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 낙인(3) (85/94)

〈 85화 〉 낙인(3)

* * *

1.

집을 향해 달려가는 택시 안.

"총각은보니까.. 혼혈같은데. 부모님 중에 어느 분이동양인이신가? 일본? 한국?"

"아버지가 한국 분입니다."

사진에서 보았으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택시 기사에게서 난데없는 외국어가 튀어나오자뒷자석이조용해졌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그녀들이라도, 질문의형식을 띤뉘앙스라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세화야.기사님이뭐라셔?"

"저한테여쭤보시는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백미러를 확인한 기사가 싱긋 웃었다.

"디게 이쁜아가씨네. 그 옆에 도도해 보이는 처자도 그렇고. 아무튼 걱정들 안 해도 돼요. 설마 내가 이 총각한테 수작 같은 거 부릴까 봐서?"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 뭐라 하셨는지 그냥궁금해서.."

"알어요,알어. 생긴 그대로 성격을 빼다박었네.순둥~순둥 한게."

기사는 장난이라 말하며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와중에도 곁눈질로 나를 훑는 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고국 언어를 들으니까 반갑네. 이 총각이랑 러시아어로 대화 좀 해도 되지요?"

그 말에신하율은 물론 쥐 죽은 듯이 있던이시아까지얼떨떨하게 수락했다. 그제야 기사는 속 편히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쟈들이랑무슨 관계요? 술 취한 남자 한 명에, 여자 둘이라 총각 걱정이 좀 되네."

"괜찮습니다. 그냥 친한 누나들이에요."

"뭐, 총각이그렇다면야.."

어디를 가나 마주치는 걱정이다. 전생이었다면 부러움을 금치 못하는 눈길들로바라봤을텐데. 나에게만 국한된 개념이란 게 살짝 안타깝다.

기사가 내 목을 슬쩍 보고 시선을 돌렸다.

"이런 말 하면 총각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님이 걱정 안 하시나? 이렇게 잘생긴 아들이 그러고다니면..음."

"아마 화내셨겠죠. 술을 뭐 그렇게 먹고 다니냐면서.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그 잔소리가 그립네요."

나는 내 부모님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직도눈앞에아른거리지만, 외람되게도 다신 볼 수 없는 얼굴들이다. 그렇다고 우울한 과거에 매몰되어 있을 생각은 없다. 단지 평생 안고 가야 할 마음의 짐이라 생각할 뿐.

"음. 내가혹시.."

기사가 말에 뜸을 들였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괜히 기사님한테 불편을 안겨드리고 싶지도 않네요."

"조금, 아니 좀 많이 의외네."

"어떤...?"

"총각 말이에요. 겉만 보면 절대 그렇지 않을 거 같은데, 뜻밖에 예의가 발라. 생각도 깊어 보이고."

왜 이리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나. 나는 시트에 몸을 푹 묻고 부정했다.

"실제로는 개차반이에요. 이기적인 데다가, 생각도 없이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제가 여기 남자라 그런지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는 경우도 많고요."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자네가 그런 성격이면, 이런 아줌마 말에 정성껏 대답해주지도않았겄지."

아줌마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기껏 많이 쳐줘 봐야 삼십 대 중반이나 될듯한 외모. 서양인은 노화가 빠르다고 하던데 이례적인 일이다. 아니면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그런 상념이 들던 와중, 나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졸려서 뒤질 거 같은데.'

그런데도 대답은꼬박꼬박하고있지 않은가. 곰곰이 그 이유를 되짚어보다 기사의 머리카락 색에 시선이 갔다. 해답을 찾은 탓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웃긴 일이라도 떠올랐어? 웃는 것도잘생깄네."

"그게 아니라 누구 생각이 나서요.기사님이걔를 너무닮아서저도 모르게."

"걔?"

"미나라고, 학교친구예요."

"고등학교 친구?"

기사의 되물음에 일순 내 표정이 굳었다. 내 진짜 나이가 성인일지라도, 이곳에선 미성년자로 취급된다는 걸 깜빡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기사는 되려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뭐 나도 러시아 살 때는 총각보다 어릴 때부터 술 마시고 그랬어. 그 나이면 미리 마셔 볼 수도 있지. 더욱이 본의 아니게 자네 혼잣말도 들어서."

조그맣게 한탄했는데.

그 작은 소리를 들었네.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사가 정면을 보는 것으로 상황은일단락되는듯 보였다.

"그런데, 총각."

잠시 후.

날 부르는 목소리에감기려는 눈이 슬쩍 뜨였다. 수마가 밀물처럼 몰려왔으나, 진지해진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버텨보기로 했다. 미나를 닮은 기사의 외모도 그 판단을내리는데 한몫했다.

작게 하품한 내가 대답했다.

"네."

"혹시 운동 같은 거 해본 적 있나? 가령복싱이라든지, 격투기라던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내 겉모습이 싸움이나 일으키고 다닐 망나니처럼 보이기라도 했나. 그렇다 쳐도 보통 남자에게 저런 걸 묻지는 않을 텐데.

질문의 의도를 괜히 추리해보려다, 이내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염병할 술.

오랫동안 쓰지 않은 기계를 작동하려는 것처럼, 알코올에 녹슨 사고가 삐걱거렸다.이 때문에 딱딱한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귀여운 여자애 한 명이 떠올랐다.

"음."

나는 말없이 웃었다. 그에 관한 에피소드를 꼽자면 슬픈 것들이 먼저 떠올랐어야 정상인데. 왜 다른 감정이 먼저 부유할까. 술 때문인지, 즐거웠던 기억이 앞섰다.

"해본 적 있죠.한때는거기에 미쳐 살았기도 했고."

"대단하네. 그러면 누구 가르치기도 하나요?"

"아까 제가 말한미나라는친구. 요즘 걔 가르치고 있어요."

"오."

분명 흥미롭다는 어조인데, 정작 기사의 눈은 덤덤했다. 못 믿는 눈치였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어차피한번 보고 말사람이니까. 그렇기에,꼭꼭 눌러온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설파하고 싶었다.

"좀 더 들어보실래요? 애가 되게 바보 같아서재밌으실 거예요."

그제야기사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그녀의 미묘한 웃음을, 나는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그쬐깐한애가. 아니 170 정도면쬐깐한건 아닌가. 하여튼 저를 지켜주고 싶다고, 얼마나 난리를 치면서 가르쳐 달라 떼를 쓰는지."

"그래서?"

"당연히싫다 했죠."

"귀찮아서요?"

고개를 저었다.

"제 전철을 그대로 밟을까 봐 걱정했어요. 지금은 멀쩡해도 심하게 다쳤었거든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굳이 느끼려 하지 않아도 기사의 시선이 내 어깨를 쫓는 것을 알았다. 연이어 살짝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들렸다.

"고집이 셀 텐데. 그래도 어떻게 되긴 됐네."

"걔 고집 센 건 어떻게 아시고."

나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어째성당에서 고해성사하는것 같은데, 막상 용한 점쟁이 앞에 선 기분이었다.

"못 할 짓많이 했는데. 넌 안 된다고 모욕도 줘 보고. 깔보고, 무시하고."

눈을 감으며 앞머리를쥐어뜯듯이쓸어 넘겼다.

"아직도 후회해요. 그때 모질게 굴지 말걸. 그냥 적당히 장단만맞춰줄걸. 병신처럼 굴어서 상처 주지 말걸."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흉터로 남았을 기억. 조용히 눈을 떴다. 운전에 집중하는 기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입이 열리고 의외의 가정사가흘러나왔다.

"딸아이가 하나 있어요. 남편이랑 이혼하고 유일하게 남은 제 보물.엄마로서애정을 많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 드는 아이."

"지금은 재워두고 오셨나 보네요."

기사의 젊은 외모를 본다면 필시어린아이일터였다. 기사가 픽 웃음을 뱉었다.

"그렇죠.재워두고일하고 있죠."

"아이는 좀 어떤가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이혼했으면.."

"많이...아팠을 것 같아요.웃는 날보다 아빠 찾으면서 우는 날이 더 많았으니까."

"왜 이혼하셨는지여쭤봐도될까요."

"남편의윈드."

바람.

무거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말장난이었다.억지 웃음이라도지어보려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어릴 때는 저 없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총각은 어때요? 여자애가 그러면정떨어지지않아요?"

"저도 많이 울었었는데요 뭘."

"다 큰 여자애가 그러면?"

"괜찮아요. 저도 그랬으니까."

나는 고개를 완전히 젖혔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올랐다.그런데도또렷한 기억이, 비수처럼 가슴을 헤집었다.미나의눈에 맺혀있던 눈물.

"기사님이 말씀하시는아이랑 제미나랑 닮았네요. 쉽게 우는 거부터 외로움 타는 것까지. 기사님이랑 외모도 똑 닮았고."

"....."

"창문 좀 열어도 돼요?"

기사는 말없이 버튼을 눌렀다. 훤히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밤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참 어리석어요. 뭐가 좋다고 날 따라다닐까. 정작 제 몸도 하나 건사 못하면서."

"그 아이가 일방적으로 총각을 좋아하는 편인가 보네."

"한때는그랬는데."

창밖으로고개를 살짝 내밀어 하늘의 달을올려다보았다. 미소 지었다. 어딜 가도 네가 있다는 생각에. 내가 살아있는 한, 너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아이 머리 색이 꼭 달빛 같아요. 옛날에 밤이 싫었던 적도 있었어요. 외롭고 우울하니까. 덩달아 달도 끔찍하게 보기 싫었는데."

어지러운 방 안. 굴러다니는 술병들. 시체처럼 누워만 있던 나.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지금은 달이 보고 싶을 때가 더 많네요."

이후 눈을 감았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드는 걸 느끼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2.

"아가씨들 일어나요, 일어나. 도착했어요."

"어으, 네.도착했나요. 기사님?"

기사의 부름에 벌떡 일어난신하율.

연이어이시아도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곤 언제 잤냐는 듯 뻔뻔한 자세를 취했다.

"전 안 잤습니다. 이 카드로 계산할게요."

"그래요. 총각도 좀 잘 챙겨주고. 많이 취한 거같더만."

"네, 감사합니다."

순식간에계산을 마치고뒷좌석에서일어난 그녀들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신하율이곤히자는류세화를조심히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세화야. 도착했어."

류세화가슬며시 눈을 떴다. 흐릿한 형체, 낯선 공기. 쏟아지는 졸음에 다시 자려는 찰나, 누군가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정신 차려."

"아. 팀장님."

불만스럽다는 듯 한껏 눈매를 찌푸린이시아였다. 앙칼진 고양이 같네. 내가 눈꼬리를 살짝 올리자 그녀가 툴툴거렸다.

"웃지 마. 술도 적당히 먹어야지. 부하 직원이라 챙겨주는 거야. 안 그럼 너 큰일 날 수도 있었어."

".....시아씨. 어감이 좀 그렇네요?"

"뭘요?"

"큰일 난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쭉 제가 옆에 있었는데."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죠."

"지금 그말...."

신하율은말을 하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떠드는 사이,류세화가저 멀리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그녀들은 시선을 맞추며 암묵적인 휴전을 하고는, 그의 양쪽 팔을 잡았다. 그렇게 걷던이시아가생각했다.

'....말하는 것도 멀쩡하고, 표정도 원래 그대론데. 왜 몸은 못 가누는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어찌어찌 그의 집 문 앞까지 왔을 때 한시름 놓은이시아. 이제 집에 갈 수 있겠구나.

류세화가도어락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띠ㅡ

띠띠띠ㅡ

"?"

"분명히 맞게 눌렀는데."

이시아는 연신 들리는 경고음에 보다 못해류세화에게물었다.

"비밀번호 뭐야."

"1234."

"미치겠다, 진짜. 남자 집 비밀번호가 왜 그래? 나중에 무조건 바꿔, 너."

머리를 싸맨 건신하율도마찬가지였다.

문이 열리고집에 들어선류세화가유유히 화장실로 향했다. 간단히가글을마치고 따라 들어오지 않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세요."

"됐어. 뭐 차 같은 거 대접할 생각이면 하지 말고 얼른 자기나 해."

"나도 괜찮아."

"그게 아니라, 시간이 늦었잖아요."

어눌하지도 않고 멀쩡한 어조.

평소와다름없이무표정한 얼굴로,류세화가그녀들을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고 가요."

3.

이시아와신하율은사이에류세화를두고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걸까.'

계속해서 자고 가라는류세화의 제안,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조금 전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늦어서 그래요. 걱정도 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빨리자....어? 야, 팔잡아당기지...'

......여기까지.

이시아가몸을 뒤척였다. 안 그래도 좁은 침대에서 세 명이 함께 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이시아는등을 돌리고 자는류세화에게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좁은데 옆으로 가줄 수있.... 혹시자?"

.....자고 있네.

이시아는부끄러움을 참으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나 그럼 옆으로 잘 거야. 네 허리에 손 올리고. 그래도 돼? 대답 없으면 진짜 그렇게 한다?"

진짜, 여러모로 여자 힘들게 한다.이시아는한숨을 내쉬며 슬금슬금 그의 허리에 팔을 올렸다. 쳐낸다거나 하는 움직임은 없어, 그대로 안착한 가녀린 그녀의 팔.

"....몰라, 다 네 탓이야."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꼬옥안았다. 이제야 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이시아는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다물고 핸드폰을 켰다.

택시에 탈 때부터 켜두었던 녹음 기능을 끄고, 푹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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