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술자리의 꽃은 게임(4)
* * *
1.
"왜 백정이라 불리는지 관심없다구요? 아이, 그래도 들어봐요. 본인 운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알고 가야 덜 억울하지. 참고로 그 별명은 제가 붙였어요. 사실 붙인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뱉은 거지만.. 두 분 다재밌어하셔서망정이지, 어휴. 한국어로 이런 직업이다, 설명할 때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
남자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속상한 것과는 별개로, 여인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매듭짓는 걸 반복했다.
흠흠.
여인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려는 것처럼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손에 쥔 물건이 동화책 대신, 굵은 밧줄만 아니었더라면 꽤 훈훈한 광경이었을 터였다.
"이건 저의 슬픈 사랑 이야기이기도 해요.보자.. 몇년 전이었더라. 아, 기억났다. 보스가 비서를 한 명데려왔는데, 와.너무 잘생긴 거야. 심지어 모든 여자가 꿈꾸는 몸매의 총집합. 큰 키에 긴 다리에 넓은어깨에.."
"....."
"그럼 순전히 외모 때문에 반했냐? 그건 또 아니에요. 원래 여기 들어올 사람이 아니었는데 자기 어머니지키려 온거래요. 마음씨도 얼마나 착해요? 당신도 여자였으면 안 반하고 못배겼을걸."
'모처럼' 속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니 여인도 신이 나서 나불거렸다. 툭 까놓고 '모처럼'이라 이를 만큼 긴 기간은 아니었으나, 러시아에서 하루가멀다 하고그의 작업을 마무리지을 때에비하면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아울러 깔끔한 걸 선호하는 그녀로선,더는피와 살점이 난무한 바닥을 청소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게다가 유독 저한테 살갑게굴더라구요. 나 혼자만 동양인인 게 신기했나? 하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자기 아버지도 한국인이라 동질감 같은 거 느꼈다, 막 이렇게말하는거 있죠. 아무튼 그걸 계기로 좀 더 친해졌어요."
잇따라 저런남자와 연애해볼수 있겠다는 기대에하루하루가설렜던 나날이었다.
반면, 그것이 짧은 봄에 지나지 않았단 걸 곧 깨닫게 되었지만.
"하아..어쩐지보스랑 눈 색깔이 같더라니."
어느 날부터이상하게 만남이 뜸해지고, 결국엔 보스가 그를 소개한 순간 그녀를 포함한 모두가 마음을 접게 되었다.
피가 반 밖에 안 섞였을지언정, 그녀의 동생이었던 까닭에.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겨우내 다시 만난 그는 달라져 있었다.
눈가에 제 누나와 비슷한 표식을 새긴 건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보다 눈이 그녀와 닮아 있었다.
공허한 인형 같은 눈이 모두의 간담을 서늘케 했을지라도,자신만은그가 남긴 잔상에 홀려 있었다.자주는 아니나 이따금 보여주던 따스한 사람의 면모가 남아 있으리라 믿었다.
여인은 말을 멈추고 슬픈 눈을 보였다.
"이게 왜 슬픈 사랑 이야기냐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 멍청한 여자들과는 다르게, 나는 똑똑했거든."
"...."
바닥에 널브러져 미동도 없던 남자의 손가락이 꿈틀대자, 천천히 밧줄을 매듭짓던 손길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리고 왜 그분이 백정이라불렸냐면요."
"으..어."
"일단 칼을 누구보다 잘 써요. 심지어 가르쳐준 사람보다 더."
"다..당.."
"그리고 너 같이 거슬리는 애들이 나타나면."
여인은 밧줄을 들고 일어섰다. 이윽고 의자를 방 중앙으로 밀고서, 천장에 밧줄을 매달았다.
"말 그대로 도축을 해요. 산 채로, 죽을 때까지.폰다가그거 한 번 보고토했던가. 마음도 여린 년이 야망은 더럽게 많아요. 그분들이 귀엽게 여겨서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지 혼자만몰라."
여인이 뭘 하려는 지 알아챈 남자의 눈에서 물줄기가 흘렀다.
눈을 뜨니제 죽음이지척에 있다는 현실에, 한없이 무거운 몸으로도 기어가 도망치려 했다.
"안쓰럽네."
여인은 그의 발목을 간단히낚아채끌어당겼다. 남자는 목에 밧줄이 걸릴 때까지도 저항하지 못했다.
"살..려..제발요. 왜이러는.."
"인제 와서발 빼기는 아니지.민증보여줄 땐 언제고."
"민증이..무슨..소리."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노력했지만 나오는 건 뚝 뚝 끊어지는목소리뿐.
"섭섭하네. 마스크 내려주면 알 수 있겠어?"
남자의 흐리멍덩한 눈에 경악이 담겼다.
"그때..클럽가드."
"응. 덕분에 처리하기 쉬웠어. 그래도 너 복 받은 거야. 그분이 기억 찾으면 너부터 찾아왔을 텐데, 대신 내가 먼저 왔잖아."
남자는 잘못을 빌었고, 여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나저러나죽을 거면 차라리 나한테 죽는 게 제일 나아. 동생 때문에 열심히 한국어 공부하고 있는 누나도 곧 올 거고."
밧줄을 더욱 팽팽히 조였다. 남자의 목에 꼭들어맞게끔.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생명줄인 의자를걷어차기전, 여인이 말했다.
"대화 즐거웠어."
2.
유난히 술이 잘 받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대체로 속아 넘어가 주당이라도 된 것처럼 마셔 대기 마련이다.끝내는 알코올이 몸을 지배해, 일어난 다음 날 신께 자비를 빌며 기도하게 되는 것이 순리이고.
조금 전의게임으로한층 더 붉게무르익은 분위기 속, 나는신하율을제외한 그녀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원하는 질문 하나씩 하세요."
게임에서 진 대가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져야 했다. 되도록 정신이 조금이라도 또렷할 때 답변하고 싶었다.
방금 마신 소주에서 아무 맛도 안 나더라. 몸이 기억하는좆됨감지 신호였다.
"그러지 말고 손병호한번 할래?"
"손병호?"
연서윤의말에 몽롱해진 머리에서 기억을 뒤적였다. 옛적에 술자리를 가지며 얼핏 들어보았던 것 같기도하고..
"..뭐였죠 그게."
"봐봐, 세화야. 누나가 알려줄게."
그녀는 친히 내 손목을 잡고서 들어 올렸다.
"손가락 다섯 개 다 펴 봐."
"예."
"여기서 내가 남자 접어, 하면 네가접어야 돼. 그렇게 돌아가면서질문하다가먼저 다 접힌 사람이 지는 거야. 어때, 쉽지?"
"쉽네요. 근데 이거 하면 제 벌칙이 사라져요? 그냥 게임인 거 같은데."
"아니지."
연서윤의눈이 반달을 그렸다.
"혹시 19금 손병호라고 들어 봤어?"
"그냥 술이나 먹고 빨리 가자."
대화에 끼어든 쪽을 보자 엄한 표정의신하율이있었다. 19가 붙은 걸 보니 건전한 놀이는 아닌듯했지만, 나에게는 흥미로운 요소로 작용했다.
"일단 설명 한 번 들어보고요. 재밌어 보이는데."
"웅, 한 번 들어봐. 진짜 재밌어."
연서윤의 설명을 다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19금 손병호란 별거 아니었다. 그냥 야한 수위의 진실 게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세화야."
신하율은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왜 저러는지알 것도 같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지닌 사회적 통념에 속한 남성 상에 맞춰줄 수도.
그렇다고 게이처럼 여기 남자를연기해 줄수도 없어서.
"....."
왠지 슬퍼 보이는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흔들렸지만, 내 직감은 물러나선 안된다는 고집을부렸다.
걱정으로 글썽이는 동공에 담긴 건 여기 '남자'인 나였으니까.
신하율에게류세화란, 강하나 연약하고, 비위를 맞추며 자신이 지켜야 할 성별일 것이기에.그녀가 내 품에 들어왔든, 아니든 언젠가 거쳐야 했을 과정이었다.
너무 이르고, 어리석은선택일지라도. 내 본질을 먼저 보여주어야 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니.
그리고신하율이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올바름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란 걸 알려 주고 싶었다.
"괜찮은데요?"
"응. 재밌겠지? 좋아할 줄 알았어."
신이 난 기색의연서윤에게살짝 고개를 주억거려준 뒤 정면을 바라보았다.
작금의 상황이 전혀 내키지 않는 듯 입술을 작게 깨문신하율이손을 펼치고 있다.
저 손가락이 하나라도 접히면 기분이 나빠질 듯했다. 그 순간 이기적이란 단어를 절실히 깨달은 바람에 웃고 말았다.
"우리 세화, 오늘 웃는 거 처음 보네. 왜? 게임이 너무 쉬워 보여?"
연서윤이제 몸을밀착해온다.맨살의보드라운 감촉이 내 팔한쪽에눌어붙어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나는 웃음기를 지우며 대답했다.
"오히려 저한테 불리한게임 이긴한데..그냥재밌어 보여서요."
"너한테?"
"음...."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반응이 돌아온다. 내 외양과 평소 행실에 따른 업보였다.
다만, 특이하게도신하율만은어리둥절하며 고개를갸웃거렸다.
"네가...?"
"아 재미없게 벌써물어보지마. 그럼 나부터 세화 쪽으로 반 시계 방향으로 돈다?"
내 팔을 살포시 끌어안은연서윤이몸을 움직였다. 푸딩 같은 게 자꾸만 팔에 문질러지니 버틸 수가 없어 그녀를 밀어냈다.
"좀 떨어져요, 꼴리니까."
내 집까지 따라와 풀어줄 게 아니라면 쳐내는 게 맞았다. 게다가 오늘은신하율과같이 집에 갈 예정인데, 욕구 불만인 상태서 내가 뭔 짓을 할지 몰라 두렵다. 취할 대로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렇고.
킥킥거리는 소리에 옆을 보니연서윤이었다.
"아니..진짜이러면서. 아,진짜.."
통 웃음을주체 못 하는그녀를신하율이불만스레흘겨보았다.
그리 고까웠던 시선은 내게 닿자 사르르 풀렸다.
"취했어?"
"모르겠어요."
"..아까는 안 취했다며. 원래엄청 취하면자기 취한 것도모른다던데.."
신하율은한숨을 내쉬며 슬며시 일어나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내 상태를면밀히보려는 듯 순수한 움직임이었다.그 탓에 얇은시스루재질 안, 그녀 특유의 풍만한가슴골이부각되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괜찮으니까 도로 앉아요. 서윤 누나는 그만 좀 웃고요."
"흡, 아니 러시아 남자는 다 그러나 싶어서 너무 웃겼어. 미안해. 그냥 네가 특이한 거지?"
"궁금하시면 언제 날 잡고 가보세요."
"됐어. 어차피 러시아 가도 너 같은 애는 못 찾을 거 같아. 그리고 이따가 꼴리는 거 한 번만 더 할 건데. 괜찮아?"
"적당한 선에서 최대한 원하시는 대로 해볼게요. 어차피얻어먹는 입장이니까."
연서윤이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작할게. 다들 손바닥 펴시고."
그녀의 지시에 따르며신하율을보았다. 때마침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과 내 시선이 교차했다.
"그러면 첫 번째. 나는 이성과잠..아니다. 재밌는 건 제일 마지막에 해야지."
"마지막까지 손가락남아 있으면지는 거죠?"
"응. 너는상관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질 것 같은데."
말을 끝냄과 동시에 어디선가 픽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채민이 분명해 구태여 바라보진 않았다.
내 진심이 농담으로치부 되었다는게 조금 억울했다.
"이제 진짜 시작! 나는 이성과 키스해본적이 있다, 접어."
그 말에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내 전생과 지금을 통틀어 키스해 본사람은..한명뿐이네. 미나.
"하나 접습니다."
덤덤하게 말하며손가락 하나를내리자신하율의눈꺼풀이 질끈 내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