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낙인(5)
* * *
1.
"이분이네 어머니셔?"
나는 미나가 보여준 사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락없이미나와똑 닮은 이 얼굴을, 어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응! 엄청 예쁘지?"
".....이쁘시네. 근데 이 얼굴에 연세가 마흔 중반이시라고?"
"진짜야. 엄마나이 들으면다 깜짝 놀라더라."
상식을뛰어넘는 동안이었다. 장성한 딸이 있으리라 전혀 예상치 못할 만큼.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다.
"...어머니가 나한테 말씀 남기신 거 없었어?"
"딱히 그런 건없었고.. 언제한번 놀러 오라는것 정도? 싫으면 안 와도 괜찮다고 했어."
속으로 가슴을쓸어내렸다. 내 이미지가 나쁘게 각인되진 않은 듯했다. 한 편으로는 얼마나 개방적인 분이시길래, 그때의 나를 보고도 넘어가 주셨는지. 그게가슴 한구석에찜찜함으로 남았다.
"일단 음료수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너도 가져오느라 고생했어. 이따가 매점에서 뭐라도 사줄까?"
"으음...아니. 그럼 그 대신에."
나도 쓰다듬어줘. 내가 해줬던 것처럼.
그리 말한미나는책상에 엎드리고서 내 쪽을 보았다.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그녀의목선주위를 은색으로 물들였다. 티 없이 푸른 동공에 어린 미약한 열기가 묘한 매력을이끌어냈다.
"알았어. 눈 감아."
"뜨고 있으면 안 돼? 너 더 보고싶은데.."
"이따가 실컷 볼 거잖아. 앞으로도 쭉 그럴 거고."
"앞으로도?"
미나가 방긋 웃으며 눈꺼풀을 사르르 내렸다. 내 손가락은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을 조심스레 매만지다, 이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좋아?"
내 손길이 마음에 든 건지,미나의입에서그르릉거리는듯한 만족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응... 마음같아선 맨날 이러고 싶을 정도로 좋아."
"네가 원하면 매일 해줄 수도 있어."
"나한테만?"
미나의나지막한 물음에, 순간 목소리 내는 법을 잊어버렸다.
내가 굳어지는 얼굴을 차분함으로 가장하던 때에, 미나가 눈을 뜨며 어색한 미소를 자아냈다.
"이미 알고 있는데, 살짝 욕심 좀 부려봤어.그러니까.. 손멈추지 마, 세화야. 계속 쓰다듬어줘."
조금 전보다 확연히 떨리는 목소리. 혹여 어릴 적 상처가 도진 걸까.
'웃는 날 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어요.'
그때 택시 기사, 미나 어머니의 말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혹여 이런 나를들킬까, 일부러 그녀의 눈을 다시 감겼다.
때마침 교실에 시원한 바람이 맴돌았다. 학생들의 원성에 힘입은 에어컨 바람이었다. 이후, 미나의 차가운 살결이 필요성을 잃었어도. 나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우리 이대로 조금만 잘까?"
"....좋아."
우리는 책상에 엎드렸다. 깍지 낀 손을 중앙에 두어 잠이 들기에 이상적인 자세가 되었다.
우우웅ㅡ우우웅ㅡ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연이어 울렸다. 아마 타투이스트의 연락일 것이었다. 나는확인도 하지 않고핸드폰을 껐다.
그저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서.
2.
시간은 빠르다.
어떠할 때는 느리고, 어떠할 때는 재빠른 기묘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목요일이 되었다.
지금은 아침이니 나는 당연히 교실에 있었다.
따끔ㅡ
".....살살 물어."
내가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 뜻밖의 통증에 미나에게 잡힌 팔을 슬며시 뺐다. 얼핏 보니 곳곳에 물은 자국이 선명하다.
"앗, 아팠으면 미안해. 그럼 이 정도로 물어도 돼?"
그나마 흐릿한 자국을 가리킨 미나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최근 들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아니면 자기가 강아지라도 된 줄 아는 건지. 내 팔을 야금야금 무는 것에맛 들인미나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인터넷에서 이상한 지식을 배워온 모양이었다. 연인을 무는 것이 애정을표현하는것에 제격이라나.
세상에 그런 게 있어?
황당함에 꼬치꼬치캐묻자그제야실토했었다. 실은 자신의 로망이었다고.
어쩌겠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지.
"괜찮아. 너무 세게 물지만 마."
나는 미나에게 다시 팔을 내어주었다. 연인도 뭣도 아닌 위태로운 이 관계를 받아들인 미나에게 미안함이 일기도 했고. 내 팔을 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미나의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세화야. 이번엔살살.."
앙ㅡ
다시금 내 팔을 베어 무는 미나. 나는 새어 나오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헝클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타투이스트와나누었던 카톡을 확인했다.
그저께, 교실에서.
시간을 미룰 수 있는지 묻는 요청에.
ㅡ^^
저 알 수 없는눈웃음이모티콘만 보내온타투이스트. 경황이 없어 답장을 보내지 못했는데, 되려 답장해 온 쪽은타투이스트였다.
ㅡ알겠습미다.
급했는지 맞춤법도 틀렸다. 정정은 빨랐다.
ㅡ알겠습니다. 금요일은 괜찮아?
앞은 존댓말인데 뒤는 반말.
ㅡ괜찮아요?
술이라도 먹는 중이었는지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았다. 설마 작업할 때도 술 먹고 하는 건 아니겠지, 같은 걱정을 품으며 대답했다.
류세화: 괜찮습니다. 혹시 저녁 일곱 시 반 전에 끝내주실 수 있을까요? 여덟 시에 출근이라서요.
ㅡ가능할 것이라 사료 됩니다. ^^
갑작스러운 고급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단감사하다고한 뒤 답신을 마쳤었다.
웅성,웅성ㅡ
교실이 시끄러워짐을 느끼며 핸드폰을 껐다. 어차피 더 볼 것도 없고. 마음이싱숭생숭했기때문이다.
어제부터 그 일로 교실, 학교 전체가 떠들썩했다.
나와 악연을 맺었던 선생, 정민호의 실종.
첫 만남 이후 누누이 내 심기를 건드렸지만, 검사의 죽음 이후 꼬랑지를 내리며 나를 피하기에 급급한 선생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앙금은 자연스레 풀렸다.
'어쨌든 나한테 사과는 했으니까.'
기왕 안전하게 돌아오면좋겠다고 생각하는것도 그때문이고.
"앙."
"또세게... 아니야. 원하는 대로 마음껏 물어."
나는 한숨 섞인 웃음을 뱉으며 팔에 매달린 미나를바라보았다. 그래, 얘나신하율챙기기도 벅찬데 다른 사람 걱정할 여유는 없지.
3.
미나와 함께하교하는길.
"이따가 체육관 갈 거지? 오늘은 뭐 가르쳐 줄 거야?"
"오늘은 못 가.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약속....? 누구랑?"
들떴던 미나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올 게왔다고 생각하며솔직하게 대답했다.
"너도 본 사람이야.하율누나."
"아...그때그 언니구나."
무표정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미나가 어렴풋이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허락했다지만, 그녀의 기분이 나쁠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미안해."
"그게 아니라 그냥나는..."
미나는 팔을 뒤로 모으며 말을 흐렸다. 그녀의 입술이 잠깐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나와 눈을 맞추는 것도 피하며 발로 땅을 긁는다.
"기분 나쁘게 만들어서 미안해. 진심이야."
".....나쁜 게 아닌데."
"그러면 나 좀 봐줘. 무서우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을 말에 실어 보낸 그 즉시, 미나는 드디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예상한 얼굴이 아니었다. 미나가 나를 안아오며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거. 기분 나빠서 네 눈 피한 거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 안 해도돼...."
"왜 그랬는지 말해. 뭐라 해도 다 들어줄게."
".....아쉬워서 그랬어. 너 내일도 출근하잖아."
"뭐가 아쉬운데?"
"너랑 있는 시간 줄어드는거..."
아.
끊어질 듯이 팽팽하던 긴장감이 탁 풀렸다. 그 여파로, 나는 미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너랑 나랑 다른 게 뭘까.
누군가에게 의존해야지 살아갈 수 있는 것도,그 상대가 줄을 끊어버려버림받을 까봐두려움에 떠는 것도.
너나, 나나 매한가지인데.
"세화야....?"
귀가 간지러웠다.
미나의 목소리로 불리는 내 이름은 무언가 달랐다. 깃털이 달린 펜이 내 심장에, 그녀만의 것을 적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불러 봐. 내 이름."
미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류세화. 세화. 세화야.
그녀는 내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들려주었다.
그래서 감히 내 심장에 무어라 적히고 있는지들여다보았다.
"모르겠네."
"뭘?"
검은색 도화지에검은색잉크로 그린 글자를 보는 것 같다. 이것도 사랑으로 위장한 소유욕의 일종일지 몰라 선뜻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난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그때는 몇 번이고 말해줄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미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4.
신하율과만나기로 약속했던 공원 산책로.
밤이 되자 인근의 가로수 등들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운치가 있는 풍경이 '고백'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고백.
하나부터 열까지 숨기지 않고빠짐없이말하는 것, 이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적절한 진실을 섞어 그녀를 붙잡아 두려는 것이었다. 내가 훨씬 더 선한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놓아주었을지도 모른다.
스륵,스륵ㅡ
벤치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기다리던 중선명한 발걸음이 들렸다. 누군가가 기척을 죽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노력은 가상하나 어설펐다.
내 어깨에 손이 올라오는 그때,
"꺄아악!"
그 손을 확 잡았다. 손이 반사적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꾹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왜 누나가 놀라요."
"....누나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알고 있었으면 적당히속아주지.."
내가 얄밉다는 걸 일부러 티 내는 그녀가 귀여워 미소 지었다.
오늘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신하율은장난기가 많다는 걸.얌전한 체해도말괄량이 기질은 숨길 수 없는 듯했다. 아니면 친한 상대에게만 이러거나.
신하율은 잠시 숨을 몰아 쉬더니, 진정한 듯 말을건넸다.
"옆으로 가줄 수 있어? 나 오른쪽에 앉고 싶은데."
"네."
군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려는 찰나,목도하지말아야 할 것을 목도하고 말았다.
".....누나. 목에그거...."
"아, 이, 이거? 네가 가리지 말라해서.. 안가렸는데."
늘포니테일로머리를 묶어 훤히 드러난 하얀 목에 빨간 꽃처럼 피어있는 키스 마크들.
"....설마 이거 보여주려고 그쪽에 앉은 거예요?"
염두에 두고 있었던 대처 상황, 설득 논리 등 모든 게.
뇌리에서 물거품이 돼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