘 숨기고 있는 거 같더라니.
“·····일부러 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빠져나와 있길래···.”
말없이 다가간 나는 무심히 사진을 집어 올렸다.
어릴 적 샤샤의 가족사진.
구겨진 부분이 조금도 없는 걸 보니, 이시아가 소중히 다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 없어요. 사진 하나 보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저도 잊고 살았었는데요 뭘.”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서랍에 도로 넣으려는 찰나, 이시아가 몸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자, 사색이 된 이시아가 말했다.
“그····조금만 더 보고 싶어서.”
“아.”
귀여우신 면이 있네.
아이를 좋아하시나?
작게 웃으며 사진을 건네준 뒤, 주방에 달랑 있는 커피포트에 물을 채웠다.
“잠깐 앉아 계세요. 곧 차 타드릴게요.”
“음·····그래. 천천히 해도 괜찮아. 미나 너도 어서 여기 앉고.”
“언니 어디 아파요? 왜 식은땀을····”
“·····괜찮다. 일단 빨리 앉아.”
미나가 식탁에 앉는 소리를 끝으로 방에는 적막이 흘렀다.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너 러시아어 할 줄 알지.’
‘당연하죠. 저희 엄마가 러시아인···’
‘그럼 이거 뭐라 쓰여있는지····’
등 뒤로 아주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마 둘 다 내 청력을 모르니까 저러고 있겠지.
그러나 비밀스러운 얘기를 엿들어서 좋았던 적이 없기도 하고.
둘에게 미안할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아 넌지시 경고를 던졌다.
“저도 러시아어 할 줄 아는데. 뭐 도와드릴까요, 팀장님?”
“뭐·····?”
“방, 방금 우리 말 들은 거야? 그 거리에서?”
“그래서 가끔은 괴롭지.”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격한 반응.
그 뒤로는 물을 다 끓일 때까지, 진짜 ‘적막’이 흘렀다.
덕분에 유리컵에 차를 따르고 식탁에 내가는 과정이 한결 수월했다.
근데 나도 참 이상하네.
뭐만 하면 차 마실 거냐고 물어보고.
차 귀신이 들렸나.
피식 웃은 나는 둘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뜨거우니까 조심들 하시고. 그리고 팀장님.”
“어, 어.”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커피를 그렇게 사 왔으면 저라도 화났을 것 같아요.”
이시아가 당최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내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나는 그런 소인배가 아니야. 전혀 신경 쓸 거 없어.”
“기분 안 좋아서 입술 깨무신 거 아니에요?”
“아, 그. 그건 그런 게 아니라····”
웅-
순간, 주머니에서 느껴진 진동에 번개같이 폰을 확인한 나는.
“죄송합니다. 중요한 연락이 와서요. 먼저 드시고 계세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번 가리킨 뒤, 고개를 숙였다.
타투이스트에게서 온 연락.
ㅡ연락이 늦어 죄송합니다. 지인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지금 장례식장이라····.
그래서 연락을 못 받았구나.
안타까운 사정에 쌓였던 화가 사르르 가라앉았다.
하지만·····
ㅡ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럼 실례지만 내일 작업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ㅡ다음 주는 돼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혹시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사진을 보니 다른 곳에도 문신이 있으시던데, 리터칭까지 해드리겠습니다. 한 지 오래돼서 색이 바래지 않았나요?
ㅡ저도 사정이 있어서 그러긴 힘들 것 같습니다.
ㅡ다른 작업자를 찾으실 건가요?
ㅡ아마도 그럴 것 같네요.
ㅡ알겠습니다. 제 제안은 그대로니까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또 귀찮게 작업자를 찾을 생각에 막막함이 몰려온다.
·····이 사람이 제일 적합했는데.
“·····차 잘 마셨다.”
“벌써 드셨어요?”
살짝 놀란 눈으로 이시아 앞에 놓인 잔을 보니 깨끗이 비어있었다.
아니 차를 뭔 물 마시듯 비우냐.
그리고 잠시 후, 미나의 잔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그걸 본 이시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
“그럼 갈까. 미나 너도 일어나.”
“아, 네·····”
얘기라도 좀 나누고 갈 줄 알았더니.
나만 당황한 게 아니었는지 미나도 당혹스런 얼굴을 내비치긴 했지만.
이시아를 따라 순순히 집을 나가는 걸 보면, 그렇게 당황하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네.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방에 혼자 있게 된 나는 식탁을 정리하던 중, 이시아의 자리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대체 이시아는 이걸 어디서 찾은 걸까.
“분명 서랍에 있던 것 같은데.”
방 구경 마음껏 해도 된다고는 했지만, 서랍까지 열어볼 줄이야.
어차피 뭐 있는 거라곤 몇 개 없으니 딱히 상관은 없지.
·····아니, 있었다.
내가 그걸 치웠던가?
냉수를 맞은 듯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사진을 들고 급히 서랍으로 걸음을 옮겼다.
열린 적 따윈 없다는 듯 완전히 닫혀있는 서랍.
1층부터 천천히 짚어가며 사진이 있던 서랍을 천천히 열었다.
“·····여기쯤이었나?”
서랍 끄트머리에서 하얀 약봉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품고 있던 심증에 확신을 더하며 확 서랍을 연 순간, 보이는 광경.
“하·····씨발. 또 스택 하나 쌓겠네.”
피로 추정되는 것으로 물들어있는 종이. 그 위에 러시아어로 쓰인 ‘유서’라는 글자. 심지어 검붉은 부분 외에 눈물 자국이 찍힌 것도 보인다.
“·····”
들고 있던 가족사진을 유서 위에 내려놓았다.
스토리를 알 수 없지만, 눈물겨운 신파극 하나가 서랍에서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