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 낙인(6) (88/94)

〈 88화 〉 낙인(6)

* * *

1.

ㅡ블라블라블라.....

틀어 놓은 음성 녹음은 이시아에게 저렇게 들렸다.알아듣기는커녕, 발음을 한글로 받아 적기도 어렵다. 그런고로, 재생이 끝나면 버튼을 다시 누를 필요가 없었다.

띡.

ㅡ블라블라블라.....

그런데도 이시아는 버튼을 눌렀다. 그가 모국어로 대화하는 건 처음 들었다. 왠지 신기했다. 러시아에 관련된 것이라면 학을 떼던 이시아도,류세화의음성만큼은경청했다.

".....목소리가 좋네."

딱딱한 발음 사이, 새어 나오는 온기가 듣기 좋았다. 이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고자 녹음했던 건 아니었다. 흔치 않게 흐트러진 그에게서 흑역사라 불릴 만한 게 나오면, 혼자서 고이 간직하고자 했다.

어디에서 비롯된 동기에 벌인 일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탁. 이시아가스탠드밑에 핸드폰을 두었다. 그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고 싶으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나에게 물어보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든. 그러나 이시아는류세화의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하고 싶진 않았다.

'배고프다.'

허기진 배 위에 손으로 원을 그린 이시아. 뭐라도 먹을까 했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일자 복근에 주저했다.

늦은 밤에 음식을 먹는다는 건, 살이 찌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걸 부정할수...

.....부스럭, 부스럭.

정신을 차려보니. 이시아는 저도 모르게 주방 서랍을 뒤적이고 있었다. 먹잇감을 찾던 예리한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냉장고를 열면 다른 고급식자재가가득할 것임을 알고도, 이시아는 그것을 집었다.

라면이었다.

'.....내가 제일잘하는요리니까.'

최근에 맛있게 먹었고, 다른 이에게도 '칭찬'까지 받았으니. 흐뭇해진 이시아가 라면을 끓였다.류세화의집에서 만든 라면의레시피에서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렇게 다 끓인 라면을 조심조심 식탁에 올렸다.

단아하게벌린 입에 라면몇 가닥을 머금었다. 뿌듯했던 그녀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분명 그때와 똑같이 만들었는데 맛이 예상과 달랐다.

"뭘 빠뜨렸나? 그때는맛있었는데....."

무언가가 허전했다.

되었다. 어차피 배를 채우기만 하면 목적은 달성하는 거니.

이시아는 자신이 외롭다는 얼굴을 하는지도 모른 채,

나중에 다시끓여보기로 마음먹었다.

2.

조용한 밤은 인간의 감정을 건드린다. 이는 자연적으로 감수성의 증대로 이어진다. 고인 눈물은 더 쉽게흘러내리는 반면, 마음이 간지러울 때는 견디지 못해 웃어버리고 만다.

하여.

이러한 성질 때문에, 서러움을 토해내는 것이나 사랑 고백을 할 때는 밤에 하는 것이유리하다.....

신하율은전날 밤,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며 알아낸 조언을 떠올렸다. 검색 키워드는 '고백 성공하는 법'.

어찌 되었든저 첫 번째는 순조롭게 이루어졌을 진데.

"....."

문제는류세화, 그였다.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니 대화를 하래도 할 수가 없다. 혹시 기분이 안 좋나? 그를 곁눈질로훔쳐보아도, 알아낼 수 있는 건 꾹 다문 저 붉은 입술이 열리지 않을 것 같다는예감뿐이었다.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시선을내리깐신하율은제 허벅지에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서로 마주 웃을 때까지만 해도 분홍빛 기류가 흘렀는데. 또다시 그가 멀게 느껴진다.

'....혹시 나 뭐 잘못했나?'

고백은 밤에 이루어지는 게 성공 확률이 높다ㅡ 이 법칙도 잘 지켜졌다.신하율은움츠러든 자세 그대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생각했다.

'남자는 기념일에 민감하다고 들었어.'

지금까지 보아온류세화는그런 것에 연연할 것 같진 않지만 만일이라는 게 있어서. 그의 감동을불러일으킬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한참 고민했었다. 선물을 줄 사이는 '아직' 아니고. 그러면 추억에 기대어 볼까, 해서 나온 결론이 옷차림이었다.

'누나 그때랑 똑같이 입고 나왔네요. 예쁘네.'

'응.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이런 대화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옷에 개털이 수북하게 묻을 만큼 마루와 놀아주며 머리를 굴렸다.

편의점에서 처음 만난 날?

바로 기각. 그때는편순이복장에,류세화가기억하고 싶은 날은 아닐 것 같았다.

그의 집에 처음 가보았을 때?

물건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진듯 멀쩡한 게 하나 없는 집 안,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그의피....

와, 이건 진짜 아니야.

어떡하지 마루야? 누나 잘하고 올 수 있을까? 그렇게 물어도 마루는 덥다는 듯 혀를빼물기만 할 뿐. 쓴웃음을 지은신하율이에어컨을 틀려는 그때, 번뜩스쳐 가는것이 있었다.

류세화와의첫 데이트.

그때도 더웠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었다면,류세화가제 목에 차가운 커피를 댈 일도 없었을 테니까.

'왜 그때를기억 못 했지?'

뒤로 물러서 자신을 훑어본 그가읊조린예쁘다는 한마디는하나의 설탕이 되었다.류세화의곁에 있으면있을수록설탕은 심장에녹아들어끈적였다. 가끔은 그 느낌 때문에 고통스럽고, 화나긴 해도.

이상하게, 벗어날 수가없어.

".....나랑 말하기 싫어?"

툭.신하율은그의 어깨에 머리를 떨구었다.류세화의냉랭한 태도가 불안했다. 따스한 목소리가 절실했다. 처음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예쁘다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게 아니어도 다 '장난'이었다고 말하지만 마.

"할 말을 잊어버렸어요."

류세화는덤덤하게 말하며 그녀와 머리를 맞댔다. 제가 새긴 낙인을 본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 그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네가 뭘 잊어버렸는지 궁금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신하율은그에게 더욱파고들었다. 아늑한 집을 찾아 겨울을 나려는 두더지처럼.

"네."

심장 고동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서 들리는 목소리와,

그가 허락해 맞닿은 체온에,신하율은용기를 내어 작게 입을 열었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류세화가 되물었다.

"언제부터?"

".....모르겠어."

"클럽에 왔을 때는?"

".....좋아했어. 그래서 갔어. 네가 질투하게만들려고..... 성공이었어?"

"갑자기 그게 궁금해?"

류세화의고개가 소리 없이 돌아갔다. 이윽고 입술과 볼이 맞닿았다가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돌아보았다. 차분한 표정으로 응수하며신하율의손을 꼭 잡았다.

"괴로울 정도로 성공했지. 나도 그때 자각했어. 누나가 안 그랬으면 영영 몰랐을 수도 있었는데."

"나에 대한 마음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한 건지 기쁜 건지,신하율이가는 숨을 내쉬었다.류세화의가라앉은 시선이 그녀를 응시했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어. 아니. 생각해보니까 누나는 좋은 선택을 한 적이 없어. 지금까지 단 하나도."

".....그러면 내 손은 왜 잡고 있는데."

마치, 연인 같잖아.

저 마지막 말에서 그녀의 울적함을 느낀류세화는잡은 손에 더 단단히 깍지를 꼈다.

"도망 못 가게 하려고. 목에 키스 마크는 왜 안 가렸어. 내가 무슨 생각으로 남긴 건데."

"알아. 네가 직접 말했잖아. 내 거라고표시하는..."

"누나가 생각하는 거랑 좀 달라."

류세화가잡은 손을 풀었다.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익숙한 차림새다. 하얀 물감으로 칠한 듯한 살결은 가리는 것보다 드러낸 게 많았다.한쪽 팔에도안길 것처럼 매끄러운 허리. 돌핀 팬츠처럼 짧은 반바지 밖으로 빠져나온 허벅지가 보기 좋게 의자에 눌려 있다.

"그때도 이거 입고 왔었지."

"아,응....어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빠져나갈 시간은 주었고, 그녀는 기회를 놓쳤다.류세화는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말했다.

"예뻐."

"고마..."

"그냥 뭘 해도 다 예뻐.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여자들도 있는데, 굳이 듣고 싶으면 들려주는 편이야."

"그럼 이제는? 나한테만 들려주는 거야?"

"아니. 누나 생각이랑 다르다고 말해줬잖아. 연인 아니야. 우리."

순간, 제 무릎베개에 누운 머리를 쓰다듬던신하율의손길이 뚝 멎었다.류세화는그녀의 감정을 보기가 두려워 눈을 감았다. 비수를 들어 그녀의 마음에 꽂아 넣을 차례였다.

"지금은 그냥 가지고 싶은 거야. 그리고 한 명은이미....."

".....설마. 여자 한 명 더 있다고 하려는 거야? 아니지. 아니지, 세화야?"

눈물이 잔뜩 고인 나뭇잎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류세화는미소를 짓는 척, 눈매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좋은 선택 한 적 없다는 말. 이제 뭔지 알겠어? 걔도, 누나도 놓칠 생각 없어. 평생."

"세화야. 여자한테 남자를 공유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대략."

"그래. 그럼 넌 지금 나한테 어떻게하고 있는줄 알아?"

알고 있다. 실시간으로 그녀에게 대못을 박고 있는 장본인이니까. 하지만,신하율은살짝 다르게 생각하는 듯했다.

"누나가 그렇게 웃지 말라 했는데, 눈꼬리 올리고 다니니까 좋아?스킨쉽은왜 이렇게 많이 해?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화났어?"

"응, 화났어. 무서워? 너한테 착하기만 했던 누나인데 이렇게 하니까?"

"화난 목소리도 나름 듣기 좋네."

".....일어나."

류세화는선뜻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떠나지 않을까 등을 돌리니,신하율도따라 서 있었다. 눈에는 넘칠 듯한 원망이 가득 고여있다. 혹여 흘러내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손으로 눈가를 훔쳐주었다.

신하율은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네 입으로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미칠 것 같아. 근데 또,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그래. 내가 가지고싶다 했지?"

대답이 돌아오든 말든, 일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한 발자국 더 다가가,류세화와간극을좁혔다.

그는 희미한웃음을 띠며대답했다.

"어떻게든."

".....그럼 나도 새길 거야. 참을 대로 참았어."

그때,쇄골에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곧 살이 물렸다. 그 외설스러운 움직임은 쌓아왔던 것을 푸는 듯 한참이나 이어졌다. 잠시 후, 그녀가 물어 당겼던 살을 뱉은 자리에는 새빨간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류세화는제쇄골을확인해 보려다 인체의 한계에 포기했다.

"여기선 볼 수가 없네."

얼마나 깊숙이 새겼길래. 목을 쭉 빼어도 흔적을 볼 수가 없다.핸드폰 카메라로 확인하려는 찰나,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리 집에 거울 있어."

"그래."

"강아지도 있는데, 보고 갈래?"

그 강아지 이름도 왠지 마루일 것 같은데.

"괜찮아."

"왜? 너 강아지 좋아하잖아. 아니면 내가 강아지 흉내라도 내줄까?"

"...누나."

류세화는 뒤로 물러나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몸은 꿈쩍 하지 않았다.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크고 물컹한 감촉. 제 허리를 안고 놓아주지 않는 팔.

"일단 가서 얘기 하자."

앞머리를 쓸어 올린 류세화가 차분하게 내뱉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