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낙인(2)
* * *
1.
그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시아는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지켜보았다.
류세화옆에 앉아 추근거리는 여자. 그것을묵묵히 받아주며 여자의 가슴과 목을 지분거리는 것으로 되돌려주는류세화까지.
우두커니서 있던이시아는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기실, 꿈이 아니라 해도 분노 같은 감정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사랑 따윈 해 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데.
그렇게되뇌던이시아가순간 이를 악물었다.
그게 사실이면 자신은 왜 이러고 있을까. 속으로 던진 질문에 저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온종일혼자 안달 나서뽈뽈돌아다닌 결과가 저것이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
혹시몰라 옷을고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화장도 어느 때보다 공을 들였다. 부끄럽고 한심했다.
그리해서 얻은 건, 구두에 까져 쓰라린뒤꿈치와 자학을비롯한 어두운 감정의 온상이었다.이시아는경직된 얼굴로 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목적도, 이성도 가미하지 않은 무미건조한 걸음이었다.
또각,또각ㅡ
마침내 그의 앞에 다다랐을 때,류세화의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려는신하율과눈이 마주쳤다.신하율은어색하게 고갯짓하며 옷을 단정히 했다.
애석하게도, 짧은시스루는키스 마크가 선명한 그녀의 목을 가릴 수 없었다.
"....."
이시아는저게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감정을추스르려노력했다. 제가코앞에서 있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는류세화가왠지 야속했다. 그래서 작게 불러 보았다.
"류세화."
이름이 불리자 연초를 쥔 손길이 뚝 멎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에게서 무언가를 본이시아는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세요."
"너..목에."
아무리 숙맥이더라도 저게 뭔지 알 수 있었다. 하얬던 종이에 물감이라도 뿌린 것처럼 목에 번진 키스 마크.
"술 게임 좀 했어요. 그리고 거기 계시면 담배 연기 갈 텐데."
"재밌었어?"
모든 것을 내포한 질문에도, 류세화가 순순히 대답했다.
"예."
....재밌기는, 너무 취해서 사리분별도 못 하는건가.
그래, 이런 사태를미연에방지하려고 온 것이었다. 친한 누나란신하율은, 술에 약해서 그를 지키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
이시아는 멀쩡한신하율의얼굴을 곱씹어 보았다. 저번처럼 눈이 풀리지도 않았고, 앉은 양을 보아하니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시아는류세화를훑어보았다. 기대듯이 의자에 눕힌 몸. 나른해진 눈매 속, 뿌연 금빛 동공. 손가락에 끼운 연초는 피우는 것보다, 자연적으로타들어 가는게 많았다. 그를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모습이다.
'너도 흐트러질 때가 있구나.'
제 앞에선 늘 차가운 표정만내보이더니, 역시 '친분'이 있는 여자 앞에서는 다른가. 아니, 이제는 친분이라 보기에도 어려웠다. 하물며 키스 마크까지 남기는 사이라면.
연인이겠지.
"....."
이시아는 등을 홱 돌렸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어차피 그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단지 호기심이 동한 상대였을뿐...이지만.
'....속이 왜 이렇게 울렁거리지.'
류세화를멋대로 재단하여 환상을 품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이시아가 환상을 걷히고, 실체를 확인한 순간 비로소 어긋난 부위가 보였다.
그에게미나는어떤 존재였을까.
키스까지 하고서, 단순히 어장에 불과했던 여자였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시아는 싸늘한 얼굴로 뒤를돌아보았다.
"....?"
류세화의자리가 휑했다. 이시아의 눈에서 의아함을 엿본신하율이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시아씨라 하셨죠. 혹시 세화 찾으시는 거면 방금 편의점으로 들어갔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건대까지는어쩐 일로 오셨어요?"
"친구들이랑 놀러 왔습니다."
"아하,그러셨구나.."
곧바로 찾아오는 침묵.신하율은괜스레어쩔 줄 몰라 했고, 이시아는 딱딱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어색한 기류만이 흐를 때, 편의점에서 누군가 나왔다.
미동 없는 표정에 풀린 눈이 기이하게 어울리는류세화였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이시아의 본능한쪽을자극했지만, 그녀는 부축을 위해 나가려는 손을 꾹 쥐며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
"그전에 먼저 앉으세요."
"아니. 이것만 물어보고 바로떠날.."
"앉아요."
..저 고집도 주사의 일종일까. 이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류세화가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정작 그리 말한 본인은 앉지 않고 몸을 쭈그리려 했다.잘되지 않는지그가 짜증스레 말했다.
"몸이 좆도 말을 안 듣네."
거의 처음 들어보는 그의 욕설에, 이시아와신하율은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상태에서 뭘 물어본다 한들 유의미한 답은 얻기 어려울 듯했다. 이시아는 결국 이 안건은 다음으로미루기로 했다.
"출근할 때 물어보도록 할게.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두 번 말하게 하시네. 앉아요."
류세화는일어나려는 이시아를 앉힌 뒤, 그 옆의 빈 의자에 풀썩 앉았다. 이후, 고압적인 투로 이시아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구두 벗고 제 허벅지 위에 다리 올리세요."
"..그만. 네 주사 받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제가 직접 할까요?"
"하..."
류세화에게일러둔적이 있지만,원래 사람은술에 취하면 본성이 나온다 했다. 심지어자기 허벅지위에 다리를 올리라니. 저런 짓궂은 장난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았다.
"?"
"답답해서 제가 벗겼어요."
도대체 언제? 이시아의 매끈하게 뻗은 다리는류세화가붙들고 있었다. 그는 곧 구두를 벗겨내고, 제 허벅지로 다리를 올렸다.
"...뭐 하는 거야."
눈치 없이 얼굴에 띄워지려는 홍조를 최대한 감추며 짐짓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그런데도묵묵부답인류세화는,이내 주머니에서 봉지 하나를 꺼내 손으로 쫙 찢어 무언가를 꺼냈다.
'밴드?'
그때까지 이시아는 그가 무슨 생각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류세화가까졌던 뒤꿈치에 밴드를 붙였다. 감정에 휩쓸려 잊고 있었던 고통이 그제야 밀려왔다.
"이 지경 될 때까지 뭐 했어요. 진즉에 뭐라도 좀 붙이시지.미련하게.."
"....."
책망하는 말 밑에, 짙게 깔린 상냥함에.이시아는 금붕어처럼 입을벙긋거리며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 여자 누구야?"
그리고 그의 일행처럼 보이는 여자들이 검은 봉지를 든 채 다가오자, 이시아는 황급히 다리를 빼냈다. 그러한 뒤에, 붉어진 뺨을 슬쩍 가리며 구두를 신고 냉철함을 연기했다.
2.
"세화를 데려가요? 저희는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직장 상사입니다. 정 불안하시면 여자친구도 함께 가는걸로.."
"쟤 여자친구 없는데 무슨 소리세요."
"네? 아니방금.."
이시아와연서윤이투닥대는걸 안주 삼아, 그녀들이사 온바닐라 바를 맛보고 있다.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숙취해소제 병을 바로 세운 뒤,연초를 물고 불을 붙였다.
소음으로 다가오는 대화에는 내 이름이 드문드문 껴있다. '여자친구'니 뭐니 알 수 없는 단어도 연신 들렸다. 솔직히 그딴 건상관없고, 잠이 너무 간절했다.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일어섰다.
"뭐가 문제에요."
"아니 여기 이분이 자꾸 너 데려간다고 하잖아."
연서윤이이시아를 쏘아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로데려가시게요, 팀장님."
"그야당연히..네집이지."
"그러면문제없는데. 제가 지금 많이 졸리거든요."
"..세화야."
갑작스레 손이 붙잡혔다. 눈에서 미련을 떨치지 못한연서윤이었다.
"우리 '약속'. 지금 끝내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 그거."
확실히,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어서, 자신에게 불합리한 조건을 수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거슬리는 부분이 있긴 했어도, 나름대로 지금껏 고마웠으니.
"서윤 누나. 저희 내기 때 진 쪽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했던 거 기억해요?"
"..기억해.그럼, 여기서쫑 내는게 소원이야?"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연서윤이아리송한 얼굴로 물어왔다.
"그러면 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바닐라 맛 좋아해요?"
"좋아하기는 하는데 지금 그게문제가.."
저 쫑알대는 입이 시끄러워, 기습적으로 키스했다. 그녀의 뒷머리를 잡은 채 혀를 몇 차례 섞은 후에야 입을 뗐다.
"이걸로퉁치죠.누나는.. 솔직히제 취향이 아니라서."
끔찍할 정도의 수마가 찾아온 탓에, 금방 정리하고 집에 가고 싶어 벌인 일이었다. 사방이 정적이라 둘러보았다. 이상한 표정의 사람들. 번화가에서는 이런 일 정도야 흔한 거 아닌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닦아냈다.
"이만하면 만족했어요?"
"...미친."
연서윤이욕설을 내뱉었지만 일이잘못된것 같진 않았다. 나는 한국인이 좋아서 내는 '씨발'이나, 진짜좆같을때 내는 '씨발'이 구분 가능할 정도의 한국어 마스터니까.
"소원은 별거 아니에요.하율누나 클럽 데려가지 말 것. 그거 하나. 끝."
말이 끝나고. 그녀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눈물을 훔쳤다.
"진짜 미치겠네. 알았어. 마지막으로, 같이사진 한번 찍어도돼?"
"네. 근데 찍어서 뭐 하시게요?"
"나중에 군대 가서 자랑해야지. 이런 애랑 키스해봤다고."
"아."
뭔가 동병상련이일어군말 없이 그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확인한연서윤은내 뒤를 보곤 또다시 실컷 웃었다.
"잘 해봐,하율아. 마음고생은 좀 심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남자면 감내해야지. 아, 그리고."
그녀는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 진심이 담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아닌, 뒤쪽의신하율을향해서.
"미안했어, 지금까지. 그래도 우리 아직 친구인 거 알지? 그리고 방금 거는 내 잘못 아니다?"
연서윤과정채민은 그렇게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3.
"..잠깐 얘기 좀 해."
택시 조수석에 타려는 나를 이시아가 붙잡았다. 내 옆에 앉겠다고신하율과아웅다웅하던게조금 전인데, 뭔 할 말이 또 남아서 붙잡는 건지.
"그냥 제가 여기 타는 걸로 얘기 끝났잖아요."
"아까 뭐였어.그..키스말이야."
"키스가 키스죠. 뭐 더 있어요?"
".....그러니까. 왜. 걔한테 키스했냐고."
나는문고리에서손을 떼고 이시아를 마주 보았다.
"빨리 집 가서 자고 싶은데, 안 놓아줄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제가 누구를 설득할 만큼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고. 그냥 몸으로 때운 거죠. 그러면 좀 빨리 해결될 것 같아서."
"너는진짜.....하."
이시아가 먼 곳을 응시하며 머리를 넘겼다. 어째 내가 앞머리를 넘길 때와 비슷해 보인다.
"네여자친구는..."
"아까부터 무슨 여자친구를 찾으시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기사 분이랑 누나 기다리니까 나중에 물어보세요."
그리 말하곤 조수석에 탔다. 문을 닫기 전, 미궁에 빠진 듯한 이시아의 표정이 떠올랐으나 곧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렇게 택시는 출발했고, 나는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 야경만큼 예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너 앞으로 누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지 마. 그리고내일.. 너술 깨면 진짜 혼낼 거야."
목소리는 신하율의 것이었다. 눈꼬리가 휘었다.내가 했던 생각이었는지, 말이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다시돌려받는기분이었다. 알았다고 답한 후 다시 야경을 눈에 담았다.
고요한 차 안과대조되는야경이, 나를 황홀한 꿈에서 끄집어내었다.
"이번엔잘살아 보고싶었는데. 놔두지를 않네."
러시아어로 짤막하게 푸념했다. 그씨발같은 단체에만 들어가지만 않았었다면, 번역 같은 일로도 소소히 먹고살았을 텐데. 평범하고 심심한 생각이었다.
"아이고. 잘생긴 총각이 힘든 일이 많나 보네. 여자 문제인가?"
"그 정도 일이면 이렇게 청승 떨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답하고, 창문에 고개를 기대었다가.
"러시아어 할 줄 아세요?"
돌연, 운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짝빛이 바랜은발. 곁눈질로 나를 보는 푸른 동공.
"당연히 할 줄 알지요. 내가 러시아 사람인데."
택시 기사가미소를 자아냈다.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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