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달빛 아래의 여왕-4
암흑가 속에서 길을 잃은 지 3시간째 어째 같은 장소만 빙빙 도는 느낌이다. 달리면서 길을 외웠다던 하연이를 빤히 쳐다봤다.
"... 왜 그렇게 보세요. 오라버니?"
하연이도 찔리는 게 있는지 시선을 피하며 어물거렸다.
"길 안다고 하지 않았어? 왜 5분 만에 온 거리를 3시간째 헤매고 있는 걸까?"
"알거든요? 아까 그 남자들한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빙빙 돌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셔?"
"봐봐요! 저기 큰 공간이 나왔잖아요!"
의기양양하게 걸어간 공간은 맨 처음에 우리가 처음 출발한 곳이었다.
하연이는 다시 시작 지점으로 돌아온 것도 모르는지 당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우리가 처음 출발한 데야."
한숨을 푹하고 내쉬니 하연이가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서운 기세를 풍기던 아이라곤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역시 정신적인 케어가 필요한 건가.`
집착증도 정신질환 중에 하나라던데 천천히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좀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제일확실한 방법으로 나가자."
"제일 확실한 방법이요?"
"암흑가 어디서든 보이는 건물 있거든."
공기가 더럽거나 안개가 낀 날은 잘 안 보일 때도 있지만, 오늘은 해당 사항이 아니다. 아주 화창한 날씨거든.
"저기 저 건물 보이지?"
암흑가 중심부에 높게 솟아있는 건물, 도대체 무슨 기술로 저만한 건물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흑가의 어디에 있든 보이는 높은 빌딩이었다.
"네, 무식하게 큰 건물이네요. 정말."
"저기서 밖으로 나가는 길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일단 저 건물로 가자. 어차피 아레나도 저 건물 지하에서 펼쳐질 테니까 미리 가서 탐색한다는 마음으로 가서 기다리자고."
"좋아요."
길이 복잡하게 꼬여있긴 했지만, 건물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걷다 보니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건물 근처로 올 수 있었다.
거대한 건물 주위로 거대한 광장이 넓게 펼쳐졌는데 낮임에도 인파가 많았다.
밥이라도 먹을 생각으로 두리번 거릴 때쯤 뒤에서 누군가가 부딪혀 왔다.
"아, 죄송합니다."
키가 작고 마른 남자였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어린 소년처럼 보인 그 남자는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연아,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네?"
`감히 내 지갑을 훔쳐?!`
부딪힐 때부터 시선을 고정해 놓고있어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녀석을 따라 인파 속으로 들어가자, 그놈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인파 사이를 교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놈 봐라?`
하루 이틀 해 먹은 솜씨가 아니다. 소매치기를 생업으로 하는 이의 전문적인 움직임에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네가 도망가 봤자 좀도둑이지.`
잠깐 놓친 척을 하니 금세 골목길로 빠져나가는 걸 잽싸게 따라 들어갔다.
"왜 이렇게 끈질겨?!"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걸 따라 들어가다가 막다른 곳까지 다다랐을 때 그놈이 확 뒤를 돌았다.
"아리야!! 쳐버려!!"
"응, 오빠!"
옆에서 고사리 같은 주먹이 날아왔다.
마나가 휩싸여 있는 게 고사리가 아니라 까나리 같기도 했지만 가볍게 손목을 잡고 메쳤다.
"꺄아아악!!"
"아리야!!"
이놈들 아주 시트콤을 찍네, 누가 보면 내가 악당인 줄알겠어?
"야, 꼬맹아, 네가 훔쳐간 돈 내놔."
아리라고 불린 여자아이의 손목을 꽉 잡아서 제압했다. 마나의 위력을 보니 E급 각성자 정도는 되는 듯해 보였지만 아직 미숙한지 양 주먹에만 마나를 담을 수 있는 듯했다.
"알았어요, 드릴게요. 대신 우리 아리 풀어줘요."
"눈깔 그렇게 뜨고 드린다고 하면 내가 믿겠다. 그치?"
익숙한 눈빛이었다. 저건 내 말을 들어주겠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다는 눈빛이지.
`어릴 때 나보는 거 같네.`
나도 옛날엔 치열하게 살았지.
"돈 먼저 던져. 여자애를 풀어주는건 그다음이야."
"알았어요."
순순히 던지는 걸 보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다. 남자애는 특별한 능력은 없어 보이니까 여자애 쪽에 뭔가가 있는 거겠지?
"갑자기 공격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여자애를 풀어주자마자 남자애가 소리쳤다.
"아리야 쳐!"
`내 이럴 줄 알았다.`
여자애의 공격을 대비했지만, 막상 여자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리야?"
"오빠, 이 사람은 못 이길 것 같아…."
여자애가 남자애에게 쪼르르 다가가 안기는 모습이 옛날의 나와 하연이를 보는 듯했다.
"각성자야?"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다가가자 여자애가 남자애 뒤로 숨었다.
걸어가면서 지갑을 줍자 무게감이 줄어든 게 느껴졌다.
"그 사이에 돈을 빼가? 참 독하다 너도."
"이렇게 안 살면 못 사니까요! 아저씬 잘사는 것 같으니까 우리 같은 거지한테 기부한 셈 치고 그냥 가요!"
아직 20대 중반인데 아저씨라니, 괜히 화가 나서 꿀밤 한 대 두드렸다.
"악! 왜 때려요?!"
"못 살긴 뭘 못살아?! 나 때는 말이야! 죽은 몬스터 뜯어먹고 살았어!"
"거짓말! 요즘엔 빈민가의 빈민도 그렇게 안 살아요."
"다 시대가 좋아져서 그런 거지."
근데 이놈들 보면 볼수록 내 어린 시절 보는 것 같아서 정감이 갔다.
"일단 돈부터 돌려줘."
한 푼도 빼놓지 않고 회수했다.
"동생 쪽은 각성자야?"
"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 마요. 비밀 무기에요."
"언제부터 이렇게 장사했어?"
"장사요?"
이놈이 눈치가 없네.
"언제부터 이렇게 소매치기질 했냐고."
"한 달 정도요."
"이미 암흑가엔 소문 다 났을 텐데 내가 입 닫는다고 되겠냐?"
남자애 머리를 톡톡 쳤다. 칠 때마다 까딱거리는 머리를 보고 있자니 꽤 중독성 있었다.
"친남매야?"
"아니요, 길거리에서 만났어요."
"달빛 아래의 여왕한테 가봐, 저 나이에 E급이면 꽤 후하게대해 줄걸? 그리고 너도 어디 도망치지 말고 여자애 옆에 꼭 붙어있고."
"아리는 각성자니까 받아 주시더라도 저는 안 받아 주시지 않을까요?"
"무조건 너까지 같이 받아들이라는 조건을 걸어, 어린 나이에 가족 없이 자라면 성격 삐뚤어진다."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는선배의 조언이다 꼬맹아.
"만약 안 된다고 하면요?"
"그러면…."
순간 어릴 시절 월하가 나를 불렀던 호칭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꼭 말해야 하나? 되게 오글거리는데….
"그러면요? 아저씨가 추천해준 거니까 끝까지 말해요!"
"하아, 기사님이 부탁했다고 해."
"기사요?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면 알 거야."
내가 왜 이 때 내가 기사님이라고 말해버렸을까? 그냥 옛 추억으로 간직하고만있을 줄 알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아무튼, 나는 간다. 앞으론 이런 짓 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렴."
복잡한 골목길이었지만 그렇게 멀리 온 것도 아니었기에 금방 광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얘는 어디 있으려나.`
어린애도 아니니 길을 잃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광장 중심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있는 모양인데 하연이도 사람 무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파를 헤집고 들어갔다.
"지나가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하연이를 찾긴 했다. 구경하고 있는 인파가 아니라 구경 당하고 있는 대상이라 문제지.
`네가 왜 거깄냐?`
자세히 보니 반대쪽에서 날카롭게 생긴 여자가 하연이를 노려보고 있는 게 시비라도 붙은 모양이다.
이 정도 싸움은 암흑가에선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사람이 모여있는 거지?
"이봐, 지금 누구랑 누구랑 붙는 거야?"
"달빛 아래의여왕님의 경호대장님이신 예지 님과 감히 달빛 아래의 여왕님 휘하로 들어오라는 말을 거절한 놈의 싸움이야."
잠시 눈을 뗐을 뿐인데 이런 사고를 치다니, 아주 사고뭉치가 따로 없다.
"간만에 빅매치라서 모두 기대하고 있다고 예지 님이 승리하시긴 할 테지만 오랜만에 수준 높은 싸움을 구경할 수 있을 테니까."
확실히 예지라는 여자는 보통 기세가 아니었다. 슬림하면서 근육이 탄탄해 보이는 게 딱 봐도 세다는 느낌이 들었다. 각성자는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월하의 능력을 생각해 본다면 비 각성자라고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예지라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등골이 오소소 하고서는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하연이가 나를 째려보는 게 보였다. 로브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는 기분이었다.
"그럼 설명은 다 했으니 나는 내일 하러 가보겠네."
"아 잠깐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저기 저쪽 로브한테 200만 원."
"자네 역배에 미친 건가? 행색을 보니 이 구역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예지 님은 정말 강하셔."
"됐고 로브한테 200만 원."
어차피 무조건 하연이가 이길 건데 아무리 많이 걸어도 문제없겠지.
"근데 자네, 현금은 있나?"
"... 30만 원만 걸게."
돈이 복사되는 상황인데 이걸 못 하네.
돈을 많이 쓰진 않지만, 오늘 붕어빵에 2만 원이 나간 걸 생각하면 돈 이란 건 역시 쌓아 놓는다고 나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최소한 없는 것 보단 있는 게 무조건 좋으니까
`그러고 보니 집 계약한 한 것도 취소해야 하나?`
하연이 성격상 계속 같이 살자고 할 것 같은데.
-쿵!!
잡생각을 하는 동안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됐는지 크게 소리가 울렸다.
`백하연 이겨라!!`
남매가 위험할 것 같아도 걱정도 하지 않는 모습은오빠나 동생이나 똑같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