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술자리의 꽃은 게임(3)
* * *
1.
..냄새로 사람 구별하기.
흡사 유흥업소에서나 통용될 법한 놀이를 제안한 '장본인'은 은근슬쩍류세화의눈치를 보았다.
혹여나 그에게서 옅은 경멸이나, 실망했다는 말이 자신을향할까 봐.
비록류세화의성격을 생각하면,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할 것이다.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다. 그도 결국 남자니까.
따라서,신하율은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즉시사과하리라 마음먹은상태였다.
"...."
한 손으로 머리를 괴며 생각에 잠긴 듯한류세화.
저런 작은 머리통이라도 술이 들어가면 무거운가 보다. 다만 무표정만은 여전하다. 몸을 뜨겁게 데우는 알코올도, 그의 얼굴에 덮인 얼음은 녹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속내조차 알 수 없다.
길어지는 침묵에 덜컥 가라앉은 심장이 차갑게 두근거렸다.
자신을 쉽게 보는 것 같아 화나기라도 한 걸까.
신하율은내뱉을 변명을 장전했지만, 이내 헛된 걱정이었음을 알았다.
"왜 다 저만 쳐다보고 있어요?"
"하율이가게임 제안했는데 못 들었어?"
류세화는자세를 풀고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시시각각 귀엽게 변하는신하율의얼굴을 구경하는 것에 푹 빠져있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자신의 청력이 반응하지 못했음을 알고는 살짝 놀랐다.
역시 술 앞에는 장사 없구나.
"그래서 무슨 게임인데요?"
"하율아."
"..내가 다시설명해줄게.."
신하율은설명을 시작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어릴 때 썼던 일기장을 남들 앞에서 낭독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설명을 마쳤을 때,류세화의반응은 씁쓸하게도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럽긴 한데 재밌겠네요. 근데 누나들은 괜찮아요?"
"뭐가?"
그녀의 되물음에류세화가입가를 문질렀다.
"일단 제가 못 맞추면 지는 거잖아요. 술은 마셔도 되는데 게임에서 지기는 싫거든요."
"음..계속말 해봐."
"좀 깊숙이 맡을 수도 있다는 얘기에요. 머리 냄새로 안 되면살냄새도맡아보고. 그래도돼요?"
그녀들은당연히ㅡ라는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오기 전에 침을 삼켰다. 잔잔한 어조로 선뜻 저런 물음을 던져오는류세화. 그 모습은 기이하고도 색다른 자극이었다.
단,신하율만은쓴웃음을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모습을 볼 바엔 차라리 그의 짜증을 고스란히 맞는 게 나았을 텐데.
"누나는 싫어요? 표정이 안 좋네."
"싫은 건 아니야."
단지 너의 무방비함이 싫을 뿐이야.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나도 싫어.
돌연 어두워진 마음의 창문.류세화는신하율의눈을 통해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 역시 그가 자신을 탐색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
그의 탄성에신하율은은근히 기대했다. 애가 타는 속에도 시치미를 떼며 따스함을 담아 되묻는다.
"왜?"
"누나가 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서. 게임을 빌미로 제 흑심을 채우려는 게아니라.."
"..무슨 흑심?"
"제가 너무 들이댈까 봐걱정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제가 아무리 여기 남자라도 함부로 그러면 기분 나쁠수 있으니까."
기대는 실망으로, 실망은 허탈감으로, 허탈감은 곧 체념으로 바뀐다.
붙잡을 엄두도 안 나게 흘러가는 의식의 선로에서,신하율은무언가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그건 아니었어. 근데 세화야, 조건 하나만 더 붙이고 싶은데 괜찮아?"
"네."
"네가지면..벌주대신에 내가 원하는 질문 하나만 대답해주기. 어떤 것이라도."
"그거야 쉽죠. 근데 누나들이 지면 어떻게 할래요?"
"벌주 마실게. 다 괜찮지?"
신하율은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연서윤은네가 뭔데 그걸 마음대로 정하냐는 듯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정채민은 아무래도상관없다는듯한제스쳐를취하고 있었지만,그런데도반발이 없는 제일 큰 이유는필시..
류세화에게무엇을 물어도 된다는 점이 큰메리트로작용했겠지.
허나가엾게도, 자신은 그녀들이 궁금해하고 있을 질문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2.
정신을 차려보니 웃기지도 않는 놀이에 휘말려있긴 했지만, 그래도신하율이제안한 것이라 열심히 어울려 주기로 했다.
"눈 감았으니까 한 명씩 오세요."
자리 맨 끝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어두컴컴한 시야가 취기로 인해 어지럽게 일렁였다.
톡톡ㅡ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손가락이 어깨를 건든다.
얘가 첫 번째네.
나는 그녀가 있을 위치를 속으로 가늠하며뒤통수가있을 법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둥그렇고 부드러운 머릿결. 여기가 맞는 것 같아 그대로 감싸 안은 채 내 얼굴로 당겼다.
일전에 맡아 보았던 향긋한 향이라 바로 알아챘다.
"다음 오세요."
그녀를 돌려보내자 곧바로 다음 사람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방금 전과 같이똑같은 행동을 취하니, 바로 알겠더라. 오늘 거의 맡아보지 못한 향.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생각하며 괜스레 고심하는척해보았다.
"으음...잘모르겠네."
머릿결도 쓸어보며,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당겨오기도 했다. 이내 화끈한 열기가 전해져 와 장난을 멈추고 돌려보냈다.
"어렵네요. 마지막 오세요."
마지막은 보나 마나신하율이다.
눈을 감아도 그 가련한 실루엣이, 곧이어 종일 잡고 있던 그 손이 내 어깨를 새 부리처럼 톡톡 건들 게 예상되었다.
..톡톡.
혹여 내가 아플세라 조심히 어깨에 내려앉는 손가락. 그에 보답하듯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려는 순간, 내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들킬까 봐머리카락 풀었네.
예쁘게 묶였던 그녀의포니테일대신, 허리까지 내려올 생머리가 느껴진다. 소소하지만 귀여운 수였다. 심지어 살짝 휜 머리카락은 묶었던 흔적을 완전히 지워주지도 못했다.
할 거면 완벽하게 하던가.
괘씸함이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아 내 무릎에 앉혔다.
"힉!"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연신하율.
"누구소리예요?"
"...."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비겁하게 소리로 혼란을 주시네."
그러니 달뜬 숨소리가 잠잠해진다.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얌전히 있는 그녀가 미치도록 귀엽다.
무어라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그녀의 귀가 어디 있을지 얼굴을 움직이며 가늠했다.
후각으로.
시야가 차단되어도 제일 달콤한 살 내음이 풍겨오는 곳을 찾으면 되었다.
스륵
내 이마에 누군가의 갸름한 턱이 닿았다.
"아, 여긴 목이구나."
후각으로 찾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어디 하나 좋은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없어, 꽃밭에서네 잎 클로버찾는기분이었지만..
잠시정체되었던곳에서 벗어나 차츰 얼굴을 움직이다 마침내, 작고 보드라운 것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때, 다시 거칠어진 숨이 내 목덜미를 달궜다.
"항, 항복.이제그만.."
신하율이속삭이며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슬며시 밀어냈다. 그 힘없는 반항이 내가학심을더 불러일으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오늘 저 이상하죠? 분명 평소엔 착한 동생이었는데."
"..."
"그냥 꿈 같아서 그래요, 이 모든 게. 원래 좋은 꿈은 누구나 길게 꾸고 싶잖아요."
"..너 많이 취했어. 다음 날 어떡하려고 그래?"
"누나는 그래도 넘어가 주겠죠. 너무 착해 빠졌으니까."
"내가?"
조곤조곤 걱정해주던 목소리가 순간 돌변했다.
"나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사람 아니야.그러니까..누나자극하지 말고 여기서그만해."
"그렇게 말하는사람치고나쁜 사람 없었긴한데. 화나셨으면 죄송해요."
이 정도 귓속말이 오갔으면 벌주를 얼마나 마셔야할까.
신하율을풀어주며 10초 뒤에 눈을 뜨니,입구에 나란히 선 채 내 입이열리기만기다리는 그녀들이 보였다.
내가정답을 맞히지못할까 봐 반짝이는눈들엔미안하지만, 게임은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1번 서윤 누나."
"아~"
"2번은."
정채민을 입에 올리며 게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찰나.
유독 간절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보였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신하율이내게 물어보고자 했던 게 뭐였는지.
그래서.
"2번하율누나. 3번 채민 누나."
"에이~ 서윤이는 잘맞추더니.. 2번이나였고 3번이하율이었어. 벌칙은뭘로할래, 세화야."
"질문 듣는 걸로 할게요."
"오키."
정채민은신하율에게은근한 눈길을 보냈다.
"뭐 물어볼 거야?"
".....이름."
"?"
나는 물론 모두가 의뭉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따가울 법도하건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나를 마주 보았다.
"네 진짜이름을 알고싶어.류세화말고, 원래 쓰던 이름."
"그게 왜 궁금해요."
무뚝뚝한 물음으로 응수했으나뇌리 한구석이비틀리는듯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거니까. 그래서 알고 싶어."
"...."
물러서지 않을 듯이 결연한 그녀의 눈을 보자,
"가까이 와요. 누나만 알려주게."
뭔 심정인지, 그녀에게 손짓해버리고 말았다.
낙동강 오리알신세가 된 그녀들의 반발은 잠시 후 내게 다른 걸 물어봐도 된다는 정도로 적당히 무마했다.
신하율이어느새 지척에 다가오자 일어서 그녀를 맞이했다.
이어 다시금 귓가에 입을 대었다.
"먼저 한 가지 알려줄게요. 지금부터 말해주는 건 내 진짜 이름도 아니고, 앞으로 불릴 일도 없을 겁니다."
"..알았어."
괜히 알려달라고했나? 하는심각한 표정의신하율.
나는 그런 건 아니라며 달래주었다.
"나중에 잊어버려도 상관없어요. 잊어버리면 더 좋고. 아무튼 이렇게 불렸어요."
묻어두려 했으나 먼지가 쌓이기도 전에 꺼내게 된 이름을, 입 밖으로 뱉었다.
3.
"백정(白丁)."
어두운 방한가운데, 여인은 삐딱하게 앉아 그리 읊조렸다.
심연과 같은 색으로 물든 동공이, 가정집 방바닥에 널브러진 젊은 남자를 향했다.
"그쪽이 생각해도 이상하죠? 그렇게 이쁘장한 외모에, 그런 천박한 별칭이 붙는다는 게."
뇌리에 번쩍 떠오르는 금빛 동공에, 여인은 마스크 속에서 조용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