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술자리의 꽃은 게임(5)
1.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혀를 애무하는 행위를 키스라 일컫는다.
자신 있게 그경험의 여부를물었던연서윤은당연히 손가락을 접었다.
정채민도 청순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그 뒤를 따랐다.
그 광경을 본 내가 입을 열었다.
"첫 질문이 쉬워서 그런가. 저 포함해서 거의 다 접었네요."
굳이 성별을 치환해 따져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누구 하나 모난 사람 없이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들이었으니. 다만 예외가 있다면, 그런 그녀들조차 견줄 수 없는 외모의신하율이손가락을 접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나는 안 접었네요?"
기분이 좋아 꺼낸 말이나, 정작 당사자는 자존심이 꺾인 듯 어두운 낯빛이었다. 연이어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남자에 별로 관심이없어서.."
"그런 애가 클럽을 가셨어요?"
"...."
"장난이야 장난. 다 재밌자고 하는 건데 표정풀어.아니면 세화도 접어서 그래?"
연서윤이중간마다깐족거리는 탓일까. 그게 아니라면 모종의 이유 때문일까. 풀 죽은신하율을, 내가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접어서 기분 나빠요? 아니면 서윤 누나가 놀려서?"
"...아니, 나 그런 거에 신경 안 써. 그냥 내가 질 게 뻔해서좀.."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대신 마셔줄 건데. 약속했잖아요, 누나는반병만마시기로."
그녀에게서 뭐를 기대한 건지, 옅은 실망감이 두둥실피어올랐다. 불난 집에부채질하듯,연서윤이'클럽'을 언급하니 잊고 있던 게 떠올라 술만 마실 때처럼 마냥 기분이 좋진 않았다.
"제 차례죠?"
그래도신하율의온전한 손가락을 위안 삼아 게임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막상 질문을 던지려니 생각 나는 게 없었다.19라는 주제에 관한 경험이일천한까닭에, 고민을 거듭하다 상상력을불러일으키기에딱 맞는 질문을 하나 찾았다.
"이성을 집에 들여본 적이 있다, 접으세요."
"난 접어."
"나도."
"..그건 나도 있어."
"드디어하율이도하나 접혔네?"
본 형태를 꿋꿋이 유지하던 그녀의 손가락이 하나 접힌다.
남자를 집에 들인 적이 있나 보네.
나는 머리칼을 헤집으면서도 그 남자가 오직 나뿐일 거라 애써 믿으며 그녀에게 차례를 넘겼다.
"이제 누나가 질문해요."
"어..."
신하율의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술처럼 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성이랑손잡아본적 있는사람..접어."
"풋ㅡ"
"이건 너무 건전한 질문 아니야?"
그녀들은 타박하긴했지만 대체로 웃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후, 정채민의차례에서는ㅡ
"자기 집이나, 상대 집에서 해본 사람 접어."
"뭐를 해 봐요?"
술 덕분에 이해력이 떨어졌는지,말뜻을알아먹지못한 내가 되물었다.
"그거 있잖아.그..아, 너 앞에서 말하기가 좀 그런데."
"괜찮으니까말씀하세요."
"그성관계.."
그제야 알아챈 내가 고개를 까딱였다. 내반응이 무미건조 했던 탓인지정채민은 언뜻 황당한 얼굴이었고, 반대로연서윤이웃으며 물어왔다.
"세화는 집에서해본적 없어?"
"예."
"특이하네. 그럼 모텔 같은 데서 했나 봐."
"?"
"..그럼 차에서 했어? 아니면 설마야외..?"
경험 자체가전무하다고하려는 찰나, 아가리를 여물고 단서가 될 만한 표정마저 지웠다.
이걸 왜 하나하나 들어주면서 힌트를 주고 있었지.
"질문으로물어보세요. 어차피 누나가 먼저 끝나긴 하겠지만."
"맞아. 나 손가락 한 개남았지롱."
이내연서윤의의미심장한 눈이 내게 향했다. 취기로진작에 맛 가버린눈이었지만,지금만큼은이상하게 총명해 보였다.
"섹스해본사람 접어. 이제 난 끝!"
"....."
나는 찬찬히 눈동자를 굴렸다.
도중에 홀가분하게 게임을 끝낸연서윤이나, 예상대로 손가락을 접은 정채민도 보였지만.
내 희망이 실린 눈동자는 구르고 굴러,신하율의'변함'없는손가락에까지 도달했다.
나 이외의 남자와 입술을 맞대지도, 허리를 맞댄 적도 없다는 증거.
의식의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만족감에 눈꼬리가 절로 휘었다.
그러다,신하율과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딘가 새초롬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누나 놀리면 못 써. 그냥 기회가 없었던것뿐이고..또."
"제가 누나 놀리려고 웃고 있는 거 같아요?"
"..나 경험 없다고 그러는 거 아니었어?"
그녀의 말에 대답 없이 물을 홀짝였다.
이따금 맞닥뜨리는 이 세계의 괴상한 상식은 내게 불편함을 주곤 했다.하지만 지금은,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것처럼 내게 불안감을 주었다.
"좋아서 그래요. 근데 또 불안하네."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스스럼없이 남자와 노닥거릴까 봐.
내가 느끼는 게 설령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놓아주고 싶진 않았다.
"뭐가불안...어? 너 왜 손가락 안접어?"
"제가 왜 접어요."
"아니 서윤이가그..거해본사람 접으라고 했잖아."
순간 모두의 이목이 내 손가락에 집중되었다. 내가 접는 것을 보채는 듯한 분위기에 이끌려 순간적으로 그래도 볼까 생각 했지만.
"어떻게 접어요. 경험이 없는데."
"아, 그럼 재미없어. 솔직히말해야지."
"세화야. 지금까지 두 번만 봐서 잘은모르지만..누나가봤을 때는 전혀 아닌 거 같거든?"
도저히 못 믿겠다는 그녀들에 이어, 혼란스럽다는 듯 멍하니 있는신하율까지겹치니 수치심이 들었다.남자로서성인이라는 나이까지 무사히 안착했음에도,아다라는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게 쪽팔렸다.
그렇다고 왜 못 믿는 거냐며 짜증을 내는 건 억만금을 주어도 못할 만큼비참한 일이라,
최대한 표정 관리에 유념하며 짤막하게 내뱉었다.
"진짜입니다."
좆같네.
2.
별안간 일어났던 소동은 게임이 끝나자진정될 낌새를 보였다.
완전히진정되었다고 보기엔 좀 그런 게,날 보는 시선들이 미묘하게 달라졌긴 했지만어떻게 되었던끝은 났으니 다행이지.
하여튼 마지막 패자는신하율이었고, 벌주가 그녀의 앞에 따라지기 무섭게 내가낚아챘다.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신하율이기겁하며 말리긴 했지만, 거의 우기다시피내가대신 마셨다.
일전에 그녀의 것을 대신 마셔주겠다 약속했던 것도있고,
"너무 귀엽다 우리 세화. 누나 진짜 깜짝 놀랐어, 이미지랑 너무 딴판이라."
옆에서 쉴 새 없이 긁어 대는연서윤때문에 술을 안마시려야, 안 마실 수가 없었으니. 그 도발에 무시로 일관하자, 그녀가 아쉽다는 듯 장난을 멈추며 마지막 게임을 제시했다.
뱀사안사.
듣도 보도 못한 게임이라 내가 또 물어보니, 그녀 또한 내 몸을 예시 삼아 다시금 알려주었다.
"그냥 누나 말에만 대답해봐, 세화야. 뱀 살 거야, 안 살 거야?"
"뱀을 왜 사요."
내 엉뚱한 대답을 들은 그녀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 산다는 거지?"
"예."
"안 사면 벌주마셔야 해. 이제 반대로산다고해 봐."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 살게요."
"그러면ㅡ"
꼬옥.
연서윤이내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쉽게설명하자면..내가너한테스킨쉽을 해도되겠냐는 거야. 뱀산다는게 그런 의미고."
"겨우 이 정도로 안 마실 사람이 있을까요?"
"그래서어ㅡ갈수록스킨쉽강도가 높아지지. 내가 네 손을 잡았으면, 너는하율이한테적어도 안아줘야 해. 어때?"
"아니, 여자가셋이고 남자가한 명인데 그걸 왜 해? 내 위치를 봐봐 서윤아. 둘 다 여자라니까?"
정채민의 불만은연서윤이무언가 속삭이는 것으로 쏙 들어갔다.
"...."
알코올에 절인 뇌로 마지막 이성을 끌어올려 거절을 말하려 했다. 게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닌, 기름 같은 본능에 불을 붙이기 싫어서. 그리고 그 불길이 마지막에신하율을덮칠까 봐.
"고민하는 표정 귀엽다, 우리 세화. 싫으면 하지 말까?"
..그러한 결심을 품은 게무색하리만치,연서윤의미소를 보자 무언가가 끓어오른다.분명 같잖은 도발일진데, 냉철한 이성은 수면 아래가라앉았는지.
"하죠. 어차피 최대한 맞춰드리기로 했는데. 그리고, 누나."
재빠르게 자기 합리화를 마치고서, 얼빠져 있던신하율을불렀다.
"어?"
"이따가저 좀 잘챙겨줘요. 제가 이상한 짓 하면 받아주지 말고. 알았죠?"
"...."
신하율은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못 미더운태도지만, 그래도 나보단 정신이 멀쩡할 것 같으니 얼추 마음을 놓기로 했다.
3.
고민이 한 개에서 두 가지로 늘었다.
류세화의충격적인 선언을 추리하는 것에 더해서, 의미심장한 그의 말 때문에.
신하율은류세화의 접히지 않았던 손가락을 생각했다.
그가 진실을 말했다면 곁에 있던 여자들은 누구였을까.
또.
..자기 술 취하면 잘 챙겨 달라는 말에는 무슨 뜻이 숨겨져 있을까.고양이한테 생선 맡기는 게취미인 것일까.
"뱀살 거예요?"
"안기만 할거지..?"
"네,걱정하지마세요. 누나가 싫으면 안 할 거니까."
자기 몸을등한시하는 그의 성격을 숱하게 보았음에도, 도무지 그에적응할수 없었다. 그가선뜻 접촉해오거나 연인 사이에나 할 법한 호의를 보여줄 때마다, 때때로 의심하곤 했다.
일부러 여지를 주며 상대가괴로워하는걸 즐기는 성격인지.
"안을게요."
어느새 안겨 온류세화의몸은 딱딱하고, 뜨거웠다.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아랫배가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겨우 이 정도에 반응하는 야한몸뚱어리라니.
신하율은허벅지를안쪽으로꾹 조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 나빴어요?"
또 저 바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기분만 살피고 있다. 차라리 겉모습처럼 차갑기나 했으면 모를까, 겉만 늑대지 순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그에게 꼬리가 있다면, 제 의지완 상관없이 살랑이고 있을 것이다.
수북하고 포근해 보이지만 절대 잡아선 안 될 꼬리.
잡았다가는 화들짝 놀라도망가거나, 도리어 깨물거나, 무조건 둘 중 하나일 것이기에.
신하율은 순간의 감정으로 관계를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세화야. 정채민 넌 일로 와. 볼 뽀뽀하게."
"아, 십. 0.1초 안에 끝내라."
안 산다는 말은 안 하네.
신하율은역겨움을 참으며 그대로 시행했고, 정채민은연서윤에게욕을 내뱉으며 입술을 맞댔다.
"아, 토할 것 같아."
"네가 하자고 했잖아, 미친년아."
술에 취했는지 걸쭉해진 정채민의 말에도,연서윤은웃으며 받아치기만 했다.
'참 좋으시겠지. 어차피 세화가 안 산다고 하면끝인데...잠깐만.'
류세화가그럴 애였나.
신하율은설마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우리 세화, 뱀 살 거야?"
"일단 들어보고요."
"귀 대봐."
소곤소곤.
연서윤의속삭임을 들은류세화가앞머리를넘기며 중얼거렸다.
"위험할 것 같은데."
"왜ㅡ? 설마 아까처럼 또꼴..?"
"자꾸 자극하시네. 해보세요, 그럼."
대체 뭐길래 저럴까.신하율은얄밉게연서윤을쏘아 보다가, 그 '행위'가 이루어지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
그녀의 입술이류세화의목을 지분거리며 빨아들였다. 진귀한 요리를 음미하듯, 행위 도중 붉은 혀까지 보았다.
"자, 끝."
"아까 땀 흘려서 짤 텐데. 맛있게도 빠시네요."
"글쎄, 달달 하던데?"
"누나 미각이잘못된 거 같은데. 이게 맛있을 리가."
그의 목에서 입술이거두어지며,류세화가태연하게 휴지를 뽑아 목에 묻은 틴트를 닦아냈다.
그렇게 하얬던 피부에는, 붉은 자국이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떠한 여성이든 눈길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길.
또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수가 없는. 선명한 키스 마크를, 그것도류세화에게서보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해서.
"....."
신하율은 조용히 물 컵을 잡았다. 마시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감정을 표출 할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부르르ㅡ
자그마한 손에 쥔 물컵이, 격하게 떨렸다.
한 편, 술집 근처.
건물 반, 사람 반인 건대 근처를 열심히 수색하던이시아는한숨을 뱉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디로 간거야..진짜."
시간이 갈수록 초조함의 크기는 두 배, 네 배로 자라났다.
겁도 없이 여자 셋이랑 술을 마시러 간 그 남자 하나 때문에.
"하.."
지칠 대로 지친 이시아가 핸드폰을 꺼내 류세화의 전화번호를 찾았지만.
"....아니야."
묵묵히 바라보다 액정을 꺼 버리며 다시 그를 찾아 길거리를 배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