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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화 〉 인내의 불(5) (93/94)

〈 93화 〉 인내의 불(5)

* * *

1.

작업실의 크기는 꽤 컸다. 하지만 어두운 조명과 상대의 거대한 존재감은, 주하나로 하여금 이곳이 비좁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

주하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회백색 머리칼의 여자가 우아하게 앉아있다. 호랑이를 빼다 박은 금빛 동공은 스산함을 풍긴다. 주변에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단 두 명 뿐이었다.

"하나야."

"넵, 보스, 앗아! 죄송합니다."

주하나는 호들갑을 떨며 사과했다.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도 모자라, 이전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그녀에게는 자칫 반항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백정'을 처형인으로 마주하기는 싫었다. 류세화는 기억을 잃었다 뿐이지, 그 귀신같은 솜씨까지 잃어버리진 않았으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됐든, 주하나는 실수를 시인하며 다시 정정했다.

"한설님."

한설.

머나먼 러시아에서 남동생을 찾으러 온, 저 여자의 한국 이름이다. 본명은····· 따로 떠올려 보진 않았다.

주인인 한설이 망각할 것을 명령했으니까.

"님 빼고 불러도 상관없는 걸."

한설은 청아한 발음으로 읊조렸다. 주하나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저런 것까지 아신다는 건.'

주하나는 그녀가 비단 발음뿐만 아니라 한국어에 조예가 깊다는 것까지 알아차리곤 경탄했다.

'아직 문자 보내는 건 어색하시긴 해도, 말은 더 이상 가르쳐 드릴 필요가 없겠네. 역시 천재는 천재인가?'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얼마나 노력한 걸까.

비록 비상한 두뇌의 도움이 있었다고 할지언정, 그 한설이 공부를 자처했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다.

남동생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하지만 그 일념이랑 한국어가 무슨 연관이 있는진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내키지 않으면 편할 대로 불러도 좋아. 그럼 이제, 하나야."

"넵."

주하나는 한설의 부름에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한설의 기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그의 행보를 보고해야 할 때가.

"나 바람맞힌 세화가 뭐 했는지 들려줄래?"

"·····여자 만나셨습니다."

"그랬구나. 이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나랑 만나기로 한 약속까지 저버릴 정도로 그 여자가 좋았던 걸까."

한설은 침울한 음성을 흘리며 제 앞으로 시선을 두었다. 침대와 다를 바 없는 문신 시술대 위에, 두꺼운 이불이 덮여 있다. 한설은 볼록한 이불을 말없이 주시했다.

그 행동을 살핀 주하나가 돌연 자그마한 철제 케이스를 가져왔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아셨다면 분명히 먼저 이곳에 오셨을 겁니다."

주하나는 손을 뻗었다.

딸깍­

케이스가 열리고, 길쭉한 몸통에 바늘이 달린 기계가 드러났다. `타투 머신`이라 일컫는 이 기계는, 전적이 화려했다. 무려 '백정'의 눈가에 문신을 새겼고, 자기 주인에게도 새겼다.

소유주가 한설이었기에 가능한 영광이었지만.

"너무 신경 쓰실 것도 없다 생각하고요."

주하나는 머신을 꺼내 내밀었다.

"왜?"

한설은 타투 머신을 건네받으며 되물었다.

"그야···· 곧 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금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하셨잖아요? 그리고, 바로 내일이 금요일입니다."

"난 오늘 보고 싶었는데."

시큰둥한 태도에 주하나가 이마를 긁적였다.

고작 하루 미뤄졌다고 저 난리를 치는데,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은 거지.

"어쨌든 여기 오시게 된 이상, 앞으로 시간은 충분합니다. 이제 천천히 다가가시는 일만 남았어요."

한설의 눈가에 새겨진 문신. 아프로디테. 미의 여신은 한설에게 오만한 이름이 아니다.

류세화의 여자들과 경쟁?

그녀들은 한설이 마음만 먹으면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다만 한설이 저지른 악행이 중대한 걸림돌로 남아있긴 하나, 류세화가 기억을 잃은 상태니 당장 그 문제에 직면할 필요는 없을 터.

"고마워, 하나야."

하지만, 한설도 기억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쌓아온 그 애증이 얼마나 끈적하고 커다란지. 주하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기분은 좀 풀····"

"얘기 이어서 들려줘. 세화가 그 여자랑 만난 다음엔?"

역시. 언짢은 상태인 그녀와의 대면이 수월하게 흘러갈 리가 없었다.

주하나는 불똥이 튀기지 않을까 살짝 걱정하면서도 기억을 더듬어 어렵사리 운을 뗐다.

"일단 서로 간에 고백이 오가고····"

"응."

한설은 머신의 버튼을 눌렀다. 끝의 바늘이 진동하며 섬뜩한 소리로 울었다. 주하나는 왠지신중히 답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결국 깊은 사이가 된 건 맞지만, 당신께 했던 말을 해주진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인데 어떡하지.

서로 키스 마크를 나눈 것이나 그 이후 일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

한설은 머신 바늘에 주입할 잉크를 준비했다. 눈치 빠른 주하나가 시술대의 이불을 걷혔다. 땅딸막한 체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학교를 비롯해 경찰이 애타게 찾고 있는 남자였다.

"민호라는 학교 선생입니다. 그분과 안 좋은 인연으로 얽혀있으니, 마음대로 연습하셔도 됩니다."

"자고 있어?"

"예. 팔, 다리 입 전부 구속하고 재워둔 상태입니다. 시끄러운 건 싫어하실····."

흘긋.

주하나는 눈치가 빨랐다.

"그러면 연습의 의미가 없죠. 바로 깨우겠습니다."

퍼억ㅡ!

남자는 복부에 이는 통증에 눈을 부릅떴다. 사지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한 쌍의 눈만이,움직임의 제약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웠다. 한설은 그 자유를 박탈했다.

"읍!읍!읍!으읍!"

남자의 망막에 바늘의 뾰족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설은 눈을 꾹 감은 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세화 있잖아. 옛날이랑 다르게, 눈빛이 완전 순해졌다?"

"그건 기억·····."

"그 정도 수준이 아니야. 그래, 음·····. 마치, 다른 사람 같은?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진 같이 지내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한설은 며칠 전에 받아 본 사진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 흔적 안 가리고 다니는 건 마음에 쏙 들어. 특히 눈 밑에 그건. 내가 새겼지만 언제 봐도 너무 야하고, 예뻐."

한설이 눈매를 예쁘게 접었다. 그렇기에, 주하나는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나는 목에 키스 마크를 남기는 걸 허락한 기억이 없어. 그런 모습으로 웃음 흘리며 돌아다니라 한 적도."

방금 한설의 발언은, 이미 모든 자초지종을 알고 있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 알고 있으면서 떠본 것이다.

이에 억울한 주하나의 눈이 나쁘게 뜨이려는 찰나.

우우우웅ㅡ!

"끄으으읍ㅡ!"

머신의 바늘은 사정 없이 남자의 살갗을 꿰뚫었다. 그가 내지르는 비명에, 억울함이 쏙 들어갔다.

얼굴부터 시작하네.

·····아프겠다.

"이러니 어떻게 천천히 다가가겠어. 아, 요즘 성유진은 어때?"

그 여자는 갑자기 왜? 따위의 생각에 몇 초를 허비해버린 주하나는,

"끄으! 끄으으ㅡ!!"

"사업은 순항 중이며, 그 탓인지 클럽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 입니다."

듣기 싫은 비명의 향연에 등 떠밀려 대답했다.

우우우웅····. 우웅·····. 뚝.

머신의 소리가 멎었고, 돌연 주변이 고요해진다. 덕분에 남자가 느끼는 공포를 더욱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끄으··끅. 끄으윽···끕."

"벌도 주고, 위로도 해줄 방법이 떠올랐어."

거기까지 말을 마친 한설은, 눈을 감고 냄새를 맡듯 작게 숨을 들이켰다.

"여기서 죽인 거야?"

"아, 예. 여기서 도통 나오려 하질 않아서·····."

"어쩐지. 잔향이 나더라."

"죄송합니다. 다시 청소해서 내일까지는 깔끔하게 바꿔두겠습니다."

"혼자?"

"예, 혼자여도 금방·····."

"그럼 힘들잖아."

한설은 옅은미소를 띠며 뒷춤에서 대검을 꺼냈다.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순식간에 낙하했다.

"끄륵!"

칼끝의 목적지는 남자의 목젖이었다. 울컥울컥 치솟는 피가 시술대 밑으로 흘러내렸다.

살짝 눈을 찡그린 주하나에게 상냥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혼자 하면 힘드니까 다른 사람이랑 같이해. 이왕 하는 김에 이것도."

주하나는 '이것'이라 불린 것을 바라보았다. 핏발선 눈으로 피거품을 게워내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음·····. 이것이라.

흡사 사물을 부르듯 하찮은 명칭이나, 시체한테 부르는 거면 상관은 없겠지.

"알겠습니다."

귀찮은 일이 늘었지만, 주하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로 기함하기엔 류세화를 따라다니며 너무 많은 일을 경험했다.

그렇다고 한설이 멀쩡하다는 뜻은 아니다.

동생과 비교하면 선녀란 것이지, 일말의 동요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라.

주하나는 속으로 누군가에게 빌었다.

'누나좀 진정시켜줘요.애교 같은 거 해주면 안 되나? 그 얼굴로 애교 한 번만 부리면 안 넘어올 여자가 없을 텐데. 설령 저 여자라도. 아무튼 화이팅.'

시체 치우는 것도 지겹고, 미친남매 틈바구니에 껴서 심장 졸이는 것도 그만하고 싶은 주하나였다.

2.

금요일, 시끌벅적한 교실 안.

'기운이 없다.'

나는 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도, 몸을 지배한 탈력감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하율의 집에 발을 들인 후로, 그리고 지금까지 쭉 이랬다······.

"세화, 너. 솔직히 말해. 나 몰래 운동하고 있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

나는 엎드린 상태 그대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쿡.

"아."

미나의 손가락에 볼을 찔렸다. 아무래도 함정이었던 모양이다.

"요즘 뭐 하고 다니길래 이렇게 다크 서클이 껴있으세요, 세화씨. 몰래 운동하는 거 맞아, 아니야?"

그것도 일종의 운동이긴 하지.

체력 대신 정력이 빠져나간다는 사실만 빼면.

"그냥 잠 좀 설쳤어."

미나는 새초롬한 표정만 지을 뿐, 내 볼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내대답이 시원찮은 듯했다. 그래서, 하얀 손가락에 희미한 잇자국을 남겨주었다.

"아얏!"

"또 물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갔다 대도 돼."

나는 손을 감싸 쥐고 경계 태세에 들어간 미나를 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자."

다시 들어오라는 듯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다 문득, 악어 이빨 게임이 떠오르는 바람에 작게 웃었다. 지금 내가 완전 그 꼴이었으니까.

"돼, 됐어."

미나가 말을 더듬으며 귓가로 머리를 넘겼다. 은발이 걷히고 붉어진 귓가가 드러났다.

"·····이번만 믿어주는 거야."

"고마워. 하지만 정말 잠못 자서 그래."

"그러면 오늘도 같이 운동 못하겠네. 너 이렇게 피곤하면·····."

오늘이 내가 출근하는 날이란 건 미나도 알고 있었다. 다만, 하교 시간과 내 출근 시간의 공백이 길다는 사실에 기대한 듯했다.

"운동 못 가는 건 맞는데, 피곤해서는 아니야. 다른 일이 좀 있어."

"응?"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타투이스트와 나누었던 대화를 미나에게 보여주었다.

"·····타투?"

"어."

"나 그거 자세히 봐도 돼?"

"상관없어."

핸드폰을 가져간 미나는 대화를 꼼꼼히 훑어본 뒤, 다시 내게 폰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주머니에 넣는 내 귓가에, 상정 이외의 말이 들렸다.

"세화야. 나도 너 타투하는 거 보러 갈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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