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내기(3)
* * *
클럽지하에 위치한사장실.
사각사각.
이시아는무언가를 부지런히써내려 갔다. 본래 사장이 해야 했을 서류 작성.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장인 성유진은 이런 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구멍가게에신경을 쏟을 여유가 없으니까. 자신이 도맡아 관리할 것을 자처하기도 했고.
어둠을 딛고 일어서 양지 위로 뻗어 올라간 그녀, 정확히 그녀 어머니의 사업체들은 뭉치고 뭉쳐 하나의 거대한 뱀이 되었다. 조직을 따로 지칭하는 이름은 없기에, 임소연과이시아는뱀이라 불렀다.사특하기가뱀과 다를 바 없다 하여 붙인 이름.
한 때는이시아도그 구성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뱀의 비늘에 그치는 게 아닌, 무려 뱀의 독니로써. 그들이고아원에서소녀 둘을 거둘 때부터 예정된 운명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시작조차 안 했다면 달라졌을까.이시아는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하지. 지금은 추모 기간이 아니니."
지금 만큼은 과거에 사로잡히고 싶진 않았다.
잠을 설쳐 살짝 그늘이 졌던 눈매가 점차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동력을 잃었던 펜은 다시 종이 위에서춤추려했으나,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멈추었다.
"·····"
불현듯 떠오른 얼굴에 펜을 쥔 손처럼 얼굴이 구겨졌다.
애써 텅 비워냈던 마음에 또다시 누군가 함부로 들어왔음을 알아챈 탓이었다.
류세화.
"·····누구 맘대로."
누구 하나 잘못한 이 없건만,괜스레신경이 날카롭다. 불규칙한 수면 패턴 때문일지도.
탁.
이시아는거칠게 펜을 내려놓았다. 피곤 가득한 눈길로 종이를내려다보았다.처음엔 정갈한 글씨체, 끝에 가선 형체를 알 수 없는 악필이 가득했다.정신줄을놓고 있던 게 분명했다.
이시아는짧은 한숨과 함께 귓가로 머리를 넘기다 문득, 멈춰버렸다. 그리고선 슬쩍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다, 그가 하던 것처럼앞머리를올렸다. 그는 종종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마다 이러곤 했으니, 자신도이리하면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
이시아는바람이나 쐬고자 사장실에서 나와 1층으로 향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허리 라인과 매끄러운 가슴골을 슬며시 내보이는 브이넥 흰색 블라우스.
배꼽까지 올라와 골반의 모양이비칠만큼타이트한검은 치마.
노출도만 따지자면 이곳의 여자들과 비견 될 정도였으나, 클럽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차림새에 사람들이 시선을 던졌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
이시아가차가운 눈으로 응수하자 시선은 물론 앞을 가로막는 사람까지 슬금슬금 흩어졌다. 묘를 닮아 시원스레 찢어진 눈매 때문일까. 아니라면몸에 밴살기 때문일까. 이렇듯 눈길만 던져도 거의 다 무서워하곤 한다.
예외가 있다면류세화, 그 남자겠지.
하아.
피 묻은 유서와 그를써내려 가고있는류세화가자꾸만 눈에 밟힌다. 나아갈 길목을 큰 돌덩이로 막아 놓은 듯한, 답답함이 엄습한다.
"도대체 네가 나한테 뭐길래."
막연한 혼잣말은 클럽의 소음에 섞여공허하게사라져버렸다.
이곳은 때때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되기도 한다.쌓였던 말을 가감 없이 토해낼 수 있는 그런 숲.
"그래, 재밌었지. 너한테 조금만 접근해도 변하는미나의표정이. 볼 때마다 재밌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나."
또각,또각.
선명한구두 굽소리가 계속될수록 입구에도 가까워졌다.
"너랑 있어도 마찬가지야. 나도 모르게 이상한 짓거릴 하고 있을 때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마지막 말을 앞둔 입술이 선뜻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만하는 말.
"너는 유희에 불과해. 그리고 나는, 유희 거리에 모든 걸 잃어버릴 각오를 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지."
그에 대해커지는마음만큼, 그에 걸맞은 힘으로 억누른다.
손톱이 손바닥을파고드는감각이 쓰라렸다.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주하나?"
이시아는갑작스레 다가온 부하 직원을 확인하곤 자세를 바로 했다. 상사로서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기에.
"넵.근데 어떤 일로 올라오셨어요?"
"바람 좀 쐴 겸. 일 봐라."
"넵, 알겠습니다."
"·····잠깐만."
이시아는떠나려는주하나를붙잡아 바로 세웠다. 문득 드는 위화감. 지금은주하나를보아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주하나의 곁에 항상 있던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류세화는어딨나? 잠깐···시킬 일이 있는데, 도통 보이지가 않는군."
"아아."
주하나는난처한 척 웃으며 이마를 쳤다.
"친한 누나가 여기 놀러 왔는데···술에 많이 취했다네요. 아마 챙기러 갔을 걸요? 어차피 저희 하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도않···"
이시아는손을 들어주하나의쓸데없는 부연 설명을 끊었다.
"···안내해. 거기가 어딘지."
류세화의그 무감각한성격상, 뭐든 받아주고 있을 공산이 크다.
바보같이.
***
이시아는주하나와함께 2층에 다다랐다. 저 멀리류세화와그에게 안긴 여자를 보자 절로 눈이 부릅떠졌다.
분명 친한 사이에 불과하다고 들었는데.
저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거친 발걸음을 내딛던 찰나였다.
"아, 팀장님 잠깐만요."
이시아를막아선주하나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얘기 중인 거 같은데, 조금만 몰래 들으면 안 될까요? 마침 뒤에 테이블도 비어 있겠다. 세화 씨도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도 않는 거 같고··"
"·····뭐?"
네가 뭔데 그걸 함부로 판단해.이시아가으르렁거리며 입을 열기도 전에주하나가말을 이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 둘이 무슨 사이인지,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
뱀처럼 요사스럽게 일변한주하나의입매가 유혹을 토해냈다.이시아는잠시 말문이 막힌 채,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류세화의허리에 감긴 여자의 팔이, 갈수록 단단해지는 게 보였기 때문에.
아무리류세화라해도 저걸 용납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각별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잘생각하셨어요 팀장님."
이시아가고개를 끄덕이자주하나는귀에 꽂힌 무전기를 아무렇지 않게 떼어냈다.
"뭐 하는 짓이지?"
"아··사람들이 가드인 거알아볼까봐요. 괜히 이목이라도 끌리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라는주하나의말 이후,이시아는한숨을 내쉰 뒤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그렇게 둘은류세화의뒤로 다가갔다.
도처에깔린 큰 소리의 음악과 왁자지껄한 말소리.
다행이었다.
본래였다면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귀가 밝은류세화가알아챘을 테니.
주하나와이시아는 이곳에 온 손님인 양 연기하며 일행을 찾는 척 두리번거렸다. 귀는류세화를향해 쫑긋 열어둔 채.
이윽고류세화의누나라는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일전에보았던 편의점알바생이었다.
저들의 대화가 이어질수록이시아의눈은 싸늘하게바뀌어갔다.
자리를 포기하고신하율을데려가는 대가로,류세화에게뭔가를 요구하는 여자.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저런 말을 한다는 것부터 올바른 여자는 아니었다.
저렇게까지했는데 설마 그냥 넘어가진않겠···
"따로 원하는 거라도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웬만하면 다 들어드릴게요."
담담한류세화의말.
이시아는답답함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어진 여자의 말에 그런 요구가 아님을 알고선 까맣게 물들었던 시야를 되돌렸다.
"···같이 술도 먹고. 여기 채민이랑,하율이도껴서 같이노는 걸로. 어때요?"
저건 거절하겠지.딱 봐도 무슨 꿍꿍이인지 보이잖아.
너 술 잘 먹어? 술도 못 먹는 네 누나는 너 지켜주지도못할걸.
····다 떠나서애초에 미성년자 아니야?
"그거야 어려울 거 없죠."
저 바보 같고, 멍청하고, 착해 빠진 남자의 흔쾌한 대답.
그 시리도록 차가운 눈매로 노려보기만 해줘도, 저들은 꽁무니를 말고도망갈 텐데.
그럼 내가 귀찮은 척 먼저 나서서 널 힘들게 하는 저짐 덩이를맡아줄 수도 있었는데.
"·····"
그깟 여자 하나가 뭐라고저렇게까지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러는지도.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고 있었다. 저되먹지도않은 협상을 끝내야 한다는 것.
"우리완전 꿔다놓은 보릿자루네. 사람 불러 놓고 뭐 하는거예요 지금?"
할 말을 가다듬고 있던이시아는느닷없이 들려온 남자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띄웠다.
그 다음,류세화를향해 계속되는 남자의 시비에 머리가하얘질수밖에 없었다.
싼티나는문신의 걸레니, 뭐니 하는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이시아는손님인 척 연기하는 것도 잊은 채, 조마조마한 눈으로류세화를바라봤다.
이시아는안심했다.
비록 보이는 건널따란등뿐이었으나류세화의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기 때문에.
그러나 정작, 남자의 말이 이어지자 이시아의 입에선 억누른 신음이 흘러나왔다.
"·····잡종 새끼가 한국말은 어디서 쳐 배워선··"
미나를 처음 만난 날. 그녀에게 했던 말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쯧. 문신은 건들지 말지. 이제 정리하시죠 팀장님.에휴, 이럴 줄 알았으면··듣지 말걸."
주하나가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이시아를툭 건드렸다. 상사에게 무례한 행동이었음에도, 멍하니 있던이시아를일깨우기엔 충분했다.
"·····"
이시아는표정을 가다듬으며 나화났어를얼굴에 띄우곤류세화의어깨에 손을 올렸다.
***
사람들이이시아를무서워한다는 건 허언이 아니었다.이시아는날카로운 기세를 몸에 두르며 상황을 중재했고, 곧 노력은결실을 보았다. 물론기세뿐아니라 적절한 회유도 곁들여서.
"진짜보상해준다고요?"
"네 네. 저희 팀장님은 거짓말 안 해요. 여기 전화번호랑 계좌 좀 적어주시고···주민등록증도 한 번만 찍을게요."
"··민증은왜요?"
"그래야 처리하기가 편해요."
시비를 걸었던 남자를 달래고 있는주하나. 이윽고 그 남자가 기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끝으로, 사람이 가득했던 테이블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으에···"
"너 때문에 진짜 미치겠다. 야 서윤아 안무겁냐?"
"존나 가벼운데. 난 오히려 고맙지."
"너 진짜미쳤····"
복도 저편에선해롱거리는신하율을어깨에 들쳐 멘 친구들이 있었다.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는 통에,류세화가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도 당연한수순이었다.
그걸 본이시아가입술을 깨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류세화."
"죄송합니다. 징계는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말을 마친류세화가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이런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네가신하율에게어떤 마음을가졌는지엿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낮은 어조로 말한이시아는한 발자국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자연스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
너 정말 크구나. 힐을 신어도 살짝올려다봐야할 정도로.
왜 지금껏 몰랐을까.
"징계를 내리지도 않을게."
또각. 다시 한 발자국.
"왜 그랬는지 묻지도않을 거야."
"예?"
"대신 이것만 들어줘."
유유히 다가가던이시아는서로의 숨결이 스치는 거리까지 오고서야.
다채로운 금색 동공에 담긴 자신을 마주했다.
어릴 적에, 떼를 쓸 때나 짓던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
"쟤네 부탁··들어주지 마.류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