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백하연-4 (4/265)



〈 4화 〉백하연-4

"뭐 하나 앉지 않고?"

즐겁다는 듯 웃으며 소파 앞자리를 가리키는 그녀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설마 내가 자기 오빠인  알아차린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어제 살짝 본 것만 가지고 나인 걸 눈치챌 수 있을  없다. 나는 그녀처럼 찬란한 백발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누가 봐도 알아볼 듯한 황금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자라면서 성격이 달라져서 사소한 거에도 즐거워 하는 모양이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무의식적으로 가게 내부를 스캔 했다.
백하연을 제외한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물건들도 상처 없이 다  자리에 있었다.
사장님도 그녀를 경계하고만 있을 뿐이지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아주 자연스러운 명령이었다. 마치 자신이  공간의 주인인 것처럼 당당했다.


-끼이이익

낡은 소파에서 울리는 기분 나쁜 소음이 가게를 매웠다.
그녀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자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심장이 철렁했다.


`들켰다.`


어떻게 들킨 거지? 어제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설마 어제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이 떠오르고 있을 때 그녀가 여전히 장난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물어볼 사항이 있어서 자네를 찾아왔다네."
"제가 여기서 일하는지 어떻게 아시고  찾아오셨네요."

싸늘한 미소가 지어졌다. S급 각성자고 옛 동생이고 나발이고 자신의 뒤를 캤다는 게 불쾌했다.

"그냥 주위 사람한테 물어봤을 뿐이다만, 기분이 나빴나? 귀엽군."
"주위 사람이라뇨?"
"그냥, 빈민가 경계구역에서 근무하던 치안대원에게 물어봤을 뿐이네"

그녀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지어졌다.
명현이 형은 어떻게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내가 알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 느껴본 적 없는 무력감이 몸을 지배했다.


"일단 본격적으로 질문하기 전에 자네한테 제안할 게 있네."
"제안이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지."


그만큼 좋은 제안이라는 뜻이 아니라 거부권이 없다는 뜻이다.
라고 장난 스래 덧붙인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경비대에 들어오게."

경비대, 일반인과 일반인 사이에 생긴 분쟁을 해결하는 치안대와는 궤를 달리하는 기관, 각성자간에 벌어진 분쟁이나 몬스터로 인한 사건을 수습하는 곳으로서 어지간한 각성자들은 경비대에 들어가고 싶어 할 정도로 이름 높은 기관이다.
그래, 각성자와 몬스터에 대한 사건을 처리하는 곳,  각성자인 나한테는 전혀 연관이 없는 곳이었다.

"저는 비각성자입니다만?"
"강한 비각성자도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지, 잠입이나 마나 사용이 제한되는 곳에선 각성 능력이 아닌 순수한 강함도 중요하니까."
"저는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데빌 몽키를 단검 하나로 때려잡는 비각성자가 강하지 않은 수준이라면 우리 도시엔 경비대가 필요 없겠군."

언제 본거지? 잡은지 10분도 안 됐는데,

`역시 총을 썼어야 했나?`


"자세한 건 내일 도시 중앙에 있는 경비대로 직접 찾아오도록, 경비대장님이 불러서 왔다고 하면 다 통과시켜  거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었다. 경비 대장님이라 말할  님에 악센트가 들어간  생각하면 자신이 나에게 님이라 불리는 게 기분이 좋았던 걸까?
  없는 일이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이가 어떻게 되나? 아, 물을 필요도 없겠군, 내가 올해 23살이니 25살임이 틀림없겠지."
`질문이 본론인가.`

빈정거리듯 말하는 어투는 어렸을 때의 나를  닮아있었다. 그녀에게  적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겐 수도 없이 사용했던 익숙한 말투였다.

`나쁜 것까지 배우지 말라고.`

어차피 확증은 없다.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녀도 별수없겠지.

"저는 각성자님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 그런가? 아쉽게 됐군."


절대 믿는 어투가 아니었지만, 일단은 넘어간 모양이다.
그녀는 가볍게 다리를   턱에 손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봤다. 찬란히 빛나는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내려갔다.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흐르는 모습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황금빛 눈동자로 한동안 말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찾아갔던 집엔 얼마나 오래살았지?"
"12년 됐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질문이었기에 바로 대답이 나왔다.
12년이라는 시간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라 내가  때부터 같은 장소에서 살아온  아는 사람은 뒤에 계시는 이제 사장님밖에 없으니까,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을 거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 들 10년은 넘은 것 같다는 대답밖에  들을 테니까.


"글쌔? 여기 주인장은 자네가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고 하던데?"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사장님이 그런 말  적이 없다는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의 반응을 보니 방금 한 말은 거짓말 인듯하군?"


그녀의 입가에 짙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아, 그렇습니다. 평생 그 근처에서 살긴 했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자네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를 본 적이 있나? 그와 같이 다니는 3살 정도 어린 여자아이는?"
"그 시절엔 부모를 잃은 고아가 빈민가에 밀려나는 건 흔한 일이었죠. 너무 많이 봐와서 누구라고 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2살 터울의 남녀라면 근방에서 유명하긴 했죠."


최대한 원론적인 말로 대답했다. 이미 눈치챈 것 같지만, 그녀의 생각이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최대한 노력했다.

"오라버니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지."

그녀의 눈빛이 상념에 빠진  깊어졌다.

"누가 상대여도 지지 않았지, 어떤 상황에서도 답을 낼 정도로 머리도 좋았어. 힘만 센  같은 거랑은 차원이 달랐어."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바라봐서 내가 커 보였던 걸까?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마치 자네처럼 말이야, S급 각성자가 눈앞에 있는데 한 마디도  지려고 하는  보통 사람의 정신으로 가능할 거로 생각하는가?"
"저는 저대로 정신력이 강한 모양입니다. 다시금 말하겠지만 저는 각성자님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퍽이나 그렇겠군."
`아니 진짜 오라버니라고 생각하면 존댓말이라도 쓰던가.`


말 잘 듣고 착하던 아이는 어디 간 걸까? 내가 자기 오라버니라고 확신을  것이 분명한데도 태도가 매우 나빴다. 내가 자기 부하라도 되는  말하는 모습이 상당히 기분 나빴다. 아마 내 눈앞의 상대가 하연이 아니라 다른 S급 각성자였어도 똑같은 생각이 들었겠지.

"오라버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전혀 고압적이지 않았고 어딘가 애처롭다는 느낌이 드는 말투였다.
아마 뉴스나 기사로만 백하연을 접한 사람이라면 저 여자가 저런 목소리도 낼 수 있구나 싶었을 거다.

"흡!"

갑자기 치고 들어온 애처로운 목소리의 위력은 상당했다. 옛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목소리에 가슴이 찌르르 떨렸다. 머릿속에 잠재워뒀던 추억을 끄집어내는 목소리에 가슴이  하고 흔들렸다.
이런 내 반응에 하연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마치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한 일말의 미련을 해소한 듯 아련히 미소 지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왜 오라버니가 저를 모른 체하시는 지, 제가 부끄러우신 건가요? 아니면 오라버니의 기준에  미치나요? 오라버니 하나만 바라만 보고  저의 인생을부정하시려는 건가요?"

울음 기가 낀 목소리로 말하는 하연이의 모습은 조금  까지 엄청난 포스를 풍기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여려 보였다.

"하늘 같은 오라버니의 뜻을 제가 알  있을 리가 없죠. 하지만 제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애처롭게 말하는 하연이의 모습에 그냥 내 정체를 밝히고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어.`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어릴 때 나는 하연이를 이끌어줄 수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하연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S급 각성자와 빈민가의 시민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격차가 있으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각성자님이 찾으시는…."
"일주일…."
"네?"
"딱 일주일만 시간을 드릴게요."


하연이의 목소리는 애처로웠지만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일주일이 지나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하루도  되는 짧은 시간에 오라버니를 강제로 손아귀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데요."


깊고 어두운 눈빛이 내 심장을 옥 죄여 왔다.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사랑이 나를 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제발 오라버니가 밝혀주세요."

저는 오라버니를 강제로 억압하고 싶지 않아요.
라는 말이 작게 들려왔다.


"이만 가볼게요. 오라버니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까요."


하연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게를 나갔다.
입안이 썼다.
단 게 확 땡겼다.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집어넣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