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내기(4)
* * *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에 있어 크나큰 결점이다.
근무 중 지인을 챙기는 것도 모자라, 직장 상사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욕을 줄기차게 먹어도 할 말 없다.
그런데 왜.
"저 사람들 부탁 안 들어주면·· 여기서 다 끝낼게."
이시아가내게 쩔쩔매는것으로 보이지.
슬며시 치켜뜨며 나를 향한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분명 공포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여쁜 처녀 귀신과 알콩달콩연애하는내용이 나온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시아가갑작스레 내게내밀어 준후하다면 후한 제안.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받을 거 다 받겠습니다. 감봉이든 뭐든 다 괜찮습니다."
여기저기또르륵구르던이시아의눈동자가 무섭게 멈추어 나를 본다.
"감봉으로 안 끝나면?"
"·····괜찮습니다."
이시아의짧은 탄식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전에 네가 말했지. 다 쓰러져가는 집 월세 내기도간당간당할것 같다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면서 의탁할 사람이라도 있어? 또 바보같이 죽기라도 할··"
아차 했는지 입을 가리는이시아.
가족이라면 이모도 있고, 죽으려고 했던 게 아니라고 정정해줬었지만··
소용없는 짓거리였지 싶다.
이 꼬인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이시아의우물쭈물하던 입 모양이 `미`자를 그린다.
··보나 마나 미안하다고 하겠지.
나는 낯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 어떤 원망이나불만을 가질생각도 없으니 원하시는 대로···"
"좋아. 저 여자 내가데려다줄게. 그럼 부탁 들어줄 필요도 없지?"
이시아가졌다는 듯 몸을 홱 돌리자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다시 놀자니 테이블은 이미정리됐고. 팀장님이 그러시면저분들은아무것도 가져가는 게 없어요. 그럼 누구를 탓할까요. 잠깐 보고 말 저? 아니면 누나?"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남자면서."
"잘 알고있을 수밖에 없죠."
그게 뭔 말이냐는 듯이시아의사나운 시선이 뚫어질 듯 내 눈과 마주했다.
그냥 그렇다고 얼버무리자 눈을 감으며 조용히 귀 뒤로 머리를 넘기는이시아.
"··좋아. 언제 놀건 지만 알려줘. 나도 그날은 체육관 빠질 테니까. ··물론 일 때문이야."
"알겠습니다."
말하는 걸 보니 징계는 없을 것 같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옮기려는데 슬며시 내 옷깃을 잡는 손이 있었다.
"··잠깐만."
"예, 팀장님."
"네 누나란 사람 술 많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주량도 약한데 술버릇까지 저러면··"
고저 없는 목소리가 유독 진지하다.
오히려 이러 이러한 사람이니 조심하라는 경고에 가까운 느낌이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술 약한 사람한테 과도하게 먹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거고요."
"단지 조심하란 얘기였어. 원래 술 마시면 본성이 나온다고들···"
"·····"
뇌리에 울리는 파열음.
안 그래도 차가운 눈매에 어렸던 일말의 온기조차 빼버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자이시아가흠칫 손을 떨었다.
"그냥 나는 걱정돼서···"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며 짜내는 말이 온전한 형체를 드러내기 전에.
"이 손가락. 병원비 많이 들었을 거예요. 한 번 본 사람.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베푸는비용치고는너무나도많이."
왼 손가락 위에 찢어진 넝마와 같이 새겨진 흉터를 내보이며 무심하게 말을 잇는다.
"항상 제가 저지르고, 그걸 아무 말 없이 받아준 쪽은 누나였어요. 그런 사람을 나쁘게 말하면···"
가늘게 뜨여진 시야 속에서, 느릿한 발걸음으로 멀어졌던이시아와거리를 좁혔다.
"팀장님."
새햐안 이에 깨물리며 고통받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갈랐다.
"·····!"
예쁜 눈이 확장되는 리듬에 맞춰, 기다란 속눈썹도 놀람으로 사르르 떨린다.
"깨물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파요, 피 나면."
구태여 그녀를 탓할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쌓아 올린 권위에 잠시 흠집 내는 것으로 차올랐던 실망을 털어버리고자 했다.
"앞으로는그러지 말아 주셨으면좋겠습니다. 무례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내 뜻이 잘 전달되었길 바라며 손을 떼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자리를 벗어나 업무에 복귀했다.
***
3일 후.
아직은 맑게 갠 하늘 아래서 바라본휴대폰은월요일을 알리고 있었다.
뿜어낸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시간, 오후 여섯 시.
"이미 팀장님한텐 알려드렸고.그 사람들오기만 기다리면 되나."
"저기 혹시 여자친구··"
"죄송합니다."
언뜻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칼 같은 거절에 부끄럽다는 듯 사라졌다.
···이게 몇 번째인지도 잘 모르겠다.
흡연 구역에까지 들어와 내번호를 따가려하는 것이.
반팔에드러난 문신이 꺼려지지도 않는 걸까.
평소보다 더 심한 게 역시 장소가문제다 싶었다.
건대 입구.
내가 살던 강남에서 지하철을 타고30분쯤가야 할거리에 위치한곳이다.
세계가 바뀌어도 이곳에 크게 변한 건 없었다.
몇 번은 와봤던 곳이었기에, 대략적인 풍경은 기억하고 있었으니.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여름인데도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길가에 늘어선 술집은 대학생들을 유혹하며, 그 사이에 노래방, 오락실 등이간간이껴있다.
그러다 문득,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신 예약은 둘째 치고, 비단 제일 큰 문제는 언제 어디서 닥쳐올지 모를 위협.
암암리에 지켜보고 있을페챠와유리가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아직은 괜찮구나 싶기도 하고.
'미끼라도 된 기분이네.'
사실 은연중에 자처한 것이기도 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태연히 담배를 끄고 커피홀더를챙겨 나오니, 멀리서 익숙한 미녀 두 명이 보인다.
산뜻한 원피스 차림의정채민과, 이날씨에도 추울 것 같은 차림을 하고서초커를찬연서윤.
곧 나를 발견한 그녀들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그에 간단히 답해주곤 커피를 하나씩 건넸다.
"아, 감사해요. 근데 왜···?"
"날씨가 더워서요. 그리고 저번 일에 감사하는의미로한 번 사봤습니다."
잠시의아해하던정채민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제 커피를 향하던연서윤의시선이 나를 향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평소에 살짝 특이하다는 얘기 많이 듣죠? 세화 씨는."
"가끔가다듣긴 합니다. 여기 기준으로 많이 이상한가요?"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여기 여자들은 날 어떻게 보고 있을지.
"여기 기준··? 아. 러시아 살다 오셨었죠. 흠··이상하다기보단뭐랄까. 이미지랑 너무 다르다 해야 하나? 여자한테 숙여 주는 느낌이 강해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다행 아니에요."
"?"
정체성을 인정받은 기분에 뿌듯해지려는 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화살(?花?) 때문에안 그래도 여자가꼬일 텐데. 떼어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잘 해주니까 떠나지 못하고 빙빙 맴돌죠."
"재밌네요. 관상 같은 거 배우셨어요?"
"아버지한테요. 그리고··"
연서윤은내 얼굴, 특히 문신이 있는 눈가를 뜯어보듯이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정채민이 또 시작이네 하며 말리려 했지만연서윤이더 빨랐다.
"미친 짓거리 했네. 자세히 보니까 감당 안 되네 이거. 선뜻 들어갔다간 나도 빠져 죽겠는데. 것보단··"
"또 뭐가 보여요?"
미신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래도 나름의 재미가 있어 잠시 어울려주기로 했다.
"문신 누가 새겨준 거에요? 특히 눈 에다 한 거."
나는 문신을 받던 꿈에서 들었던 고아한 음색을 떠올렸다.
"이름 모를 여자 가요."
"··그 여자가 완전히 뒤틀어버렸네요."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만 이어지니 슬슬 질리려는 찰나연서윤이속삭였다.
"혹여나 칼 잡지 마세요. 안 그러면··"
"나 왔어!"
***
아무것도 모르고싱글벙글웃고 있는신하율.
신났다는걸 증명하듯 연신 눈매를 휘는 것이, 그녀들이 내 약속을 잘 지켜준 듯했다.
"그때 괜찮았어요?"
"아니··일어나니까 죽고 싶더라. 혹시 너한테 실수 한 거 없었지? 필름이 끊겨서··네 이름 부르면서 다가간 거 밖에 기억이 안 나."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잘만 자던 데요."
"진짜지···?"
조금 전까지 찝찝했던 기분이신하율을보자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망사 같은시스루에너무 짧은 청바지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니 마음을 놓았다.
옆에 내가 있으니까.
내 대답에 안심한신하율이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아한 듯 물음을 던졌다.
"너네 커피는누가 사줬어?"
"네동생분이."
"···진짜?"
신하율의 고개가 슬며시 내 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커피를마시고 되려물었다.
"왜요?"
"그게···"
다 사줬으면서 왜 자기만 쏙빼놨냐.
차마 그렇게 말하기엔 부끄러운지 이도 저도 못한 채안절부절못한다.
"너는 먹을 자격이없어ㅡ하율아. 너 챙기느라 얼마나힘들었는줄 알아? 여기동생분이고맙다고 우리사주신거야."
"아야, 그건 진짜 미안하다고 했잖아···"
신하율은정채민에게 잡혔던 귀를 문지르며 찔끔 나온 눈물을 글썽였다.
"맞다, 누나."
"응!"
내 부름에신하율은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누나 거는 까먹고 안 샀어요."
"어···?"
"··그러시다잖아.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오락실이나 가자. 미필의 사격 실력 좀 보여줄게."
처음에 놀려 대던 정채민도 이쯤 되자신하율이좀 불쌍했던 건지, 분위기를환기하려노력했다.
연서윤은조용히뭔가를되짚어보는 얼굴이 되었다.
"그·· 미안할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맡겨 놓은 것도 아니고·· 이제 갈까?"
···이제 그만놀려야겠다.
나를 걱정시킨게 조금 괘씸해서 장난 좀 쳤는데,신하율은없을 게 분명한 꼬리가추욱쳐지는 모습이 너무 가련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사 올까요?"
"아냐, 아냐. 진짜 괜찮아."
고개를도리질 치는신하율때문에 잠깐 생각하는 척 턱을 괴다가.
내가 먹던 커피의 양을 가늠하듯 힐끗 보며 물었다.
"이러면 되겠네. 누나 단 거 좋아해요?"
"좋아··하긴 하는데·· 왜?"
전혀별일아닌 것처럼.
지구는 네모나다 듣는 이조차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끔 무감정하게 물었다.
"제거 같이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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