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늑대 새끼인 줄 알았는데(2)
* * *
1.
사격장에서 나와 길 한복판에 선이시아는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여자 세 명이랑 술을마신다기에, 류세화에게 모이는 날짜를 알려 달라 한 다음.
우연찮게ㅡ사실은미행에 가까운ㅡ그를 따라와서 황당한 광경을 보게 된 까닭이다.
물론 이시아는 부하 직원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라 스스로 단정 지었지만.
하여튼 마냥 고아인 줄 알았더니, 경악할 정도의 사격실력을 갖추고있고. 특수부대 출신인가 하니,류세화의나이는 고작 19살에 불과하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총 쏘는 법은 무조건 러시아에서 배우고 온 것일터.
"···· 군도 아니고. 러시아에서 그렇게 전문적으로 총기를 다루는 단체라면."
일견 그들을 떠올리자이시아의눈매가 가늘게 뜨인다. 그리고 그 의심은 엉뚱한 곳으로 전이되었다.
바로, 류세화의 출신을 향해.
몸을 덮은문신, 눈 밑에 그려진 상징 같은 레터링.스파링 할때 보여준 실력과 본연의야성미···
이시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만하자."
예의 죽은 친구가 떠올라 잠깐 예민해진 듯했다. 그 흉수가 러시아 사람이라, 일순 흥분하여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경솔했다.
누군가에게 속으로 용서를 빈이시아는사격장에 나란히 걸려 있을 자신과 그의 표적을 생각하며,괜스레 흡족한 미소를 짓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야."
발뒤꿈치가살짝 까져 있었다. 종일 구두를 신고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이게 뭔 고생일까 한탄하던 이시아는 시무룩하게 눈을 떴다.
"요즘 왜 이러지, 나."
아, 맞다. 기품은 언제나 유지해야지.
슬쩍 헛기침을 하며 찡그렸던 표정을 폈다. 이까짓 상처에 부끄러운신음을내다니.
근래 많이 약해졌다며 속으로 자책한이시아.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자, 이제갈까ㅡ하고까치발을들어 주변을 훑던이시아는 어리둥절했다.
"·· 얘네 어디로 갔지?"
보이는 건 오직 수많은 사람의 새까만 머리통뿐이라, 망연자실하고야 말았다.
이제부터, 여기 있는 수많은 술집 거리를 쥐 잡듯 쏘다녀야 할 게 자명했기에.
2.
술집을 향해걸을수록, 피부를 달궜던 햇빛은 차차 시원한 밤바람으로바뀌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저물어가는 노을 사이에서 달이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이 신비스럽게 와닿았다.
"·····"
시끌시끌. 나를스쳐 가는소음이 오히려 편안했다.저녁때를맞춰 형형색색의 간판을 빛내는 술집들, 그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여러 감정이 든다.
굳이 하나 꼽자면·· 나도 지금은 이들과 같이 평범하구나, 정도. 살인귀가 아니라 말이다.
"저·· 여기서 마시는 건 어때요?"
"··오, 오. 잘 찾았다 서윤아. 세화 씨가 보기엔 여기 분위기 어때요?"
걷고 걷던 중 그녀들이 나를 흘긋 보며 말했다.부자연스럽고, 달리 말하면 억지스러운 텐션으로 짜내는 목소리가 짠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들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2층에 자리한이자카야형식의 술집이다. 특유의 분위기가 안락해 보였다.
"좋네요."
"다행이다. 그럼저기 들어가는 걸로··"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 말에 그녀들 모두가 시선을 보낼 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까 예의 없이 행동한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두통이 너무 심해서 그랬나 봐요."
내가 사격장에서 보였던 거친 행동. 그리고이따금 두통으로 찌푸려지는 내 아미가 그녀들에겐 부담스러웠을 터였다.내 입으로 칭하긴 좆같다만, 미녀가 냉기를 풀풀 날리는데 눈치 안 볼 남자가 그리 흔하진 않으니까.
원래였다면 저 새끼 왜 혼자 지랄이지, 하고 넘어갔겠지만 여기서는·· 남자인 내 눈치를 보며 맞춰주는 것이다. 그게 싫고 미안했다.
여기 남자처럼 여··남왕벌대접받는것도 내 신념에어긋난다.
"빨리 고개 드세요, 잘못한 거 없으니까. 오히려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귀마개를 이렇게 막! 거칠게 내려놓고. 방탄복도 막··"
"오해했네요. 저희가 뭐 세화 씨한테실수한 줄알고·· 솔직히 조금만 눈매 찌푸리셔도 되게 차가워 보여서구분이 안 가거든요.짜증 나신건지, 그냥 짓는 표정인지··"
····· 미치겠네.
방탄복을 벗는 시늉을 하는연서윤과, 멋쩍게 웃는 정채민이 괜히 안쓰러워져신하율에게시선을 돌렸다.
"혹시 손목에 자국 안 남았어요? 아니면 아프다거나."
사격장을 나온 이후로 한참이나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었어도 뇌리에 남은 찌꺼기는 여전했기에, 불현듯 이상한 감각이 치밀 때마다 손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으음·· 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신하율은살포시 얼굴을 찌푸리며 제 손목을 문질렀다.
"··봐봐요."
생각도 않고 다가가시스루에비치는 여린 손목을 잡았다.
"미안해요. 제가 좀 아프게 잡··"
자책하는 건 뒤로 물리며 어떠한 일념 하나로,시스루를급히 걷어 올리던 찰나 귀여운 웃음이 들렸다.
쿡쿡ㅡ
소리의 정체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흘리는신하율이었다.
"장난이었어. 그래도 나 여자야, 세화야. 그 정도론 절대 안 다쳐."
"당했네."
놀림을 받았음에도 내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게 느껴진다.
"사람 걱정되게 그러지 마요."
"어? 아·· 응. 미안."
신하율은왠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저는두통약 좀 사 올테니까 다들 들어가 계세요."
"아, 세화 씨. 그럼 저랑 같이··"
"사실 담배 좀 피우려고요."
"아하."
연서윤은잠깐벙쪘다가,납득했는지탄성을 뱉었다.
"사실 그게 약이셨구나. 빨리 피고 와요."
이윽고 그녀들은 건물의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신하율은,잠시 머뭇거리다 내 곁에 다가왔다.
"그렇게 아프면 담배 같은 거 피우지 말고 약이라도 먹지··· 혹시 뭔 일 있으면·· 전화해. 알았지?"
그녀는 손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제 귓가에 흔들어 보이며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이내 재빠르게총총걸음으로멀어지더니, 계단으로 쏙 사라졌다.
참··· 심장이 아파지다 못해 미어지는모습에 불만을 토로했다.
"네가 그러니까 나도 자꾸 이기적이게 되잖아."
제가무슨 짓을하고 있는진 알까. 모르겠지.
제목 가까이에 이빨을 들이밀고 있는데, 순진하게 웃고만 있는 걸 보면.
신하율 생각으로 뇌리를 물들이며 긴장을 풀곤, 근처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암묵적으로 만들어진 흡연 구역.여자가 많았고, 그 시선들은 여느 때와 같이 내게 향했다. 나는 묵묵히 담배를빼어물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치이익···.
불을 붙이고 연기를 뿜어냄과 동시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을 있는 힘껏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안녕하세요, 이모."
ㅡ웬일이야. 우리샤·· 아니 세화, 네가 전화를 먼저 다 주고?
한국어만이 들렸던 이 장소에 낯선 이국의 언어가 퍼져나갔다. 내게 다가오던 여자 한 명도 멈칫하다 제 자리도 돌아갔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조였던 신경이 느슨해진다.
"페챠랑유리는 잘 있어요?"
ㅡ그래. 네 얼굴 보고 싶다고 난리다. 그런데·· 어디 아프냐? 목소리가 좀 가라앉은 거 같은데.
"이모한테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아니 궁금한 게 있어서."
숨을 고르고 생각을 가다듬었다.내리깐눈으로 멀어지는 담배 연기를 쫓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누구였어요?"
ㅡ뭔 소리야. 너는너지. 뭐 잘못 먹었··
"질문을 바꿀게요."
눈을 감고, 머금은연기를 내뿜었다.
"이모는, 절 보호하고 있는 걸까요, 감시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둘 다?"
ㅡ··샤샤.
"제 기억에 따르면, 저는 분명 보호가 필요 없는 사람일 텐데."
이 새끼는 피식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발톱만 들려준다면 피바다를 만들 수 있는 놈이다. 30M 거리에서 총알 열 발을 한 곳에 다 꽂아 넣는 실력?
그건 이 몸이가진 능력의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또 어떤 무기를 다룰 수 있을지는 건너뛰고,이런 새끼가 왜 쫓기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난 말한 적 있다. 시한폭탄 가지고는 못 산다고 말이다.
"혹시 제게 권총 하나만 주실 생각 없나요."
ㅡ?
··· 대략 3분이 흐른 후였다.
ㅡ···설명해. 왜 달라는 건지.
이를 가는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만큼 이모는한순간에평정을 잃은 듯 보였다. 그 틈새를 비집어야 했다.
"그래야 제 몸도 지키고. 이모가 말한 이들이 와도 죽일 수 있을 테니까요. 돌아왔거든요, 기억이."
지금 나는류세화였으나, 입에 죽음을 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샤샤를 연기하며 이모에게 모든전말을듣고자 했다.
설령 연기에 실패하더라도, 작은 실마리라도 얻으면 이득이라는 계산 하에 이뤄진 행동이었다.
허나,
ㅡ이모는거짓말 싫어한다고 했잖아, 세화야.
뒤를 잇는 소탈한 웃음소리에, 계획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왜일까. 꼬투리 잡힐 말도 하지 않고, 답을 유도하기만 했는데.
"섣불리 단언하지 마세요."
ㅡ아니. 너는 다시 기회가 와도 절대 못 죽여.
"그건 또 무슨 소린지··전부터 퍼즐 놀이만 하시네요. 속 시원히 답은 안 주시고."
ㅡ다너를 위해···
"제가 기억을 찾는 게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내 어조는 차분했다. 안으로는 끓는 속을 꾹 눌렀을지라도.이모가 나를 위해준다는 건 알기에 최대한 예의를 지킨 것이다.
"사람을 제일 화나게 하는방법의 하나가, 말을 하다 마는 거랬는데. 그에한술 더 떠서, 말해 줄듯 말듯 간을 보시면 제 심정이 어떨까요."
ㅡ나 때문에 열 받았다는 거냐.
"아니요. 들어보실래요, 이모?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여전히 태연한 말투로 내 사연을 읊어 보았다. 이모가 그에 응하기를 바라며.
"가끔 제가 기억하지 못하던 꿈을 꿀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그 꿈은 저를 이상하게 만들고, 제정신일 때마다 마음을 졸이게 하죠. 요즘이중인격자같아요 제가.한쪽은사이코,한쪽은저. 아니, 요즘 그를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본래의 목적도 잊은 채 도리어 술술 불고 있었다.
ㅡ그래서. 오늘도 그 꿈을 꿨니.
"아니요. 실탄 사격장에서 총을 쏴 봤죠. 그런데 몸이 제멋대로··"
ㅡ··머리에 다 들어갔겠지. 거리가 어떻게 되든,상관없이말이다. 페챠ㅡ불 좀 부탁한다.
이모도 답답했는지 시가를 피우는 모양이었다. 나도 잠잠히 연초를 태웠다.
서로 간에 암묵적인 휴식이었다.
대략 3분 정도 지났을까.
이모가 먼저 말했다.
ㅡ저번에너한테 실수한 이후로, 아니 네가 모든 걸 잊어버렸다고 했을 때부터 두려웠다. 내말실수하나가 네 기억을 떠올리게 할까 봐. 지금의 네가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올까 봐.
새 담배를 입에 물며 잠자코 들었다.
ㅡ네가괴로워할걸 알면서도내버려둘수밖에 없는건··· 다 내 욕심 때문이다. 미리 일러두마. 말은 못 해주겠다. 미안하다, 사랑하는 조카야.
담담하면서도 애절한 목소리가 결국 거절을 말한다. 그에 밤하늘을 눈에 담으며 되물었다.
"바라지도, 원치도 않지만. 기억을 되찾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
ㅡ이모에게연락해. 그 외엔 다악마들뿐이니까. 그럼 끊··
"한 가지만 더 여쭤볼게요. 그래도 될까요."
ㅡ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거라면.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 수시로 허리 춤에 손을 가져가던 걸 떠올렸다.막연히 권총을 잡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권총을 잡아 보고 돌이켜 보니 그 행동들 중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제가 따로 다루던 무기가 있었나요?"
ㅡ다신 볼 일 없을 거니까 걱정 마라. 다른 사람 손에 있으니까.
그 후로 전화는 끊겼다. 결국, 얻어낸것도 없는 대화였다.
엿같이 맞춰지지 않는 퍼즐로 뇌리를 메우기만 했을 뿐이라, 실소를 흘렸다.
"점점."
자약하게 중얼거리며 차분히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밟았다.
"재밌어지네."
온 힘을 주어 바닥에 문질렀다. 발을 떼자 가루가 되어버린 꽁초가 보였다.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일행이 들어간 술집으로 향했다.
앞머리를 연신 쓸어 올리며되뇌었다.
전생을 통틀어,술로 목욕을 하고싶은 기분은 이리 흔치 않았다고. 술값을 내게 된 그녀들에게도 미리 애도를 표했다.
오늘뒤져보기로 마음먹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