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내기(1)
* * *
며칠 전에 있었던류세화와의만남은, 신하율에게작지 않은 충격을가져다주었었다.류세화랑같이 있었던 여자들 때문에, 안 그래도 심란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그의 곁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이시아를보니 더 없는 위기감이 치솟았던 탓이다.
빼앗길까 봐.
홀로 고이 간직하여 본연의 색을 잃지 않도록 가꾸어 주던 꽃을 누군가더럽힐까 봐.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꽃에 흙이 묻고, 벌들이 날아오는 건 구태여말할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니까. 가슴이 쓰라려서 미칠 것 같았기에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건류세화가성숙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자기조차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데, 여자들은 오죽할까. 어쩌면 그는 어둠이 들어찰 때마다, 하룻밤 불장난으로 태워버리려는 게 아닐까.
류세화가손을다쳤던 그 날. 그의 집 앞에서 작별을 고할 때가 아직도 아른거렸다. 일렁이며 노을 진 하늘이, 그의 입가에 내 걸린 미소까지,전부다. 절대 지워질 수 없는, 마음에 각인한 문신처럼.
신하율은그걸 본 순간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에 삼켜진 것이다. 굳이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류세화의텅텅 비어버린 공백에 자신이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바람뿐.
어찌 보면 하나의 소망이자, 또 하나의 욕심.
신하율은솔직해지기로 했다.
부끄러워 뒤에 숨고,류세화가고등학생이란 이유로어물쩍거리는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지나가 버렸다.
걷잡을 수도 없이 일어난 불길은신하율의마음을 휩쓸고, 땅조차 재로 덮어버렸다.
한 때는.
이젠 재와 연기만이 남은 그곳에,신하율의망막에는 다시 푸르렀던 숲이 비치기 시작했다.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내가 만든 숲에 너를 초대하고.웃음꽃이피어날 날이 오기를.
그리고 언젠가.
너의 숲에도 내가 들어갈 수 있기를.
***
····그러나거창하게 마음먹는다고행동까지 당당해지는 건 아니었다.
"야. 아까부터 왜 그렇게쫄아있어?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표정 좀 풀어봐."
"으, 어?"
친구인 정채민이신하율의팔을 툭 쳤다.조금 전, 주먹까지 꼭 말아 쥐며 결의를 다지던신하율의눈에 놀람이 번졌다.
"후우클럽 처음이라잖아. 근데존나 불안하네. 야하율아, 너들어가서까지그러면 안 돼 진짜."
이번엔 무려남자친구까지 있으시면서, 클럽 대기열에줄 서있는연서윤의말이다. 뭔가 한 마디 쏘아 주고 싶었지만,비용 대부분을연서윤이부담해주다 보니 입을 꾹다물 수밖에 없었다.신하율이고개를 움츠리자 정채민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서윤이많이 급한가 보네."
"당연하지. 나 진짜 군대앞두고온 거란말야. 아니 시발,발키리테이블 진짜조온나비싸더라. 그러니까 뽕 좀 뽑아야 하는데····하율아."
"·····응."
"남자들 오면 잘해 제발. 많은 거 안 바라니까찐따같이 있지만 마. 그냥 맞장구만 쳐주면 너도 오늘 모텔에서 잘 수 있어."
모은 두 손을 기도하듯 흔드는 꼴이 매우 간절해 보였다.신하율이주변을 돌아보았다. 한껏 꾸민 여자들의 눈에도연서윤과같은 간절함이서려 있었다. 저 노출도 있는 복장들도 다 하룻밤을 위함일 것이다.
'···세화는저런 애들 맨날 보겠지?'
하나같이예쁘고 자신 있게 드러낼 만큼 자랑스러운 몸매의 소유자들. 주변 남자들을 안 그런 척 끈적한 시선으로 훑는 걸 보니 걱정에 걱정이 더해진다.
저런 각양각색의 화려한 이들을 제치고류세화의눈에 띌 수 있을까.
그의 마음에 파문이라도일게할 수있을까···?
왠지 모르게울컥해진신하율은친구들에게 소심한 투정을 부렸다.
"····너네 나왜 부른 거야? 진짜 내가 저런 애들보다 예뻐?"
나중 가선 자발적으로 이 파티에 참여하긴 했으나, 분명 처음에는 내 얼굴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친구들이 띄워줬기에···· 상실감이 거대해지는 기분이다.
신하율은자꾸만 말려 올라가는 원피스밑단을내리며한숨을쉬었다.
탁 트인 가슴 부분과타이트하게달라붙은 이 살구색 원피스는, 정채민이 골라주며 호들갑을 떨어준 기대감의 산물이었다. 그에 홀라당 넘어가 자신감에뿜뿜차 있었건만.
"이런 옷은 역시 나한테 안 어울리는 것같···"
자조한신하율이가슴 부분을 흘겨보며 또 한 번 몸을 웅크리자 매서운 시선들이 날아들었다.
"뒤질래진짜?왤케꼴 받게 하지 오늘? 그럼 가슴 좀만 나눠주던가 이 시발, 진짜."
"네 성격 아니까 말은 안 하겠는데···너 그러다 언제 한 번 맞을 거 같다. 조심 좀 해하율아."
"아, 아파.알았어 미안해··"
언뜻 걱정해오는 것과는 달리, 어깨를 잡은 정채민의 손아귀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급히 사과한후에야 무시무시한 악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부산을 떨며 시간이 흐르자, 사람으로 이뤄진 줄이 점점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신하율을 잠식했던 긴장감은, 이내 의문으로 바뀌어갔다.
클럽 입구에 와서도 류세화가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체구의 남자 가드와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여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라? 분명 오늘 출근하는 날이랬는데···'
신하율의큰 눈망울에 실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오지 않는 주인을하염없이기다리는 듯, 영락없는강아지 같은모습이었다.
"그 가드 오늘 안 나왔나 보네. 친구가 그렇게 잘생겼다고 난리를 치던데."
"맞다.하율이도걔 물어보더라."
"····아냐, 됐어."
"뭘 또 풀 죽고 그러냐. 안에 가면 더한 애들 널렸을····와 시발 뭐야."
정채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딘 가를 가리켰다. 클럽 입구 깊숙이 있는 데스크에서 일어난류세화가다가오고 있었다.
"하나 씨. 이제 제가 할게요."
"앗,넵."
하나라 불렸던 여자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슬쩍 빠지는것까지지켜본류세화는,신하율을똑바로 응시했다.
평소와는 다른, 깊게 가라앉은 눈빛. 나른하게 풀어진 눈매가 오늘은 유독 차가워 보였다.
그 기세에 눌려 정채민도, 입을쩌억벌리던연서윤도류세화에머물러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신하율에겐바라고 바라던 반응이었다. 정말로, 내가 클럽에 와서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체감상으로는5초도 지나지 않은 듯했다.신하율을응시하던류세화가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헐렁한스카잔의팔이 내려가며,손목까지들어찬 문신을내보였다.신하율은백지같이 깨끗한 그의왼팔을떠올렸다.
진짜언밸런스하네그런 괴리감에 잦아들기도 전,류세화가머리를 쓸어 올리며 인사했다.
"옆은친구분들이에요?"
"으응."
"의외네. 누나가 이런 곳도 좋아했어요?"
나긋나긋한 중저음이이 자리의 모두에게파고들었다.
"어, 어? 한국말···잘 하시네."
"하율이랑아세요? 아니 얘가 도대체 어디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들이 질문을 토해냈지만,류세화는얼마 안 가 대화를 끝내고 본분을 다했다.
순식간에 신분증 검사를 마친 그녀들은 입구를 향해 미련에 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신하율은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렸다.
"세,세화야."
"네.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어요?"
"그게 아니라···"
···반응 좀 더 해주면 안 될까. 너 때문에엄청많이 꾸몄어. 생전 처음으로 클럽까지 왔는데···정제되지 않은말들이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저건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기에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최대한 순화해서··빙빙 돌려서 말하자.
"내, 내 옷 어때?"
진짜, 진짜 노출도 많은 원피스다. 누가 보아도 아, 얘 남자 꼬시러가는구나할 만큼.
"·····"
류세화의눈길이신하율의몸을 차례대로 짚어나갔다. 처음은 종아리.그다음은허벅지와 골반. 마지막은 탁 트인 가슴이었다. 그걸 바라보던 금빛 동공에 일 순간 싸늘함이 스쳤다.
조마조마하며 대답을 기다리던신하율이 채 견디지 못하고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들이 보기에는··괜찮아? 예쁜 것같···"
"야하네요. 그것도 매우."
그 툭 던진 말이,신하율에게거대한 충격을 가져왔다.
'나랑 자, 자자는 거야?'
남자가 여자에게 야하다고 할 때는, 성적인 의미가너무나도강했다. 설마하니세화가자신한테 그런 감정을 품고 있던 걸까···는 아니다. 그냥 한국말이 어색하다고 보는 편이 더욱 신빙성 있다.
···알고 있음에도, 몸이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자꾸만 웃음이 지어지려는 눈매와,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감추기가 너무 힘들다.
"그럼····나 이제 들어가 볼게··?"
초기의 목표는 달성했으니, 여기서류세화가조금이라도 아쉬운 기색을 내보이면 되는데.
·····왜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일종의 선고 같았다. 네가 뭘 하든 일도 신경 안 쓴다는 듯한 무심함이, 너무나도 차가웠다.
"네.친구분들기다리시니까 빨리 가 봐야죠."
"·····알았어."
신하율은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등을 돌렸다. 보지 않아도 자기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엔 웃다가 이제는 울상을 짓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술 많이먹지 말아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리며 애써 웃어 보였다.
"알았어."
싫어.
"걱정····고마워."
너 때문에라도, 안 먹곤 못 버티겠으니까.
***
밤 내내 가드를 서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게 하나 있다.
가령 서로의 허리를 휘감으며 나오는 남녀라던가. 그들이 나와서 뭘 하고, 어디로 갈진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다.
원나잇이뭐가 좋다고, 하는 생각도들지만, 굳이그걸 밖으로 꺼내진 않는다.
각자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고, 취향 또한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신하율이이곳에 왔어도, 미치도록 야한 차림을 입고 왔을 때도별말안 했다. 내가 그녀의 연인도아닐뿐더러옷차림을 지적할 자격도 없다.
입구에서 또 한 무리의 검사를끝냈을때, 안에서 남녀들이 우르르 나왔다.
담배 연기처럼 들어차는 한숨을 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기분이 왜 이렇게 더럽지.
시간이 흐르며내리쬐는달빛이 짙어질수록, 잠깐 동료 가드에게 자리를 맡기고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점점좆같아지는기분에 주변을 향해서 짜증을 낼지도 몰랐으니까.담배나 피우면 좀 나아질까. 연초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세화씨. 아까 안에서 봐 달라고 한 손님 있잖아요.신하율···이었나?]
귀에 꽂은 무전기에서주하나의목소리가 들렸다. 가뜩이나 술에 약한신하율이술 먹고 사고칠까 봐,주하나를내려보냈었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네. 무슨 일 생겼어요?]
[옙.엄청취한 거 같아요. 제 몸도 잘 못 가누는데, 옆에 남자들까지있더라구요. 그러다큰일 나지않을까요?]
[내려갈게요. 지금 바로.]
주하나에게위치를 받고 교신을 종료하며 꺼내 들었던 연초를 일그러뜨렸다.
"···그러니까 많이 마시지 말라 했는데."
나 스스로도내가 지금 이상하다는 걸어렴풋이나마느끼고는있었다. 일단 주어진 일부터 해결해야 했으니, 잠시 접어두었다.
클럽 내부로 들어가자 시끄러운 음악이 고막을 괴롭혔다. 사방에 퍼져 있는 담배 연기를 헤치며주하나가말했던 장소로 향했다.
어두운 내부에,지들이뭔 융단카펫인 양바닥에 깔린휴지들을 밟고 가자니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테이블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바로 오른쪽으로 꺾자꽤넓은 홀과 함께, 사람이 꽉 들어찬 소파들이 가득했다.
그 사이를 걷다 보니,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신하율을찾아낼수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남자는 뭐가 그리 불만 인지 얼굴을 굳힌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 아까 그···하율이동생 아니에요?"
"야,하율아. 일어나 봐. 네 동생 왔어."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가자신하율의친구들이 날 알아보곤 축 늘어진신하율을깨우기 시작했다. 각자 남자를 한 명씩 끼고 있는 게, 좋은 시간방해한 거같아서 미안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누나 상태만 보고 갈게요."
내가 그리 말하자 그녀들끼리 쟤네 사귀어? 같은 속닥임이 오갔다. 나는신하율의어깨를 잡고 깨우는 데만 집중했다. 그녀가끝자리에앉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몇 차례 흔들자신하율에게서반응이 돌아왔다.
"으으웅····왜에."
"····얼마나 마신 거에요?"
"어···하율이주량치곤좀 많이 마시긴 한 거 같은데.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네요."
"미안해요, 저희가 좀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녀들은 그저 날 누나를 아끼는 `친한` 동생으로 여기고 있는 건지, 변명 어린 사과를 해왔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아서, 나는 도리어 신경 쓰지 말라고 해버렸다. 그런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내 것을 지키는 행동에 가까웠다.
"조금 더 잘 거야····"
"····신하율."
안 그러던 사람이 왜 이렇게 걱정 끼치게 하지. 치밀어 오른 짜증에 누나라 부르는 것도 관두고,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정신이라도 차린 건지,신하율이느릿하게 눈을 떴다.
"누구야아···어··?!"
나를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신하율이, 술에 취해 풀어진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기이하게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떠올라 잠깐 말문이 막혀버린 사이였다.
"세화야아~"
신하율이내게푸욱안겨왔다. 가슴팍 위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얼굴에서, 따뜻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너 왜 누나라 안 부르고 이름으로불렀어어····근데 그것도 좋은 거같아···"
신하율은짧은 말을 마치곤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근육으로 딱딱한 가슴팍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나는 눈을끔뻑거렸다. 갈 곳을 잃은 손으로신하율의쏙 들어간 허리를 잡았다. 이러다 쓰러져다칠까 봐.
술 깨면 어떡하려고 이러지, 이 누나는.
신하율의얼굴이 내 가슴팍을 더욱 짓눌렀다. 베개라도 되는 줄 아는 걸까. 딱딱해서 별로 기분 좋진않을 텐데.
어찌됐든 간에귀여워서 좋지만,실없는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다.
"저기친구분들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일단신하율을집에 보낼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답답하게도, 그녀들은매우 놀란듯 입만뻥긋거렸다.
"저, 저기 괜찮아요?"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