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인내의 불(4)
1.
미지, 초자연적 현상, 영혼, 빙의.
나와는 평생 연관될 일이 없을 것이라생각해생뚱맞게만 느껴졌던 단어들이었다. 빙의를 이미 겪고, 그로 인해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그렇게 느꼈던 것은 웃긴 일이긴 하나.
이젠 익숙할 정도로 흔해진 빙의에 관한 공포 영화조차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대개 관객은 같은 사람의 감정에 이입하지,귀신에 씌어주변을해코지하는인물에 이입하지 않으니까.
섬뜩하고 잔인하며 종잡을 수 없는 인격의 샤샤라는 귀신을 몸에 지닌내 처지에서는,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미치광이 말고, 조금이라도 착한 놈으로 보내주면 덧나나.
어두컴컴한 사방, 그 한 가운데 앉아 있는 내가 앞머리를 넘기며 중얼거리듯 샤샤를 힐난해 보았다.
"도라이 새끼."
그럼에도 내가 내자신을때린다거나특이한 행동을 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이따위말장난으로 내가 누군지 검증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내가 진짜류세화라는확신에 적잖은 위안이 됐다.
내가 가진 인격의 변화와 침식.
샤샤의 꿈은 그개짓거리에일조하는 매개체다.
그 새끼의 기억을 꾸게 되는 조건, 시기, 그 영향도 모조리 미지수로 가득하다.
"예방법도없어서 돌겠네. 대처 방안이라곤 그나마 이딴 것들 뿐이고."
류세화의이니셜이새겨질 자리, 흉터 진 손가락을 만져 보았다.
연이어 칼에 그인 흉터가 있는 다른 손 또한, 감흥 없는 눈으로 그 표면을 쓸었다.
'이것도 쏠쏠하게써먹었지.'
손바닥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적에,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으로 정신을 차리곤 했으니. 나는 혼란했던 그때를 회상했다. 이윽고 좋은 생각이 떠올라 찬찬히 몸을 일으킨 후, 방금 나왔던 문 앞에 섰다.
혹시신하율의사진도 증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손가락에 내이니셜을새기려는 이유와 같은 용도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손을 뻗어 초인종으로 가져갔다.
이제, 그대로 누르기만 해서 그녀를불러내면 끝인데.
"·····"
고작 초인종을 누르는 일에 용기가 필요할 줄은 몰랐다.
눈꺼풀을 닫고 입술을 악물었다.
나는류세화가맞아.
이모가 말해준 것처럼.
꾸욱.
초인종을 누른다.띵동소리가 경쾌하게 울림과 동시에. 주머니의 핸드폰도 진동을 발했다.
덜컥!
문이 열리고 핸드폰을 귀에 댄 어벙한 표정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신하율이었다.
"왜 전화했어요?"
내가 태연히 묻자, 그녀의 동그랗게 뜨였던 눈이 제자리를 넘어 가늘게 좁혀졌다.
"한참 동안 안 오길래 걱정했잖아. 나는 또 너한테 무슨 일 생겼나 하고····하아."
그녀의 말에 시간을 확인하니 대략 2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민소매만 입고 있던 그녀가 얇은가디건을걸쳐 입은 신하율의 복장에 눈에 띈다.
나가려는 듯 채비를 마친 복장, 걱정이 가득 어린 표정. 저 모든 단서를취합하니한 가지 결론으로귀결된다.
'알아서 잘 들어갈 텐데. 귀찮게 왜 나오려 했어.'
잔소리로 이어질 수 있는 말은 머릿속에서만 맴돌게 놔두었다.
그래도, 좋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나는 웃는 낯으로 물었다.
2.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본래의 목적은 피임약을 사는것뿐이었으나, 밤 산책도 겸해 일부러 멀리 떨어진 편의점으로 향했다.
딸랑
안에 들어서며 편의점 내부를 훑었다.
카운터로몰려드는 손님을정신없이받고 있는여자알바생한명.
신선한 샌드위치나 도시락이 가지런하게 진열된 냉장 코너.
이곳에 온 목적인 피임약은 어디 한 구석에꼭꼭 숨겨져있는 듯했다.
'하율이먹을 거부터 살까.'
한적한 동네라 손님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아득히 많다.
남녀 불문하고 내게 달라붙는 시선을 익숙하게 쳐내며 냉장 코너 앞에 섰다.
가짓수는 많은데·····. 뭘좋아할지를 모르겠어서 무난한 도시락을 골랐다.
이걸로는허전해할 까봐제일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도 하나 집어 들었다.
먹다 보면목마를수도 있으니 음료수 같은 것도 하나·····.
"·····."
어쩌다 보니,난생처음으로편의점 바구니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 탓에 손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웠던 까닭이다.
"안녕하세요! 혹시 한국말 할 줄 아세요?"
매대를 서성이던 내게 예쁘장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
마침 기분도 괜찮고 피임약만 사면 끝난다는 생각에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네."
"그러시구나. 별건 아니고 짐이 무거워 보이셔서··· 제가 들어드리고 싶은데."
"괜찮습니다. 먹을 거만 담아서 보기보다 안 무거워요."
가볍게 웃으며 거절했다.
"여기서 가까이 사시나 봐요."
"그렇죠.월세방에서자취하는 거긴 하지만."
"아··· 자취. 그래서 음식도 그렇게 많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으나 정정할 필요성까진 느끼지 못했다. 여자는 대화를 이어가는것에 열의를 띄었고, 내 대답은 점차 건성으로바뀌었다. 슬슬 여자가 귀찮아지려는 찰나, 때마침 피임약을 발견한 내가 말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런 거 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같은 여자니까 잘 아실 것 같아서요."
개방적인 곳에종류별로놓인 피임약들을 가리켰다.
"잘 알긴··· 해요. 어떤 게 궁금하신데요?"
여자가 헛기침을 하며얼굴을 살며시 붉혔다. 나는 개의치 않고 개중 하나를 집었다.
"사후 피임약이 이건가요?"
"····네? 아, 네. 맞긴 하지만, 사후 피임약이라도 72시간 내로는 복용해야 효과 있어요. 그런데 이건 왜···?"
"쓸 일이 생겼으니까요."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본 내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죄,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남자분이이런 거 사는 게 신기해서··· 보통은 여자가 오거든요. 그나저나 여자친구 있으시면··· 번호는 못 받겠네요."
시무룩해지는 모습이 괜히 안쓰러워 여자를 다독였다.
"죄송합니다. 그래도충분히 예쁘시니까저 말고 좋은 남자 만나실 수있을 거예요."
"··저 꼬시려는게 아니라 거절하시는 거 맞죠?
여기 남자들이 얼마나 칭찬에 박하면 이렇게 툭 던지는 말에도 저런 반응을 보일까.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하니 여자가 한숨을 내쉰다.
"여자친구가사 오라고한 거예요? 음식이랑, 피임약이랑 이런거 다?"
"음식은 제 의지에요. 걔배고플까 봐걱정돼서산 거라. 그리고 약은···. 갑자기 궁금한 거 하나 더 생겼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그녀가 꺼림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들은 보통 안에 하는 걸 좋아하나요?"
"안 좋아하는 여자 찾기가 어렵죠. 남자들이불안해해서잘은 못하지만. 그래서 피임약 먹을 테니까 안에 싸 달라고 살살 꼬시잖아요."
"···임신은 신경 안 쓰나 보네."
"네. 피임약이 워낙에 잘 나왔기도 했고, 설사 임신한다 해도·· 그렇게큰일은아니에요. 문제는 남자 입장이지."
"왜요?"
"꼼짝없이결혼해야 하잖아요. 애 지우는 건 남자가 죽어서라도 반대할 거고."
기존의 상식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 얘기를 어떻게 치환해서 생각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힌다.
대충 얘기를 더 들어보아도 이곳 남자의 부성애가 유별나다는것밖에는 알아내지못했다.
"그럼 만약에. 남자가 피임약 먹으라고 보채면 여자 쪽은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당연한 요구긴 해도 좋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나랑 깊게 엮이기 싫나, 약간 이런 생각도 들고."
3.
"·····그래서 누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거야?"
"네."
"어쩌면 좋아····."
현관문 앞.
신하율은저 사랑스러움을 견뎌내는 걸 포기하고류세화를꼭끌어안았다.
저런 발언까지 해버리면 어쩌란 걸까.
기이할정도로 많이 사 온음식에 흠칫 놀라긴 했어도, 그것조차 자신이배고플까 봐사 온 것이라한다.
"··· 세상 어딜 가도 너 같은 애는 절대 못 찾을 거 같아."
"그런 생각은 왜 해. 나 여기 있는데."
차가운 어조에 묻어 나오는 언짢은 감정에,신하율은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품에서 나와류세화가건넨 알약 하나를 보란 듯이 물과 함께 삼켰다.
"약 사다 줘서 고마워, 세화야. 근데 피임약은 왜 다 가져가는 거야?"
"이거요?"
류세화는안온한 얼굴로 주머니에 넣은 피임약을 톡톡 건드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저 없을 때 먹을 일도 없을 텐데. 그냥 제가 누나 만날 때마다 가져오는 게 낫지않···"
"세화야."
신하율이급변한 분위기를 흩뿌리며 사뿐히걸어 거리를좁혀온다.
·····류세화는본인이 또 뭘 잘못했는지 되짚어보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밥 안 먹어서 배고프지? 잠깐 들어와서 먹고 갈래?"
"글쎄요. 밥 생각은 딱히없···."
"응, 누나도 배고팠는데 잘됐다."
"?"
4.
문신 도안이 빼곡히 걸려있는 작업실.
사락
눈가로 내려오는 회색 머리칼을 쓸어 올린 그녀가 도안 한 장을 집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내 붉은 입술이 작게 열리며 총평을 내렸다.
"잘했어, 하나야."
"감사합니다."
주하나는고개를 숙여 보이며 생각했다.
잘 죽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타투이스트의실력이 여간 처참한 게 아니었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