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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화 〉 낙인(1) (83/94)

〈 83화 〉 낙인(1)

1.

코앞의 고난과 역경에 한껏 숨을 들이마셔 보지만, 마주한 현실은 비참할 따름이라 가는 숨을 내쉰다.

초점을 잃은신하율의동공이류세화의얼굴로 향했다.

"....."

검은빛, 금빛. 색이 다른 두 쌍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위태하게 흔들렸다. 대강 보았을 땐 둘 다심하게 취한것 같아도.

류세화,신하율의눈에 이는 파동의 성질이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번에도 살 거야?"

"예."

류세화의 동공이 한계를 넘긴 주량 탓에 균형을 못 잡는 것이라면.

쪽, 쪽.

그의 목에 피어난 붉은 꽃을 망연히 바라봐야만 하는신하율의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미처 다스리지 못한 감정의 잔해가 마음을 새까맣게 물들인다.

류세화가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따가 저 좀 잘 챙겨줘요. 제가 이상한 짓 하면 받아주지 말고요.'

신하율은그의말끄트머리를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다르게 해석했었다.

'저 취하면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혹여 그녀가 기분이 나쁘지 않게 돌려 말한 것이 귀여웠다. 또한 그가 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사실에, 서로의간극이좁혀진 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왜 이렇게 돼버린 걸까.

"뱀 살래요?"

행위를 마친류세화가물었다.

신하율이이번에도 거절하면, 그는 세 번째 벌주를 마시게 된다. 거절한 이유도 단순했다.

그가 벌주를 마시게될지언정ㅡ욕망에 사로잡혀선 안 되었으니까.고작 품을 맞대는 것으로, 숨결이 살에 닿는 것으로도 달아오르는데.

목 키스보다 더한 걸류세화에게받게 된다고?

'...안 돼.'

신하율은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 여파가 본인의 추악한(?) 욕망에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그렇게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을 겨우내 유지하고 있을 무렵,류세화가테이블에 이마를 괴었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

그 삐딱한 자세는 목에 핀 열꽃도 훤히 내보이고 있다. 퇴폐적인 자태가 비로소 그의 진면모 같았으나, 애써 부정하며.

신하율은되뇌었다.

류세화가자신에게 일말의 호감이라도 있었다면, 저런 걸 감추려는 노력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최소한 자신을 이성으로라도 생각했다면, 적어도 이런 게임에 선뜻 응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언제까지 보호해줄거라 생각하는건데.

신하율은비교적 다른 여자들보다선하다고 생각했던자신에 의문을 품었다. 그랬다. 착해서 지켜준다? 그딴 건 남녀의 관계에서 무가치했다.

그리고류세화는, 자신을 이성이 아니라 단지 친한 누나에 불과하다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보고 집에 데려다 달라 한 거구나.

취할 대로 취한 너를.

"뱀말라비틀어지고있어요."

눈치 없이 재촉하는류세화에, 홧김에 뱀 사버린다고말할까도했지만.

"..안 살게."

"네."

"...."

신하율은허공에 주먹을 만들곤 머리를 콩콩 박았다. 그토록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이런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그러다 문득, 그의 목을 보았다.

이윽고 생각했다.

...저 키스 마크가 내 것이었다면 좋겠다고.

그저 아는 누나가 아닌, 여자인신하율로써저 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탁.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류세화가다 마신 소주잔을 내려놓았다.신하율을대신해 마신 벌주. 원래였다면 내심 기쁨을 느꼈을 것이나, 모든자초지종을알게 된 지금은 착잡할 뿐이었다.

이 개 같은 게임이 다시 시작되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연서윤이류세화에게무언가를 속삭였다.

이후, 고개를 끄덕이는류세화와승리자의 표정을 짓는연서윤.

"너희 일단 여기 있어."

연서윤이벌떡 일어서자 문 쪽에 있던류세화도느릿하게 일어섰다.

"....."

술자리에서 갑자기 자리를 뜨는 남녀의 의중 정도라면신하율조차꿰뚫고 있었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것. 그 외는 없었다.

신하율은태연한류세화를눈에 담았다.

행복, 사랑, 설렘그따위감정들이 깊숙한 침전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허나잔인하게도, 또한 사랑스럽게도.

"서윤 누나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는데, 누나들도 같이 가요."

바닥 깊숙이처박혔던감정들을 다시금자신에게 쥐여준다. 겉에 묻은 모래까지 털어주며 이번엔 떨어뜨리지 말고 잘 간직하라는 듯. 그가 몰래 나른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휘청하며 테이블에 손을 짚는류세화에단순히 그가 매우 취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도신하율은일어섰다.

이내 그에게달라붙으려는연서윤을쳐내고는,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손 치워. 내가 부축할 테니까. 아, 계산하고 나와."

류세화가다 털어놓을 때부터벙쪄있는연서윤의표정에신하율은배시시 웃었다.

2.

가파르게 흔들리는 시야, 제어가 안 되는 몸.

그렇게무의식적으로걷던 중, 팔에 부드럽고 물컹한 감촉이 전해졌다.

가늘게 뜬 눈으로 보니신하율이몸을밀착하고 있었다. 내 팔이 베개라도된 양아주꼬옥안고서.

이미 본능이 이성을 잠재운 상태라, 달리 제지는 하지 않았다.

대신물어보았다.

"안 더워요?"

"응, 밤이라 그런지 시원해."

그녀의 말대로 하늘은검푸른색이었다. 그리고 그 장막 뒤에 감춰진 수많은 별처럼, 길거리에는 사람이 우글거렸다. 확실히 그녀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족히 수십 명은 부딪쳤을 것이다.

"무겁지 않아요?"

"응."

"누나 가슴 닿는데 기분 나쁘지 않아요?"

"응."

앵무새처럼 답변하던신하율이돌연 내 허리를감싸고 되려묻는다.

"내가 이렇게 하면 기분 나빠?"

"아니요."

"...그래.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 말을 끝으로 추가적인 대화는 없었다. 그저 우리는 앞으로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편의점 앞이었다. 사람이꽤들락거리는데도 그 주위에 많은 남녀가 뒤섞여 담배를 피우고 있다. 번화가인 탓일까, 제약이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 앉자, 세화야."

신하율이빈 파라솔을 가리키며 의자를 빼주었다. 군말 없이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니, 익숙한 여자 두 명이 앞에 서 있었다.

연서윤, 정채민.

솔직히..따라오고있는지도 몰랐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굳이 사과할 정도까지는 아니라 연초 하나를 입에 물었다.

"어. 잠깐만, 그래도 아이스크림은고르고.."

연서윤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연초에 불을 붙이며 첫 모금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좀앉아있어야 할것 같아서. 아이스크림은 아무거나 골라주셔도 돼요."

"..너 상태 보니까 여명도 하나 사 와야겠다."

곧장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그녀들이 내가 눈을 감기 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옆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린다. 슬며시 눈을 떠보자왜인지내 곁에 남아있는신하율이었다.

내가 말했다.

"누나담배 안 피잖아요."

"계속 펴도 돼."

그 뒤로 몇 번이나 경고해도 한사코 거부한다. 본래라면 내가 먼저 담배를껐을 테지만, 알코올과니코틴으로 인한 몽롱함이너무나 매력적인 터라.

결국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연기를 멀리 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자국 많이 남았네."

내 목에 키스 마크를 본듯했다.

"테이프 붙이면 돼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흐릿한 시야를 닫았다.

그대로 어둠에 잠긴 채 담배만 태우는 중, 차갑고도 따뜻한 손가락이 내 목에 닿았다.

이후로 몇 번 문지르는듯하던손가락이 점점 목 전체로 뻗어나갔다.

기분 좋은 손길.

"이러면 어때. 기분 나빠?"

"아니요."

"이거는?"

허벅지에 무게감이 느껴진다.신하율이손으로 꾹꾹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누나가 저한테 뭘 하든, 기분 나쁠 일 없을 테니까 그만 물어봐요."

"왜, 안 나쁜 건데. 여자가 남자한테 이렇게 하는데도..왜."

애처로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서 나를 향한 원망이 비쳤다.

"누나니까..."

"..또. 내가 그냥, 그냥 착한 누나로만 보이지..."

뭘까, 갑자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일단 한 모금 더 빨고 생각해보자 했던심산이었는데.

"그럼 이건? 인제 내가 좀 다르게 보여, 세화야?"

내 물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녀의 손이 올라왔다. 기껏 가두었던 것이 풀려 나오며 뇌리에 스파크가 튀었다.

까득.

저도 모르게 씹어버린 연초를 끄고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나한테 어떻게 보이길 바라는데. 그럼 너는 남자라면 이렇게 끼 부리고 다녀?"

"...어?"

"물었잖아,하율아."

크게 놀란그녀가아무 말도 못 하자, 내가 이어 말했다.

"여자로 보이냐고 물었지."

가끔 혼동하긴 해도 그녀들은 명백히 내게 '여자'였다. 따라서 나도 예전처럼 그녀들을 대했다.

"맞아. 너무 그렇게 보여서 문제야. 그리고 누나는 나를 절대이해 못 할거고."

처음은 겉만 여자일 뿐이라고 대충 생각했다. 그런 방심의 대가로, 작금에는 의식의 뿌리까지 바뀌어버렸다. 저들은 진짜 여자라고.

성욕, 나도 남자니까 무조건 있다.

하지만.

전생의 구해줬던 여자가 떠올라서, 그녀들에게 걸린 이 최면을 악용하면 그들과똑같아지는거 같아서.

"....."

헛웃음이 나올 만큼 빈약하고,지랄 같은논리인 걸 안다.

아직도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의 핑계란 것도.

신하율의 커진 눈에 싸늘한 표정의 내가 보였다.

"세, 세화야? 마, 많이 취한 거 같은데?"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신하율의시스루상의 단추를하나하나풀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막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누나가 미안해, 그러니까이제그만.. 내일 일어나서 어떡하려고 그러는데.."

"인제 와서빌어도."

잠깐 행동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미약한 흥분에 비해 걱정이 압도적으로 컸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모를걸. 그때 클럽에서 나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아니, 대답하지 마. 남자랑 놀고 있었겠지."

"아, 아니야 세화야. 그건 정말아니..."

"못 믿겠네."

내 손은 단추 몇 개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신하율의시스루절반을풀어버리고서야손길을 거뒀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운신하율의얼굴 아래로, 내가 만들어낸 풍경이 보였다.

잔뜩 풀어 헤쳐진 상의.

브래지어에 갇힌 가슴은 눌러보고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였지만, 그건 지금 중요치 않았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상한 짓 하면 막으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건 막지 못한 벌로 치자."

"..누나한테 반말 그만하고, 우, 우리 잠깐 일어날까?"

"아직 벌 남았으니까 앉아."

조심스레 자리를 뜨려는신하율이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도로 앉혔다.

아까의 색기는 어디 가고,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신하율.

"그만해. 자꾸 이러면누나도....흐읏!"

그녀의 가슴 위쪽을 조금씩 빨고 씹기 시작했다.예상외로자극이 컸는지, 키스 마크를 남기는 중에도 떨림이 확연하게 와닿을 정도였다.

쪽.

가벼운 입맞춤으로마무리한뒤, 고개를 들었다.

"좋았나 보네."

가쁜 숨을 내쉬며 손을 물고 있는신하율.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기위해서였을까.

"끄...끝났어?"

"아니. 아직 남았어."

"...무서워, 세화야. 네가 술 깨도 다 기억하고 있을까 봐."

"나는 항상 무서웠어."

신하율이 내게 질려 떠날까 봐 두려웠다. 내가 단지 '호감이 있었던 남자'로 그녀에게 기억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방금 생각난 건데, 역시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또 뭘,흐읏..."

내 입술이 목에 닿음과 동시에 입을 막는신하율. 그 모습에 더 자극된 내가 연신 열꽃을 피워 올렸다.

한 세 개쯤 만들었나, 그때 입을 뗐다. 이윽고 만족스럽게 그녀의 목을 눈에 담았다.

"누나 의사도 안 듣고 이런 거 만들어서 미안해. 그래도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새겨지는 게, 낙인이야."

대답도 듣지 않고자세를 바로잡았다. 연초 하나를 새로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거 지우지 말고, 가리지도 마. 그러면 네가 클럽을 가든, 어딜 가든 다 알 수 있겠지."

누구의 것인지.

"....."

예상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야를 돌려보래도 눈꺼풀이 무거워 그럴 수가 없다.

그렇게 땅바닥만바라보던 중,

또각.

익숙한 하이힐이 내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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