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인내의 불(6)
* * *
"세화야. 나도 너 타투하는 거 보러 갈래."
그 질문 이후. 미나는 조르지 않고, 류세화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눈을. 작게 반개한 눈꺼풀은 금빛 눈동자의 일부만 보여주었지만, 그 작은 단서만으로도 미나는 직감했다. 류세화는, 미나와 동행하길 원치 않는다.
".....진짜 보고 싶어?"
류세화는 애써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게 쥐어 짜낸 것이란 목소리를 미나가 모를 턱이 없었다.
그렇기에, 미나는 고집을 부렸다.
"응. 보고 싶어."
자신에게 또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니까. 살짝 서글픈 감정이 들어도, 미나는 그가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깔끔했던 방은 미나가 온 이후로 난장판이 되었다. 교복을 비롯한 여러 벌의 옷들이 사방에 난무했다.
엄마가 보았다면 따끔한 등짝을 맞았겠지만, 미나는 옷을 고르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투명한 전신 거울은 분주한 그녀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한숨을 안겨주었다.
"입을 옷이 하나도 없어....."
휙. 치마 하나가 뒤로 날아가며 침대 위에 안착했다. 그렇게 던져진 `치마`만 벌써 여섯 개에 달했다. 여기서 문제, 치마만 여섯 개라면 미나는 총 몇 벌의 옷을 꺼냈을까?
"얘가 뭐 하는데 이리 시끄.....아이고, 미치겄네. 엄마가 옷 이렇게 놔두지 말라 했지! 네가 모델이야? 왜 방에서 패션쇼를 열고 난리야, 이것아."
확실한 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엄마에게 등짝을 맞기엔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아야! 아, 엄마아. 그만 좀 때려! 파, 팔은 때리지 마! 가뜩이나 피부 하얘서 자국 잘 남는다고오..."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좋으라고 때릴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약속 시간 늦는단 말이야."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항변한 미나는 붉어진 팔을 문질렀다. 엄마가 혀를 찼다.
"좀 기다리라 해. 계집애들끼리 좀 늦으면 어떻다고."
"남자애야. 심지어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어. 걔 삐지면 엄마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미나가 혀를 삐죽 내밀자 엄마는 다시 한번 혀를 찼다.
"걔는 이 철딱서니 없는 게 뭐가 좋다고 만나준다냐. 외모 빼곤 볼 것도 없는 애를. 그래도 네가 엄마 닮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 몰라. 나 옷 골라야 되니까 나가. 딸 연애 사업 방해하지 말구."
미나는 촉박한 마음에 엄마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낑낑대며 용을 써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결국 미나는 간청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다.
"알았어. 다음부터 정리 똑바로 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나가주면 안 돼? 응? 응?"
"여자애가 애교 부리는 거만큼 꼴 보기 싫은 게 없다."
".....세화는 좋아하던데."
"그놈이 특이한 거야. 그나저나 세화면.....너 운동 가르쳐주는 애 이름 아니냐?"
"응. 엄마가 저번에 음료수 갖다주라 한 애. 글구 지금 만나러 가는 애도 세화야."
"그래서 이 난리를 쳤구만. 하긴, 기가 막히게 잘생기긴 했지. 요즘 말로 그, 뭣이냐. 존잘? 존예?"
".....둘다 써. 근데 엄마는 세화 본 적 없잖아."
"눈 밑에 영어 뭐시기 쓰여 있고, 목이랑 팔에 타투 있는 애 아니냐?"
"어,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놀란 미나가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손은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가렸다. 미나가 이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혹시 첫인상은 어땠어?"
바로, 류세화의 화려한 외면 때문이다. 퇴폐적인 이미지는 극심한 양면성을 띤다. 가히 매력적이지만, 절대 건전해 보이진 않는다. 하물며 아빠의 바람으로 이혼을 겪고 나이가 많은 엄마. 좋게 봐줄 리가 없었다. 심지어 미나 본인 또한, 류세화에게 여자 울리고 다니게 생겼다고 말한 전적이 있잖은가.
"엄청 차갑게 생겼더만. 얼굴도 너무 작아서 정 없어 보이고. 엄마는 네가 순둥한 상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쪽이 취향일 줄은 몰랐네."
"거, 겉만 그래, 겉만. 속은 되게 착하고....."
미나는 말을 잇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어?"
"웃기는. 그런 적 없어."
".....엄마 입꼬리 올라가는 거 다 봤는데?"
"빨리 옷이나 입어. 약속 시간 늦을라."
"아.....?"
대화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미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울상이 지어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망했어. 망했어. 늦었다고 화내면 어떡하지. 씨잉....엄마랑 얘기하다가 늦게 생겼잖아."
"몸만 컸지, 애가 따로 없다, 없어. 딸. 세화한테도 이러면 안 된다. 네가 아무리 예뻐도 도망가요."
"내가 괜히 이러겠어? 뭐 입고 나갈지 아직 고르지도 못했단 말이야...."
"쯧. 가만있어 봐."
그리 말한 엄마는 미나와 널브러진 옷들을 번갈아 보았다.
"흠. 우리 딸이 가슴은 살짝 아쉬워도 골반은 크니까.....바지는 이거 입자. 잉? 엄마한테 무슨 눈이여 그거."
"......"
미나는 일명 `눈 나쁘게 뜨기`를 시전하며, 엄마가 건넨 바지를 받았다. 연이어 진지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엄마가 골라주는 대로 입어봐."
당연한 일이었지만, 미나는 엄마의 패션 감각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순순히 바지를 들고 거울 앞에 섰다. 어차피 늦은 거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
"예쁘지? 이런 게 있는데 왜 엄한 거나 주워입고 있었어, 이것아."
엄마의 질타에도 미나는 동그란 눈으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검은색 하이웨스트 핫팬츠. 윗단은 배꼽까지 올라왔고, 짧은 아래 기장은 안 그래도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멍한 눈으로 제 골반을 쓸어보던 미나에게 이번엔 상의 하나가 건네졌다. 보라색 맨투맨으로, 손을 덮을 만큼 팔 기장이 길었다. 반면 아랫단은 상당히 짧다. 팔을 들어 올리면 배가 드러날 정도로.
"어.....귀엽긴 한데 덥지 않을까?"
"요즘은 저녁만 돼도 쌀쌀해. 원단도 보니까 얇은 재질이라 괜찮을겨."
"오키. 이걸로 가야겠당."
엄마의 패션 감각이 이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다. 미나는 배시시 웃으며 엄마를 껴안았다.
"사랑해."
"아우, 얘가 왜 이래. 징그러우니까 치워."
"근데 왜 이렇게 도와줘? 엄마 세화 맘에 안 든다며."
"엄마가 언제? 차갑게 생겼다고만 했지, 맘에 안 든다고 한 적은 없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미나는 다시 웃음꽃을 피우며 방을 나섰다. 착착. 신발도 신었으니, 나갈 준비가 완료되었다.
"갔다 올게."
"그려. 실수하지 말고 잘 받들어 모시고 와. 나중에 집에도 한 번 데려오고. 애가 착하더라."
"뭐야? 엄마 세화랑 얘기도 해봤어?"
"하긴 했지. 손님으로 만나서 네 얘기도 했고."
"지, 진짜? 세, 세화가 나보고 뭐라 했는데?"
미나의 눈이 강렬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러나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엄마는 피식 웃었다.
"빨리 가기나 해."
".....말 안 해주면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야."
"얼씨구. 너 나쁘게라도 말했을까 봐? 그러면 엄마가 걔 만나러 가는데 도와주지도 않았지."
손을 휘휘 저었으나, 미나는 요지부동이었다. 엄마는 마지 못해 혀를 차며 대답을 주었다.
"걔한테 의지하지 말고, 앞으로는 네가 버팀목이 되어줘."
"무슨....말이야?"
"그리고 걱정 받을 일 하지 마. 걱정하게 하지도 말고."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라,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미나는 자연스럽게 지난 행실을 되돌아보았다.
틈만 나면 팔 물고ㅡ하지만 허락 받은ㅡ, 같이 있으면 안 되냐고 징징 조르고.....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
"미나야. 착한 우리 딸."
".....응."
"외로운 감정이 들어도 너는 꿋꿋이 견뎌야 해. 세화란 아이가 네게 의지할 수 있도록. 그리고 더는 노력할 필요가 없도록."
"....노력?"
"그래. 노력. 너는 엄마가 있지만, 걔는 아무것도 없잖니."
미나는 침묵했다. 엄마가 말한 노력은, 외로움을 내색하지 않는 것이었다. 문득, 앞에 있는 엄마가 든든했다. 눈동자며, 머리카락이며 미나와 다른 색이 없었다. 미나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빠가 아니라 엄마를 쏙 빼닮았다.
그 사실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그리움을 안겨주어 자책하게 했다. 아빠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렇게 떠났을지라도, 딸에게 일말의 애정은 남아있지 않을까. 미나는 아빠를 우연히 만날 때마다 매몰차게 대하질 못했다.
일 년에 두어 번. 어차피 은근슬쩍 돈 좀 있나 간 보려 온 것임을 알아도.
당신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는 척, 목소리만 싸늘히 깔 뿐이지, 신랄하게 깎아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나도 알아, 바보 같은 거.
겉으로는 아빠가 싫다 떠들고 다녀도, 속으로는 아직도 이딴 생각이나 하는 천하의 멍청이야.
그래도, 나는.
".....노력할게. 세화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고마워, 엄마."
늘 내곁에 쭉 있어주는 사람한테는 감사할 줄 아는 멍청이야.
***
미나는 집에서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시간에서 20분이 지난 후였다.
"늦었드아아!"
미나는 두 다리로 열심히 달렸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머리카락이 목을 찰싹여 아프다. 류세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천천히 달릴 수도 없다. 먼저 가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다. 아니, 오히려 그편이 나을지도...
"하아, 하아."
약속 장소에 도착한 미나는 무릎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길 한복판에서 이러고 있으니, 동물 보는 듯한 시선이 툭툭 신경을 건드렸다. 숨을 다 가다듬은 미나는 난발이 된 은발을 정리하며 류세화를 찾았다.
여기 부근이랬는데.
발을 동동 구르고, 잔뜩 힘
"저깄었구나.....먼저 안 갔네."
스타벅스 앞에서 무심한 얼굴로 폰을 보고 있는 류세화가 보였다. 손질하지 않아 아무렇게나 내린 흑발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멋이었다. 단조로워야 할 하얀 티와 청바지는 류세화가 입으니 살짝 야릇해 보이면서도 깔끔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모습이 딱 류세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미나는 헤 벌어졌던 입을 닫고 얼굴을 찹찹 소리 나게 때렸다. 불쌍한 표정, 불쌍한 표정. 그렇게 되뇌며 발을 떼려는 찰나, 큼지막한 손아귀가 미나의 팔을 확 붙잡았다.
"깜짝이야! 누구신데 제 손을....."
"딸!"
딸. 미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두 명이었다. 미나는 뒤로 돌았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에, 말끔하게 생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키는 180인 류세화보다 조금 더 컸고, 삼십 대 초로 보이는 동안의 남자.
"......아빠?"
"그래그래! 아빠야! 어떻게 우리 딸은 볼 때마다 더 이뻐지지?"
미나의 아빠, 장지후는 미나의 손을 잡고 방정맞게 흔들었다. 아빠에게 잡힌 손을 빼는 것 정도야 그리 큰 힘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미나는 눈을 찡그리기만 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뭐 하는 짓이야."
"반응이 왜 그래. 아빠가 딸 보고 싶어서 올 수도 있지."
"일단 놔. 나 만날 사람 있어. 그리고 보고 싶으면 집으로 찾아와. 엄마 없을 때만 골라서 찾아오지 말고."
장지후는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흠. 이렇게 예쁘게 꾸민 거 보니까.....남자 만나기로 했구나. 욜~ 우리 딸 능력 있는데.어떤 남자앤지 아빠도 좀보자.얼마나 잘생겼길래 우리 예쁜 딸이...."
능청 떠는 것과 격식 없이 다가가는 건 장지후의 성격이자 장점이다. 이에 멍청한 여자들은 홀라당 넘어가 지갑을 곧잘 열곤 했다. 장지후 같은 남자가 스스럼없이 대하는데 안 빠질 여자가 있을까.
그리고 장지후는, 딸인 미나를 대하는 법조차 꿰고 있었다.
"같은 남자로서 아빠가 한 번 봐줄게. 우리 소중한 딸을 아무 놈한테나 줄 순 없지. 여우 같은 놈이면 아빠가....."
"그만해. 손도 잡지 마. 더워."
응?
장지후는 미나의 싸늘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붙잡은 손이 빠져나가려 하자, 장지후는 매달리듯 손에 힘을 주었다.
"오랜만에 딸 만난 아빠 마음도 생각해줘. 그나저나 요즘 생활은 어때? 뭐 부족하거나 하진 않니?"
"응. 부족해. 항상 모든 게 부족하고, 엄마는 밤낮으로운전하고있어.그러니까 뭐라도 얻어갈 생각이면 포기해."
"아, 정말, 그런 것 때문에 온 거 아니야."
"뭐하러 왔든 안 궁금해. 일단 손 놓고, 얘기할 거면 다음에 얘기해."
손을 빼낼 신체의 역량은 충분히 있어도, 의지는 그럴 역량이 안 되었다. 미나는 잘 짓지도 못하는 위협적인 표정으로 장지후를 노려보았다. 그런 시선을 받은 장지후는 상처받은 눈을 연기했다.
"미나야...."
"듣기 싫으니까 빨리 가. 나 기다리는 사람 있다고 말했잖아."
연약한 힘을 짜내어 제 손을 붙잡는 큼지막한 손에, 미나는 위협이 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가줘. 이러고 있는 거.....걔한테 보여주기 싫어. 부탁이야."
장지후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미나는 지금, 의례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벗어나길 원하고 있다. 기다리는 남자가 누군진 몰라도, 이대로두면 안 되었다. 후에 장지후가 미나를 찾아갔을 때, 그놈이 떡하고 버티고 있으면 껄끄럽다.
"너 정말 이럴 거야? 대체 어떤 놈이길래. 나보다 그놈이 중요해? 오랜만에 만난 나보다?"
장지후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두드리던 그때, 미나는 등 뒤에서 서늘함을 느꼈다. 그럴 날씨는 아닌데도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기원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커억!"
장지후는얻어맞은 듯한소리를 내며 미나의 손을 놓아주었다. 정확히는, 타의에 의해 놓게 된 것이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제 손을 멍하니 보던 미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컥! 컥!"
익숙한 등의 남자가 장지후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목을 졸린 장지후의 발이 땅을 벅벅 긁어댔다. 발이 노면에 닿는다는 건,남자의 힘이 장지후를 완전히 들어 올릴 정도는 아니란 의미였다.
허나 장지후의 발을 지면에서 떼어낸 것으로도 남자치고는 대단한 힘이며, 그렇다는 것은장지후의 목을 졸라 죽이기에 부족한 힘이 아니라는뜻이었다.
"크, 커거....미! 나! 쿨럭!"
장지후가 억눌린 발음으로 미나를 불렀다. 눈에는 핏발이 섰고, 손은 생존 본능에 따라 제 목을 조르는 손가락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미나는 그저,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했다.
"즈바...제..바."
자신의 아빠가 죽어가는걸.
그때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뭉개질 대로 뭉개진 발음에 미나의 동공이 초점을 되찾았다.
"컥! 컥! 너,혹, 혹시미나 남자친......컥, 크!오해아..나 얘 아..."
"말 하지 마. 네가 누군지 관심 없으니까."
차분한 목소리는 류세화의 것이었다. 정작 제 앞의 목소리는 갈라질 대로 갈라지고 있건만, 류세화는 태연하게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나는 그게듣고 싶어. 네 숨이 끊어지는 소리."
류세화는 늘 하던대로 나른한 눈매를 유지했다. 장지후는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금안을마주보며 그가 이러는 이유를 찾고자 했다.
"끄....르륵."
이유?무엇도 찾지 못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 지금 저 눈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류세화의 눈동자가 세로로 갈라졌다. 아마, 장지후가 죽기 직전에 보는 환상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