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달빛 아래의 여왕-3
몸에 힘이 빠져 움직이지도 못 하는 나를 하연이가 부축했다.
이곳지리도 잘 모를 게 분명한 하연이었지만 아주 거리낌 없이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곳은 작은 골목길, 대낮임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아어두운 곳이었다.
낮이라서 인기척 하나 나지 않는 공간에서 하연이가 나를 벽으로 밀었다.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시 넘어질 뻔 했지만, 하연이가 내 어깨를 꽉 잡고 있어서 쓰러지진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
갑작스러운 하연이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제가 뭘요? 오라버니 입으로 미안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벌을 받으셔야죠."
하연이의 눈이 공허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 화가 난거지?
오라버니는 절대 죽을 일 없다며 아레나 같은 위험한 일에 투입하는 애가 내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화내는 건 아닐 테고, 설마 여자애 호위했다고 삐진 거야?
`여전히 속이 좁구나.`
아니 이건 내 문제일 거다. 어릴 때 정을 주고 먼저 떠나 왔으니 하연이가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거겠지. 어쩌면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할 나의 업보일지도 모른다.
내가 오빠로서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지.
죄책감과는 별개로 상황 파악이 되자 불안감과 두려움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후후 각오하세요."
불길하게 미소 짓는 하연이를 꼭 안았다.
"오라버니? 이런다고 봐 드리지 않아요."
"지금 질투하는 거야?"
"질투라뇨? 화내는 거거든요?"
사납고 차가웠던 말투가 누그러져 귀엽게 들렸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걔는 그때 한 번 만난 게 전부인걸? 너는 1년 이상 같이 지냈고 어제도 같이 잤잖아?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그래도, 오라버니는 제 건데."
"나는 내 거거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게 효과가 있던 건지 하연이의 기세가많이 사그라들었다.
"너 말고 다른 여동생은 없으니까, 너무 질투하지 마."
"여동생은 아니어도 여자잖아요!"
"걔도 만난 지 10년이 넘거든? 그렇게 옛날에 만난 거 가지고 너무 화내지 마, 방금 진짜 심장 떨어질 뻔했어, S급이라는 애가 비각성자한테 그렇게 기세 뿌리면 돼 안돼?"
"... 안돼요."
동생 훈육하는 오빠 같은 모습이 돼버렸네.
"오빠라서 버틴 거지 아마 일반인이었으면 혼절했을 거야. 앞으로도 함부로 기세 뿌리기 전에 말로 해결하자 우리."
"그래도 다른 여자랑 말하는 건 용서 못 해요!!"
"오빠도 사람인데 대화하는 것까지 제어하려는 거야?"
"아무튼, 안 돼요!"
어릴 때 어리광을 못 부려서 지금 다 부리는 건가? 마치 딸아이가 나는 크면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는 마음가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얘기 안 할게, 그러면 된 거지?"
"좋아요! 절대로 얘기하지 마요."
이때는 얘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 줄 몰랐지.
"근데 벌을 준다니 도대체 무슨 벌을 주려고 한 거야? 때리기라도 하려고 했어?"
"에이, 제가 어떻게 오라버니를 때리겠어요. 그냥 좀 괴롭히려고 했죠?"
"괴롭혀? 어떻게?"
내가 집요하게 물어대자 하연이의 얼굴이 새빨개 졌다.
"몰라요! 묻지 마요!"
도대체 어떻게 괴롭히려 했으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걸까?
하긴, 집착에 눈이 먼 상태에서 생각했던 거니까 맨정신으로 돌아온 지금은 부끄럽겠지.
"그러면 암흑가 탐방이나 마저 해볼까? 점심 먹을 곳도 찾아보고."
"좋아요."
어두운 골목길에서 빠져나오니 덩치 큰 형님들이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하연아, 우리 좀 뛸까?"
"네?"
덩치 큰 형님들은 골목길에서 나오는 우리를 보더니 슬금슬금 다가왔다. 입구에 있는 잔챙이들 쓸어버린 지 10분도 안 된 거 같은데 생각보다 소통이 빠른걸? 달빛 아래의 여왕 직속이라 그런가?
"아까처럼 다 쓸어버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까는 두 명만 잡으면 됐지만, 지금은 잡아도 잡아도 계속 몰려올 거야.소란피우기 싫어서 잠입한 거 아니었어?"
"알았어요."
하연이가 내 오른팔을 잡아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겁나 빨라!!`
다행히 끌려가는 입장이라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니 겨우 속도는 맞출 수 있었다.
주변 환경이 휙휙 바뀌었다.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덩치 큰 형님들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이쯤 왔으면 되지 않을까?"
"그럴까요?"
천천히 속도를 늦추다가 멈추니, 암흑가 지리에 대해선 나름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잘 모르는 곳까지 와버렸다.
암흑가의 초입은 아닌 것처럼 지나다니는 사람은 꽤 보였지만 어딘지 특정 지을 수는 없었다.
"우리, 길 잃어버린 것 같은데?"
*
암흑가의 중심, 가장 높이 솟은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빨아드릴 듯 짙은 칠흑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암흑가를 굽어 살피듯 내려다봤다. 그녀는 이 장소가 너무나도 좋았다. 암흑가 전체가 눈에 내려다보이는 각도였으니까 전시해둔 트로피를 감상하는 마음으로 암흑가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사사로운 스트레스 정도는 눈 녹듯 사라지기도 했다.
그녀만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어두운 방에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녀의 목소리엔 깊이가 있었다. 그 무엇이든 끌어당길 듯 힘 있고 깊은 목소리가 커다란 방에 울렸다.
"암흑가 입구에 세워뒀던 조직원들이 당했다고 합니다."
"흔한 일이잖아? 입구에 세워둔 놈이 당하는 건, 각성자라도 들어온 거 아니야?"
무료하다는 기색이 가득 차 있는 목소리였다. 겨우 이 정도 일 가지고 나한테 보고하러 온 거야? 하며 그녀의 부하를 쳐다봤다.
"당한 놈들 말론 각성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두 놈 모두 일격에 쓰러뜨릴 정도의 강자라고 하더군요."
"한 명한테 당할 만큼 약한 애들을 배치해 둔 건 아니고?"
"제가 직접 훈련 시킨 애들입니다. 그렇게 약한 애들은 아닙니다."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아, 여자한테 당한 거지? 이번에 경비대장이 새로 왔다고 들었는데 그 인간이 정체를 숨기고 들어왔다면 우리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S급 각성자가 작정하고 기세를 숨기려 하면 일반인은 절대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지만, 결코 품위를 잃지 않았다. 격양되고 기쁘다는 목소리마저 그녀의 어둠이 감싸여져 기품이 가득했다.
"아니요. 남자라던데요?"
"남자?"
그녀는 이 도시에 존재하는 비각성자 실력자를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지금까지 아레나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들이었지만그들은 입구를 지키던 조무래기 두 명을 이길 수 있을지언정 일격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보고를 잘 못 받은 거 아니야?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체격이 남자 같아서 남자로 착각한 걸 수도 있잖아."
"아뇨, 얼굴도 안 가리고 당당하게 들어왔다고 하던데요."
단 한 명,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조직원 두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릴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 그래 그 남자라면 각성도 하지 않은 그녀의 조직원 정도는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본 지 오래 됐지만 그때보다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더 약해지지는 않았을 거다.
그녀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몽타주라도그려올까요?"
"아니야. 됐어, 어차피 지금 시기에 우리 구역에 들어왔다는 건 아레나에 참여한다는 의미겠지. 아레나에서 안 보이면 그때 찾아도 늦지 않아."
아직 능력 발현이 미숙하고 기반도 갖춰지지 않았을 때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던 든든한 남자, 당시 하나뿐이었던 부하가 헐값에 고용했지만 돈값 이상을 너무나 잘 해주었던 남자, 그리고 감히 내 제안을 거부하고 양지로 나간 남자.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에, 그리고 그가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기리는 행사로서 아레나만 개최해가며 그를 기억했던 것인데.
`내 구역에 들어왔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것도 자신을 이렇게 당당히 밝히고 들어왔다는 건 그녀 입장에선 나 잡아가 주쇼하고 비는 거로 밖에보이지 않았다.
이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를 자신의 손아귀 안에 옭아맬 수 있으리라.
"지금 내 경호 대장이 누구지?"
"... 접니다만?"
"아맞다, 예지 너였지? 미안하지만 직급 하나내려가겠다."
"설마, 지금 들어온 사람이 그분입니까?"
상대적으로 늦게 그녀의 밑에 들어온 예지였지만 그녀가 달빛 아래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하는 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단신으로 15명을 썰어 버렸다거나 그녀를 품에 안고 3시간 이상 적들의 손에서 도망친 이야기들은 그녀의 부하들한텐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신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야지."
그녀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토록 바라왔던 남자가 자신의 손에 들어 온다는 생각에 그녀와 어울리지 않게 크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미치도록 아름다워서 어두운 이 구역의 한줄기 달빛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