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내기(6)
* * *
1.
오락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신하율은, 조심스레 나와 맞잡았던 손을 빼냈다.
역시 여기 여자라 해도, 함부로 손을 대는 건 실례였던 걸까.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깊이 가라앉은 어조로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혹시 기분 나쁘셨어요?"
"응?"
신하율이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찬찬히 굴러가던 눈동자가 문득 제 손을 향했다.
"아."
무언가 알아챈 듯한 조그마한 탄성.
이윽고 잿빛이 된 안색으로 조그맣게 발을 동동거렸다.
"아니, 전혀, 진짜 하나도 기분 안 나빴어."
"그래요?"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니라 다행이네.
더워서 그랬나, 내 손 차가운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등을 돌렸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오락실의 내부 풍경.
"시발··· 야 나 손목 나간 거 같다."
"아니 펀치를 왜그따구로치냐? 손목 잡고 쳐야지!"
신하율과데이트 중 내가 찼던 공 달린 펀치 기계가 아니라.
그야말로 온 힘을 실어 표적을 눕혀야 하는 펀치 기계 앞에서, 손목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여학생 하나.
안타까웠다.
"누나가 보여줄게. 잘 보고 있어라."
"지랄, 군대도 안 갔다 온 년이 무슨."
저 끝에 자리한 유리로 된 벽 안의 표적들을 비비탄 소총으로 조준하는 여자 두 명.
그 외에도 현란한 내부 조명과 펌프를 밟는 소리가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 얼마 만에 와 보는 걸까.
이따금 밀려오는 향수에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신하율이내 앞을 가로막았다.
유심히 내 얼굴을 흘깃거리던 그녀가 살며시 두 손을 뒤로 모았다.
"세화야. 혹시·· 화났어?"
"?"
뜬금없는 질문에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신하율을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그. 내가 손 뺀 거 때문에 기분상했을까 봐. 갑자기 너 표정도 차가워 보이고 해서··"
"제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잖아요."
별것도아닌 거로내 눈치를 보는 게 귀여워 소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신하율의안면에 안도라는 감정이 드리운다.
그래, 원래 사냥감이 방심했을 때가적기지.
"그런데 왜 그런 거에요? 제 손 차가워서 좀 시원했을 텐데."
불쑥 쏘아낸 질문에 제 자리에 우뚝 멈춰선신하율.
무슨 대답을 하려나 기대하던 와중, 드디어 그녀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다오해하잖아. 그런·· 사이로."
"연인 사이로요?"
"응··· 혹시 너 안 좋게볼까 봐."
핑계일까.
아니면 그렇게 보이기 싫을 정도로 마음이 떠난 걸까.
여전히 두 손을 뒤로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그녀의 얼굴 또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미련을 털어냈다.
본다 하여도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낼 능력 같은 건 내게 없으니.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말을 돌렸다.
"가요, 이제. 친구 분들 기다리겠네."
"응? 응···"
분명 내가 먼저 걸음을 옮겼는데, 어느새신하율이조금 더앞서있었다.
그 뒤를 쫓으며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누나."
"응, 말해세화야."
"딱히 상관은 없었어요."
"어떤 거?"
그제야 나를 돌아본신하율을향해 무심하고도, 차분하게 읊조렸다.
"그런 사이로오해받는거."
"응,그렇·· 에?"
이 정도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비눗방울처럼 아름답고도 순수한 이 관계를, 섣부른 말로 깨뜨리고 싶진 않았으니.
숨 쉬는 걸 잊은 듯 부풀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던신하율의커다란 가슴이, 일체의 미동도 없었다.
이윽고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뱉은 그녀가 등을 돌렸다.
"흐우,잠, 잠시만. 눈에 뭐가 들어가서··"
"제가 봐 드릴까요?"
"아냐 아냐!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 안 도와줘도 돼,세화야. 그리고 장난은 그만해··"
장난.
어떠한 의미도, 숭고한 뜻도 없이 오직 일시적인 유흥을 표하는 단어.
그녀의 등만 뚫어지라 쳐다보다앞머리를쓸어 올렸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눈도 감았다.
저 가녀린 여체를돌려세워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너무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세화야, 혹시 어디 아파?"
귓가를 녹일 듯한 달콤한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짧은 시간에 금세 표정을 수습하기라도 했는지, 기대와 달리 날 걱정하는 얼굴의신하율.
붉은 기나, 설렘이 어려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요. 그냥 장난 같은 거 앞으로 조심할게요. 죄송합니다."
"어··?"
입을 뻥긋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는신하율에게,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사과하며먼저 발을 뗐다.
왜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하늘의 별을 따다 준다고 하는지 알겠다.
그만큼 어렵고, 다가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과장하는 거겠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한참이나 멀어진 내 하늘의 별도, 지금 만큼은 진짜 별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서.
여자 한 번 꼬시기 참 힘드네.
2.
늦게 왔다고 그녀들에게타박받긴했으나, 내기는문제없이진행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시작한 농구 게임에서 알게 되었다.
연서윤이단언했던 대로신하율은몸치라는 걸.
"와, 대단하다하율아. 어떻게 30번 던졌는데5번밖에못 넣어? 옆에동생분좀본받아봐."
"아니이·· 어려운 걸 어떡해."
정채민의신하율을나무라던 사이,연서윤이스리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팀 바꾸실래요?"
"괜찮습니다."
"후회하실 텐데··· 일단 1패 적립이에요. 알죠?3판2선."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연서윤의미소에,승부욕이끓어올랐다.
예쁜 얼굴에서도 저런 비열한 미소가 나올 수 있구나.
짝!
"채민아, 그만하고 다음 게임 정하자. 세화 씨도 이리 와 봐요."
연서윤은박수로 주의를환기한다음, 시선을 끌어모았다.
"뭐, 다음은 간단하게 '펀치' 기계로 하는 거 어때요?"
"···나는 찬성."
정채민이 꺼림칙하게 손을 들자 소탈한 웃음을 흘렸다.
유불리를 지킬 거라 기대는 안 했지만, 이렇게 지저분하게행동할줄이야.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연서윤의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까 대화를 엿들은 바로는, 내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는데. 굳이 저럴 이유가 있나.
"그건 너무하잖아·· 세화는 남잔데."
일전에 내 활약을 보았었던신하율도우려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맺힌 울상을 보니, 내 안의 무언가가 한층 더 깊어졌다.
"괜찮아요, 누나. 전에 한 번 봤었으면서 뭘 걱정해요."
"그래도···"
신하율이 미간을 찡그리며 걱정의 눈길을 보냈다.
"세화 씨는 괜찮다잖아.하율이너도 빨리 동의해."
"근데 한 가지 조건만 걸고 합시다."
"?"
이어진 내 제안을 들은연서윤이씩 웃었다.
"그걸로되려나모르겠네요. 일단 오케이."
3.
아까 한 여학생의 손목을 박살 내버렸던 악랄한 펀치 기계 앞.
일반 점수와 최고 점수를 알려주는 전광판엔 각각 895, 980이라는 숫자가 띄워져 있다.
순서는 그녀들이 먼저였다.
"그니까하율이가친 점수에 50점, 세화 씨가 친 거에도 100점 추가. 맞죠? 아, 이거 잘하면 지겠는데."
연서윤은손목을 풀면서도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곧 저 웃음이 절망으로 바뀔 것을 알기에, 속으로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지금 와서 말하긴 미안하지만, 제가 복싱을 좀했었거든요."
복싱했다는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프로에 비할 바는못되나 꽤안정적인 자세.
근데 지금 저 자세로 치겠다고?
"그럼 이제 칩니다. 하나 둘··"
"잠깐만요, 누나."
급한 마음에 호칭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는 다가가연서윤의자세를 교정해주었다.
"그렇게 치면 손목 나갈 수도 있어요. 이렇게 쳐야 안 다치지."
연서윤의손을 잡고 직접 다른 손에 감싸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핀잔을 줬다.
솔직히 좋은 사람이라 생각진 않는다.
그렇다고 아직 저지른 잘못도 없는 여자가 아파하는 걸 관망하고 싶진 않았다.
"흐음·· 고마워요. 방금 듣기 좋았어요. 그리고 저 생각해준 것도."
언뜻 몽롱한 음색을 흘린연서윤은이내 펀치를 날렸다.
파앙ㅡ!
전광판이 돌아가며 띄워낸 점수, 940.
그녀는 점수를 만족스럽게 지켜본 뒤 물러났다.
"고마워요. 세화 씨가 '누나' 도와줘서 잘 나왔네."
··중간에 낀 호칭이 거슬린다.인제 와서무를 수도 없어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그다음차례인 정채민은890점을띄워냈다.
그제야 돌아온신하율의차례.
격려를 해주기 위해 옆을 보니 고개를 푹 숙인신하율이보인다.
"누나?"
"세화야, 거기 그대로있어 줄래? 눈에 또 뭐가 들어가서."
"그냥 가만히 있어요. 제가 봐줄 테니까."
"자, 잠깐··"
애석하게도신하율이뒷걸음질 치는 것보다 내가 더 빨랐다.
그녀의 머리를 살포시 잡으며 들어 올렸다.늘상예뻤던 입술에 선명한 잇자국이 눈에 띈다.
신하율은재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누가 잡아먹는데요? 나 봐요."
"····"
도저히 눈꺼풀을 올리려는 기색조차 없어 보여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러는 이유라도 알려 주던가, 사람 걱정되게.
내가 해야 할 행동이 뭘까 고민하는 찰나, 드디어신하율이온전히 얼굴을 들었다.
"미안, 미안. 나 지금 치면 되지?"
신하율이배시시 웃으며 내게 물었다. 멀쩡한 표정에 이유 모를 혼란을 느끼면서대답했다.
"네, 누나 차례에요."
"빨리 좀 쳐라하율아. 시간 간다."
"너 세화 앞에서쪽팔릴까 봐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야, 서윤아. 그리고 존칭 붙여야지. '너한텐' 세화 씨야."
신하율은담담하게 응대하며 펀치 기계 앞에 섰다. 나도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다가가 그녀를 살폈다.
"자세 좋네요, 누나. 그대로만 치면 되겠네."
"응."
이윽고 문득 떠오르는 걱정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져도상관없으니까다치지만 마요. 진심이에요."
"고마워. 역시 세화는 누구한테나 다 착하네."
생긋 웃는 미소에서 왠지 모를 한기가 전해져 왔다.
그 후, 미소를 거둔 신하율이 주먹을 날리며 펀치 기계를 아예 눕혀버렸다.
"·····?"
"십·· 뭐냐."
그녀들은 전광판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더불어 나도그럴 뻔했고.
980점.
무서운 속도로 오르던 점수는 무려 980점에 멈췄다.
이러면1,030점인가.
승기를 잡았다는 기쁨에 취하기도 잠시, 무언가를 깨닫고신하율의손목을 잡았다.
"점수 잘 나온 건 좋은데·· 손목은 괜찮아요?"
혹여나 빨갛게 부어오른 곳이 없는지,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다.
별 이상이 없음에 안도하니 덩달아 눈꼬리도 휘어진다.
"갑자기 좋은 일이라도 생각났어, 세화야? 기분·· 좋아 보이네."
"방금요."
"방금?"
잡았던 손을 놓고 허리를 폈다. 연서윤은 초조한 듯 하면서도 눈을 반짝거렸다.
내가 추락하길 고대하고 있겠지.
펀치를 날리기에 앞서,신하율에게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만약에 제가 다치지 않으면, 누나도 기분이 좋을까요?"
그다음, 전력을 다해서 펀치 기계에 주먹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