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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화 〉유서(2) (67/94)



〈 67화 〉유서(2)


나는 일이 꼬일 때마다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는 것으로 심신을 달랜다.
방금도 두 대가량 줄담배를 피우고 온 참이고.

덜컹ㅡ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내 인생도 이렇게 거침없이 나아갔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현관에 발을 디디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머리칼의 느낌이 문득 낯설다.
이게 남자 새끼 머리카락인지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머릿결.

새삼  몸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게 떠오른다.
그리고 이 새끼가 저질러놓고 간 일도·····내 것이 아닌데.

“하아. 어쩌겠냐.”

맨날 샤샤 탓하면서 한숨 쉬는 것도 이젠 지겹다.
뭐 어찌 됐든 간에 지금은 내가  소유주니까, 업보도 내가 감당해야지.

‘러시아어 할 줄 알아?’

이시아가 미나에게 물었던 말.
아마 종이에 적혀있던 키릴 문자를 물어보고자 했던 거겠지.
뜻은 ‘유서’.
지금쯤이면 미나한테 다 들었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미나에게 전화를 걸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ㅡ응, 세화야.

잔망스럽고도 귀여운 목소리를 되찾은 미나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모든 불행을 다 떠안은 목소리였는데.

“잘 들어갔어?”

ㅡ응! 너도  들어갔····애초에 집이었구나.

 헤헤 웃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사실 원래 ‘여자’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귀여운 웃음.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누구보다  알지만.

“웃는  귀엽네.”

ㅡ고, 고마워. 근데 왜 전화했어? 너 원래 일없으면 전화 잘 안 하잖아.

“팀장님이 너한테 뭐 물어본 거 없어?”

ㅡ·····기대한 내가 바보지. 아무튼, 그런  없었어. 뭐 그냥 운동 얘기만 한 정도?

말끝을 높이는 모양새가 정말 태연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왠지 모를 위화감만 아니었다면 아 그래? 하고 넘어갔을 텐데.

“그러면 지금 너 혼자겠네?”

ㅡ·····응. 언니랑은 아까 헤어졌어.

잠깐 뜸을 들이는  보아하니 의구심이 커져 갔다.
느낌이 싸한 탓에 미끼를 한 번 던져보기로 했다.

“그래?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옆에 없으셔?”

ㅡ왜? 무슨 일 있어?

“가족사진이 사라졌어. 아까 팀장님이 가지고 있었던 사진.”

ㅡ······에?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숨을 들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말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가 없고, 남은 건 그 한 사람이다.

잡았다.
비겁하게 토끼 뒤에 숨어있는 고양이를.

“팀장님 바꿔줄래?”

ㅡ····진, 진짜 없는데~

이시아한테 협박이라도 받았는지 끝까지 발뺌하는 미나.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이제 됐다-라며 미나를 밀어낸 이시아가 전화를 받았다.

ㅡ·····가족사진이 사라졌다고?

“역시 계셨네요, 팀장님.”

ㅡ사····사정이 있었다. 근데 그 사진····진짜 사라졌나? 아니다, 내가 지금 네 집 가서 같이···!

“·····다 거짓말이니까 진정하세요. 사진 멀쩡해요."

ㅡ·····거짓말?

불도저처럼 집에 쳐들어오려던 이시아가 불길하게 되물었다.
가족까지 파는 건 좀 심했나.

ㅡ진짜·····거짓말이라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는 이시아의 음색.

“팀장님이랑 얘기하려면 이 방법뿐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나셨다면 죄송합니다.”

ㅡ하아·····놀랐잖아. 차라리 다행···근데 무슨 일이지?

“그 종이 보셨을 거라 압니다. 러시아어로 적혀있는 거요.”

ㅡ·····그래. 본의 아니게 봐 버린  사과하지. 하지만 뭐라 적혀 있는 진 모르니 걱정하지····

이시아가 애써 급조한 변명이 무색하리만큼, 이미 내 머릿속은 상황 정리를 끝마친 상태였다.

“история(유서). 미나한테 이미 물어보셨는진 모르겠지만, 한국어로 유서입니다.”

ㅡ·····!?

“팀장님 혼자 끙끙 앓으실까  말해드리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 쓴 거고, 지금은 그런 생각 하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미나는 이거 알고 있나요?”

ㅡ·····아직.

아직 이라. 거짓일까, 아니면 내가 골든타임을 지킨 걸까.


그나마 서랍 안에 밧줄은 없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날 흉물스럽다고 버리지 않았다면, 이시아한테 정신과 가자고 들들 볶였을지도 몰랐다.

“일단 미나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걱정할지 모르니까.”

ㅡ·····알겠다. 그런데····왜 그랬던 건지 물어봐도 되나?

내 대답은 거절이었다.

***

ㅡ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안 나네요. 그냥 내가 이랬었으니 다시는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이런 용도로 둔 거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변색 되어야 했을 종이는  순백을 유지하고 있으며.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다.”

ㅡ 그러실 만 하죠.

종이에 묻은 핏물은  아직도 생생한 느낌일까.
알 수 없었다.
단지 류세화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연기일 게 분명할 평온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문득 그 사진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어리고 귀여운 류세화. 그 옆에 서 있던 젊은 남녀.

그런데 지금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통화 끊겼어요, 언니.”

조수석에 앉은 미나가 이시아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이시아는 그제야 눈을 떴다.
들고 있던 핸드폰에선 새까맣게 변한 화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에 스민 달빛과는 너무나도 대조되게.
이시아는 미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소중한 동생을 바라보았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사람처럼 싱글벙글한 미소가 부럽다.
넌 좋겠구나. 아무것도 몰라서.

“그럼 이제 말해주세요. 무슨 러시아어가 알고 싶으신데요?”

“·····이제 됐어.”

이시아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삭제했다.
그러나 이시아의 뇌리엔 검붉은 종이가 여전히 맴돌았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


***


뜻하지 않은 해명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가시지 않은 여운처럼, 이시아와의 통화가 귓가에 선연했다.

그래도 이번엔 나쁜 판단은 아니었던  같다.
이시아가 내 집에 있을 때 했던 말을 상기해보면, 어디에 그 유서를 찍거나 적어놓기라도 한 것 같은데.
어차피 러시아어를 아는 미나에게 물어보면 다 알게 될 터.

샤샤의 치부는····솔직히 내 일이 아니긴 했다.
허나 그게 유서니 뭐니 하는 것들이 까발려져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내 성별이 여자로 치환되는  세계에서.

“혼자 오해해서 굳이 배려해주는 것도 싫고."

나 같아도 고아인 고딩 여자애가 유서 쓰고 자빠져있으면 탄식을 뱉지 않고는  배기겠다.

그나저나 내일이 목요일이다.
그래, 원래 타투를 했어야  그 목요일.
베개에 머리를 뉘며, 핸드폰을 높이 들었다.
자칫하면 핸드폰이 떨어져 얼굴이 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자세. 그러지 않으려 양팔에 힘을 주니 마른 전완근이 쩍쩍 갈라진다.

나는 내 팔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데도 어떻게 여자보다 힘이 약하냐. 걔네는 만지면 부러질 것 같은 팔밖에 없어 보이는데.
문득 신기함을 느끼며 배에 탄탄히 자리한 복근도 매만져보고, 다리에 힘도  보다가 급격한 현자 타임이 몰려와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빨리 타투이스트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수십 개의 작업물을 들여다보며 타투이스트를 고르고 고른 후.
어쩌다 보니 또 늦은 밤에 연락을 돌리게 됐지만, 이번엔 반응들이 죄다 친절했다.

“톡 프사를 내 얼굴로 바꿨으니까.”

이런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그만큼  마음이 급하다는 뜻이다.
기생오래비 같던 샤샤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도움이 될 줄은 예상  했지만.

“·····사실 몇 대 쥐어패고 싶을 정도로 잘생기긴 했지.  이기적인 새끼야.”

나는 신중하게 고른 타투이스트  명과 예약을 잡고서야 핸드폰을 껐다.
예약은 바로 내일 밤.
이제 손가락에 내 존재를 새기는 것이다.
처음 해볼 타투에 살짝 긴장되면서도, 곧 샤샤의 정신침투를 막아낼 방패를 얻는다는 것에 흥분됐다.

그렇게 잠을 청했다.

***


해가 저물자 도시 곳곳에 보라색 아지랑이 같은 간판들이 빛을 발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만큼 현란한 광경.

번화가의 크나큰 길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꽉 들어찬 사람들은 마치 빛을 찾아 달려드는 불나방 같았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엔 흥분과 설렘, 열기로 가득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클럽 옆의 직원용 흡연장처럼.

“많이도 왔네.”

허탈한 심정으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반응해주는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게요. 아, 빨리 퇴근하고 싶다.”

이번 주에 도대체 뭘 하고 다녔는지, 눈가에 그늘이 서린 주하나였다.
주하나의 검은색 동공에 왠지 모를 한기가 깃들어 있는 것이,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다.

언뜻 순둥해 보이면서도 살짝 끝이 올라간 눈매가 인상적인 여인.
이상하리만치 특색 없는 외모 덕분에 동물에 비유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살짝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냥 외모는 평범보다 조금 더 예쁜 수준에, 신장만 보면 이시아에 필적할 정도라는 것.

오늘따라 익숙한 향을 풍기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젠 퇴사하고 없는 그녀를 떠올렸다.

클럽에 취직했을 때 나를 가르쳐줬던 선배 유예리.
말도 없이 퇴사한 그녀 대신, 이제 내게 남은 담배 친구는 주하나 뿐이었다.

나는 묵묵히 연기를 뿜으며 왼 손가락을 쳐다 보았다.
새하얀 살에 새겨진 흉터는 여전히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는 레터링이 자리했어야 할  자리에.

“손가락에 뭐라도 묻었어요, 세화씨?”

“·····요즘 타투이스트들은 약속 깨는 게 취미인가 봐요.”

연초를 들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 앞에 사람이 왜 저렇게 몰렸겠는가. 이유는 오늘이 금요일 밤이라서다.
내가 ‘두 번째’ 타투이스트와 예약을 잡은 건 목요일이었는데, 그 양반도 잠수를 타더라.

“아하. 타투 하시려 그러셨구나. 확실히·····색이 좀 빠지기도 한  같네요. 리터칭 한 번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래요?”

주하나의 시선이 내 목과 가슴팍에 머무르다 내 눈가까지 올라왔다.

“안 그래도 해준다는 사람 있긴 했는데. 아직은 거기까진 생각 안 하고 있고, 정작 이걸 먼저 해야 해서요.”

손가락을 들어 달랑거리니 주하나가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네요. 러시아 살 때 불곰한테 긁히기라도 한 거예요?”

“농담이죠?”

그랬으면 이런 상처가 아니라 팔 자체가 떨어져 나갔겠지.

당연히 농담이죠-라고 말한 주하나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싱겁다는 듯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람 사는 동네에 불곰이 나올 리가·····”

물론 가 보진 않았지만, 동네에 불곰이 돌아다니는 미친 동네가 어딨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하나가 입매를 비틀었다.

“많이 살긴 하죠. 누구는 사람을 먹이로 주던데요.”

“·····누가요?”

"어····세화씨. 정말 몰라요?"

"그런 건 들은 기억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그래요?"

전부터 내가 러시아어로 전화할 때마다 신기해하더니.
한국 벗어나 본 적 없다는 양반이 왜 이렇게 당당해.

내가 황당하다는 듯 되묻자, 주하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볼을 긁적였다.

“·····음. 기사에서 봤어요. 자기 애인 건드린 사람을, 산 채로 불곰한테 던져줬다고.”

“미친 사람이네요.”

 단호함이 웃겼는지 주하나가 날 바라보며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웃음 코드 참 이상하네.

우리는 대화를 마치고 클럽 입구로 돌아갔다.
어느새 암묵적 듀오가  우리.

입구 맨 앞을 지키고 있는 가드들과 교대하며 업무에 복귀하려는 찰나, 주하나의 탄성이 들려왔다.

“·····오.”

그러면서 어딘가를 가리키며 나를 툭툭 치는 주하나.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따라가 보니,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 셋이 줄을 서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보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광경인데, 그중 한 명이  눈길을 확 잡아챘다.

“엄청 예쁘네요. 와, 옷 입은  봐라. 오늘 반드시 남자 하나 데려가겠단 건가. 어, 어? 세화씨 눈에서 하트 날아가는데요. 여자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요?”

옆에서 주하나가 재잘거려도.
나는 멀리서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신하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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