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 낙인(4) (86/94)

〈 86화 〉 낙인(4)

* * *

1.

짹짹ㅡ

환히 열린 창문으로 새 소리가 침투했다. 순간적으로 달갑지 않다고 생각했다.눈 부신 햇살도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로 눈을 가리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뇌리를푸욱찔러와 조그맣게 비명을 내질렀다.

".....와."

욕도 안 나올 정도로 심한 두통은 내가 잠에서 깼다는 걸 인지하기에 충분했다. 이 몸으로 일어난 첫날이랑 엇비슷해데자뷰가일었지만, 조목조목따져보자면 상이하게달랐다.

일단손발이벌벌 떨리고. 이마에는 식은땀 한 줄기가 흐른다.

미친 숙취.

결국 신에게 기도하게 될 걸 알면서도퍼마신내가 잘못이고, 엄청난 죄인이었다.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던 와중, 라면냄새가 '맡아'졌다.

'....?'

내집에서 왜 라면냄새가 날까. 덧붙이자면 일부러 맡는것과 맡아지는것에는 크나큰 차이가있다....

"아 진짜!시아씨. 라면 안 끓여봤어요? 면부터 넣어야지,스프부터넣으면 어떡해요."

"그게 무슨 어이없는논리... 방식의차이죠. 누구는 라면 안 먹어 본 줄 아시나. 저도 소싯적에 라면만 먹고 산 적 있습니다."

"랍스터 넣은 라면은아니구요?"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사방을 소리 없이둘러보았다. 익숙한 주방, 매우 눈에 익은 탁자. 내 집이 맞다. 마지막으로 이불을 더듬어 보려는 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고 말아,신하율이이쪽을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좀 더 잘래?"

그 상냥한 말투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이윽고신하율은물 한 컵을 따르더니, 사뿐히 내 앞에 허리를 숙이고 섰다.

"목 많이 마르지. 이거 마셔."

수줍게 내미는 컵을 받아 들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기대가 어린 그녀의 예쁜 눈동자. 그리고 그녀의 목에 내가 남긴 자국.신하율이내 소유물도 아니고, 어째서 키스 마크에 '낙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는지.

다음.

이시아는차가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그에 대해선 대략 감이 잡혔다. 술 취한 내가진상을 부려서기분이 안 좋겠지.이편은나중에 짚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신하율.

술에 취해 치태를 부린 것이라 해도 내가 뿌린 씨앗이었으니 거두어야만 했다.

"근데 세화야, 혹시 어제일....."

순간, 참 절묘하게도 끔찍한 두통이 밀려와 눈을 찡그렸다. 자칫하면신하율에게어제 일을 언급하는것에 대한 언짢음으로비춰질 수도 있어, 급히 표정을 거두려 했으나.

".....아니야. 많이힘들 텐데쉬어."

내게 변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미소 뒤에 깊은 실망을 감춘신하율이돌아서려 했다.

텁ㅡ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뿌렸으니 거두어야 한다, 그딴필요에 의해서한 행동이 아니라.

그녀를 이대로 등 돌리게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무턱대고 저지르긴 했어도,신하율을안도 시킬 시간을 끌어야 했다.

".....누나."

우선 찡그렸던 표정을 최대한 살갑게 만들었다. 사건의 발단부터 만회해야 했으니까.

끊이지 않는 두통.

그 덕에 고통과 미소,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내 얼굴에 한데 어우러져 있을 터였다. 그녀도 괴상함을 느낀 건지 넋이 나간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내 눈매가 눈매라, 가뜩이나 차가워 보이는데 기이하진 않을까.

나는 찡그린 눈을 최대한 웃음으로 포장하고자 노력하며신하율에게첫인사를건넸다.

".....잘 잤어요?"

2.

자그마한 식탁이라도 세 명이 앉기는 충분한 크기였다. 심지어 가녀린 체형의 여자 두 명. 쾌적한 식사를 하기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묵묵히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진지한 부름이 날아들었다.

"류세화."

"예."

고개를 들자이시아의심드렁한 시선과 마주쳤다. 사과는 이미한 지 오래다. 고개만 숙이는 것으로 그녀의 기분이 풀리는 것 같지 않자, 사례를빌미 어서밥까지 사준다고 했고. 그 이후에야이시아의귀가 좋다는 듯 쫑긋거리는 걸 본 게 조금 전인데, 또실수한 게남았나 싶어 신경을 조였다.

"맛있어?"

"?"

"이거."

식탁 중앙의 냄비를 가리키는이시아. 고작 저거 물어보려고 그토록 분위기를 잡았나. 그렇다고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맛있어요."

"이거 거의 다 내가 끓인 건데."

"네."

"....."

무언가 부족하다는 눈치라 과장을 보태어 칭찬해 보았다.

"팀장님이 끓여주셔서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속이 좀 풀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랍스터만 먹고 사실 것 같은데, 라면도 잘 끓이시네요."

"그놈의랍스터는...."

"옷도 전부 명품에외제 차끌고 다니시니까요."

"됐어, 빨리 먹기나 해. 눈 밑에다크 서클까지생겨 가지곤."

구시렁거리면서도이시아의입꼬리가 작게 씰룩거렸다. 아, 기분 좋아졌나 보다. 까다로운 고양이의 비위를 충족시킨 내가 다시 라면을 먹으려는 찰나였다.

"하율씨도 맛있죠?제 라면."

".....네. 근데 저도 잘 끓일 수 있었어요."

분한 듯 마지못해 답하는신하율, 그런 모습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는이시아. 마치 기 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

잠에서 깨어난 직후 얼핏 들었던 그녀들의 대화를 조합해 추론해본 결과,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은 까닭이었다.

'고작 라면 잘 끓이는 게 뭐라고.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제멋대로 변하려는 표정을 갈무리한 뒤, 다시 밥에 집중했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속은 멀쩡하다. 역시 러시아 피는 못 속이는 건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두통에오바이트까지겹쳤으면 등교는 고사하고, 침대에서 골골거려야 했을 테니까.

식사가 끝나간다고 여길 무렵, 젓가락을 내려놓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들도 수저를 내려놓았다. 문득 이시아에게 궁금한 게 생겼다.

"혹시 라면 몇 개 넣으셨어요?"

"세 명이라 세 개끓였는데....다시사 놓을까?"

"제가 쓰레기도 아니고 설마 그럴까 봐요. 그냥 감사하다고 하고 싶었어요.삼 인분만들기 힘드셨을 텐데."

"고작 이거 가지고 뭘."

"어쨌든 저 때문에 집도 못 가시고고생하셨습니다... 누나. 설거지 제가 할 거니까 놔둬요."

은근슬쩍 그릇에 손을 뻗는신하율을제지했다.

"내가 할게. 너 몸도 안 좋잖아."

"누나가 그러면 몸보다 마음이 더 안 좋아요. 아. 어제 챙겨줘서 고마웠어요. 이걸 이제야 말하네."

슬슬 잡담은 그만두고 등교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껏 없었던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허리와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잠을 잘못 잤나. 몸이 왜 이렇게 결리지."

움찔.

누군가가 내말에어깨를 움츠렸다. 저 반응을 보니 내가 그녀의 잠버릇에 희생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최소한 껴안고 자지 않는 이상 이렇게 몸이 결리지는 않는다.

범인을 응시할수록,재롱부리는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절로 눈매가 휘었다. 귀엽다는 소리다.

"팀장님. 곰 인형 좋아하세요?"

".....아니."

"그러면 침대가 좁아서 그러셨구나."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새빨개진 귀라도 숨기고 말하지. 신빙성이 전혀 없네.

그래도 전적으로 좁은 침대에서 자고 가란 내가 잘못이었기에,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3.

신속히 샤워를 마치고, 교복을 입고, 목에 테이프를 붙이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렇게 현관문 앞.

"잘 다녀와, 세화야."

"여기가하율씨 집인가요.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게."

"....왜 또 사람 무안하게."

"나중에 출근할 때 보자."

신하율과핀잔을주고받던, 아니 일방적으로 패던 이시아가 내게 인사했다. 그녀를 잠깐 째려보던신하율도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나를 배웅했다.

꼴이 꼭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들 같기도 해, 마주 웃어주곤 길을 나섰다.

해가 높다랗게 뜬 날씨는 쨍쨍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너무 덥다는 것. 달걀이 아니라 사람을 세워 놓아도 녹아내릴 만한 더위였다. 이렇듯, 여름의 햇빛은 관상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숙취에 시달리는 몸을 이끌고서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도착했다.

내 앞길에 먹구름이 꼈다 해서, 혹은 그로 인해 위협을느낀다고 하여도집에 숨어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바를구하려 해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니까.'

지금 직장이 특수한 경우일 뿐, 그에 안주하고 미래에 대비하지않으면.....?

끼기긱ㅡ

책상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생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내가 낯설어서였다. 문득 빈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연유를 알고서 정면을 향해 턱을 괴었다.

"......하."

그녀들을 향한 감정이 커진 탓일까,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것이니 감내해야지.

"세화야!"

가시지 않는 두통 속, 익숙한 목소리가 구원처럼 다가왔다.

미나의찰랑이는 은발이 내 시선을잡아끌었다.

"왔.. 손은 왜 그래. 뒤에 뭐 숨겼어?"

"응? 아냐, 아냐. 근데 너 어디 아파? 낯빛이 안 좋네. 여기 목에 테이프는또..."

"그냥, 몸살."

"진짜? 그러면 학교 나오지 말고 푹 쉬지. 열 나나?"

울상을 지은 미나가 내 이마에 손을 대었다. 필시 무언가에서 빌려온것일 차가운온도가 좋았다.

"졸업장 따야 너 먹여 살리지."

초췌할 것이분명한 미소를지어줌과 함께미나의손을 잡았다. 그대로 내 볼에부비며시원함을 만끽했다. 최대한 꼿꼿이있어 보려했는데, 얘 앞에서는 그게 잘 안 되네.

나는 아예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가 아닌 미나가 내 볼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런 거 좋아해?"

"싫어하는 사람 찾기가 더 힘들걸."

"너 지금 강아지 같아."

"칭찬이야 욕이야?"

"위험한 칭찬에 가까워."

위험하기는.

나는 그녀가 좀 더 편히 쓰다듬을 수 있게 머리 각도를 조정했다. 이후에신하율에게톡을보냈다.

류세화: 집 잘 들어갔어요?

괄목할 만한 속도로 답장이 돌아왔다.

신하율: 응응. 너는 학교야?

류세화: 네. 누나 혹시 이따가 공원에서 만날 수 있어요? 좀 오래 걸리는 얘기라 만나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신하율:ㅜㅜㅜㅜ어떡하지. 누나 이번에 논 대신에알바대타 뛰어야 하는데. 오늘 애견 호텔에서 마루도 데려와야 하고, 누나도 진짜 진짜 시간 내고싶은데...

류세화: 무리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럼 언제 만날 수 있어요?

신하율: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이따야간하고하면 목요일?

하필 목요일. 어째 계속해서 꼬이는 느낌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답신은 당연히 긍정이었다.

신하율과나의 관계를가급적빨리,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연이어타투이스트에게일정을 미룰 수 있을지 정중하게물어보는중이었다.

"누구랑톡해?"

"타투이스트."

미나의질문이한발 늦은덕분에 솔직히 답할 수 있었다.

"....여기서타투를더한다고?"

"나 손가락에 흉터 있는 거 알잖아. 그 위에만 레터링으로 덮을 거야."

자아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대충 둘러대었다. 그래도 걱정하는 기색에 일어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로 안 아플 거야. 그냥 흉터만 좀 가리고싶어서..."

우우웅ㅡ

"잠깐만."

별안간 울리는 진동 소리에폰을확인하니타투이스트였다.

ㅡ^^

뭐야 이게.

수락도, 그렇다고 거절도 아닌 뜻 모를 답변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 깜빡하고 있었다. 세화야, 이거 먹어."

미나가 뒤에서 음료수 캔 하나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은 음료수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음료의 상표를 확인하자마자 숨을 삼켰다. 전생에서도 유명했던, 숙취 음료수 브랜드.

".....이것 때문에 손이 차가웠구나."

"응! 엄마가 너 갖다주라 하던데? 너 우리 엄마 만난 적 있어?"

"아니. 없..... 미나야. 너네 어머니 어떻게 생기셨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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