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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 내기(5) (72/94)

〈 72화 〉 내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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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금 통성명을 나눈 뒤, 오락실로 향하는 길.

네 명이었던 무리는 친분에 따라 자연스레 두 무리로 갈라졌다.

앞선류세화와신하율을뒤따라가던 정채민이연서윤을 향해 비꼬듯이 혀를 찼다.

"언제부터 네 아버지가 관상가셨냐? 분명히 전업주부셨던 걸로 아는데."

사실을 아는입장에서기가찬웃음밖에나오지 않았다.

연서윤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한 5분 전부터?"

"한결같이대단하다 너도. 나 같으면쪽팔려서절대 못 해그런 거."

정채민은 소름이 돋은 양팔을쓸어내리며말을 이었다.

"차라리 저번처럼 하지 그랬어?"

"손금 봐주는 게 언제 적 수법인데. 요즘에 모르는 남자애들없을걸. 그리고 너도 봤잖아, 쟤재밌어하는거."

연서윤의턱 짓이 저 멀리류세화를가리켰다.

"그렇다고 도화살이니 뭐니··· 진짜 알고 한 말은 아니지?"

"그냥 생긴 거 자체가 도화살이잖아. 그냥 여자 꼬인다, 하면서 은근슬쩍 나도 여자니까 너한테 꼬일수 있다,어필한거야."

"··칼 잡지 말라는 얘기는 또 뭔데?"

"호기심 유발. 그러면 어, 뭐지. 왜 그러는 거지 하면서 바로 물어온다고. 웬만한 남자 치고 주방에서 식칼 안 잡아본 사람 있을까?"

애초에ㅡ채민아.

연서윤은 웃는 낯으로 커피를 한 번 쪽 빨았다.

류세화가사준 커피라 그런지 더 맛있었다.

"저렇게 차갑게 생긴 애들이의외로여자 내성이 없어. 저렇게 잘생긴 것도 부담스러운데, 몸에 문신까지가득 해봐. 여자애들이 말도 못 걸걸?"

그렇게 추측한 대로.

안겨오는신하율을내치지 않고 도리어걱정해줄정도로, 류세화는 싫은 말 못하는 타입인 게 분명했다.

신하율의커피만 사 오지않은 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같이먹겠냐고물어보는 것도.

몸에 새겨진 문신 때문에 찜찜했던 기분도, 그를 다시 마주한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따가하율이취하면 네가 좀 데려가 줘. 잘 되면 네 테이블 비용에 돈 더 합쳐서 줄게."

"·····"

정채민은 고민했다.

우정의 깊이를 따지자면연서윤쪽이 더 깊었으나,신하율도소중한 친구였다.

연서윤의성격 반 만 닮았어도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됐을 텐데.

외모만 잘나면 뭐해.

"··하율이기분은 생각 안 해?"

"그래서 둘이 지금 사귀어? 먼저 뺏은 년이 임자지.나랑,세화쟤랑 둘이 남아서 내가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얘기만 하겠다는 거야."

퍽이나그럴까 싶지만,류세화때문에 남자 친구까지 차 버린 애한테 더 말해 뭐할까.

정채민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신하율과발을 맞추며 잘 가나 싶던류세화가귀를 매만지더니, 방향을 틀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신하율만쏙 빼놓고 커피를 돌린 게 미안했는지 이제라도 사주려는 건가 싶었다.

허나잠시 후, 정채민은 곧연서윤을 비꼬듯이칭찬했다.

"너 돗자리 펴야겠다."

류세화라는저 동생.

사실 도화살이 얼굴만 아니라 성격에도 낀 거 아닐까.

의식하고 하는 행동인지, 자각하고 하는 행동인진 모르겠으나 몸짓 하나하나가 여우란 말에 딱 어울렸다.

***

'어이가 없네.'

쓸데없이 좋은 청력으로언젠가 이득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었는데, 마침내 방금 한 건 터뜨렸다.

우웅­

재빨리편의점에서 사 온미니 선풍기의 펜이 돌아가며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포니테일로묶어낸신하율의기다란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처럼 살랑살랑 휘날렸다.

새하얀 목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방울이 점차 자취를 감춘다.

"시원해요?"

"으응. 이제 내가 할 테니까 이리 줄래?"

신하율이손을 뻗자 들고 있는 선풍기를 뒤로 숨겨버렸다.

조금전보다한껏 붉어진 얼굴로 작은 손을 허우적거렸던신하율에, 절로 눈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가만히 있어요. 누나가 제 커피도 안먹는다니까미안해서 그러는 건데."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세화야·· 진짜 네 빨대가 더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설명할 필요 없어요. 뭐 이유가 있었겠지."

"으··"

작게 앓는 소리, 갈 곳을 잃은 듯 방황하는 눈동자.

내 제안을신하율이거절했을 때 '그래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이후로 줄곧 저 상태다.

물론 오늘의 '목적'을 위해 한 행동이 물거품이 돼버린 건 조금 아쉽긴 했지만,그뿐이었는데.

다만선풍기를 사 온건 오로지신하율을위한 거였다.

누구라도 소중한 사람이 더위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않을 테니까.

기실 더위가 아니라 다른 무엇 때문이라 해도.

"누나."

내 나지막한 부름에 무슨 말을 할까, 어색해 보이던신하율의움직임이 뚝 멈췄다.

나는 살짝 몸을 숙이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얼굴을 마주했다.

"왜,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복숭앗빛홍조로 달아오른 볼과 입술을 문질러보는신하율.

저 커다랗고 순수한 눈망울로 보내는 따스함이, 언젠가 내게서 거둬질 수도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연서윤저여자랑 많이 친해요?"

"으응. 내가 지방에서 올라온 다음에 거의 제일 먼저 친구 된 애니까··"

"저 친구 말고 다른 친구는 많아요?"

"조그음··?"

말꼬리가말려 들어가는 걸 보아하니조금은커녕, 한 줌이나 될까.

"그럼 이제부터 제가 놀아드려도 돼요? 누나 심심할 때마다 같이 영화도 보러 가줄 수 있고, 피시방 좋아하면··"

"자, 잠깐만. 갑자기 왜 그래?"

"연서윤. 그 친구랑연이어가지마요."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잘 모르겠어. 그동안 무슨 일 있었던거야?"

저 '그동안'이라는 말 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신하율이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의 일이나.

뜬금없게 다 같이 데이트를 하게 된 이유 같은.

"나중에 말해줄게요."

전부 말해주면 멍청하게 혼자 자책할 게 뻔하기에 말을 끊었다.

그렇게 무심히 고개를 돌리려는 중에 처음 듣는신하율의목소리가 들렸다.

"··세화야."

깊은 수면 아래 가라앉은 목소리처럼, 단 한 점의 빛도 보이지 않는신하율의동공이 싸늘하게 식는다.

"혹시 서윤이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찔러보기만 했는데 당장에라도 뭔가 일을 벌일 것만 같은 눈빛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다음을 기약하며 우선 농담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아뇨. 그냥 날라리 같아서요."

"··엥?"

잠깐 뒤를 돌아본신하율은곧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뭐야 그게. 자기 생각은 안 하지 아주?"

"그것도 맞긴 하네요."

여우가 그려진 목이 더 잘 보이게 뒷머리를 올리고 툭툭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상황을 무마했다.

잠깐 멍하니 있던신하율은작게 입술을달싹였다.

"다른 여·· 사람 앞에서는 웬만하면 그러지 마."

"····?"

순간 내가 모르는 상식이 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내가 한 행동이야한 거로비춰진걸까, 아니면 여기 기준으로 무례인 걸까.

·· 모르겠다.

그냥 물어보기도 귀찮고 한 차례 설교를 받고 싶지도 않으니··

"그럼 누나 앞에서만 할까요?"

"···너 진짜."

고개를 휙 돌린신하율이머리카락으로 귓가를 덮었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이상한 기분에 커피를 쪽 빨았다.

여전히 미니 선풍기를신하율쪽으로 돌린 채로.

***

"여기가 오락실인데, 한국 오고 와 보셨어요?"

골목을 몇 번이나 돌고 나서야 등장한 오락실 앞.

정채민이 나를 부른듯했지만, 내 시선은 정반대 가게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가게 앞에 세워진팸플릿을가득 메운 총기들의 사진들.

그 앞을 서성거리다 어색하게 웃으며 되돌아가는 사람들.

"남자가 하기엔위험해요 세화 씨. 저거 진짜 총으로 쏘는 거에요."

만류하는연서윤이내 옆에 바짝 붙어 같은 곳을 바라본다.

희게 빛나는 간판겉면에굵직한 글씨가 가게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세화 씨?"

"아, 그냥 저런 데가 있다는 게 신기해서요."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있던 나는, 어깨에 올려지는 손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기에 뒤로 돌아 자연스럽게 손을 치웠다.

그때까지눈웃음을치고 있던연서윤이말했다.

"일단 들어가기 전에 팀부터 정하죠."

"팀이요?"

"네. 진 쪽이 오늘술값이랑게임비 다 낼 거거든요."

참 어딜 가도 내기 좋아하는 건 매한가지네.

물론 나도 남자였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여자라 해도 그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되게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럼 세화 씨는 누구랑 팀 하실래요? 참고로하율이는몸치인데. 저는 뭐··학창 시절에 운동 좀 했고요."

"그러면 누나랑 팀 할게요."

"잘 생각하셨어요.하율아, 너는 채민이랑팀해!"

그리 외친연서윤이득의양양한 얼굴로 내 팔짱을 끼려는 찰나, 나는 침울해 있는신하율에게다가가 손을 포개듯이 잡았다.

"뭐에요? 저랑 팀 한다면서요."

"그런 적 없는데. 누나랑 팀 한다고말했잖아요."

"아니 저 보고 말한 거 아니었어요?"

"애초에."

말을 잇기 전, 깍지 낀신하율의손안 쪽을몰래 간질였다.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잡힌 손이발버둥 치며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제가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명밖에 없어요."

"알겠어요. 채민아, 먼저 들어가자."

"어, 어어."

연서윤의말투에서 묻어 나오는 차가움에 정채민이 움찔했다.

그녀들이 오락실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후에야 맞잡은 손을 풀었다.

"저희도 들어갈까요?"

"···잠깐만, 세화야."

이제야 반응이 좀 오는 걸까.

"네."

자연스레 대답하며 그녀의 얼굴을 고스란히 눈에 담는다.

떠오른 홍조는 해와 같은데, 언짢은 듯 사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방금손잡는행동 같은 거·· 혹시 다른 여자한테도 그래?"

"하면 안 돼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니까·· 내 말은."

"저희 사이 정도면 그래도 된다 생각했는데."

너는 어떻게대답할까.

너의 속마음이나, 네가 내게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그,그러네. 우리 사이면··"

"누나는 구체적으로 무슨 사이라 생각해요?"

"그··친한 동생이랑 누나지. 나, 나는 딱히 다른 마음은 없어, 세화야."

"맞네요. 친한 동생, 누나 사이."

신하율이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을 주저하다 내놓은 답에, 만족한 척 웃었다.

날 따라 어색하게 미소 짓는신하율을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니까 스스럼없이 내 앞에서 그런 옷을 입고, 클럽에 들어와서, 남자랑 놀았구나.

"이제 들어가요, 누나."

"!"

신하율의작고 새하얀 손을 다시금 내 손에 가뒀다.

일체의 반항도 없이, 얌전한 게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척이 아닌, 진짜만족스러운미소가 나온다.

그래,다시 되찾으면된다.

내 하늘에 몇 안 되는 별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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