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달빛 아래의 여왕-6
"괜찮아, 오빠는 어디 가지않아."
바닥에 무릎이 닿은 상태에서 사람 한 명이 다리 위에 올라 앉아있으니 미친 듯이아팠지만 크게 감흥은 없었다.
이 정도 고통에 엄살을 부릴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불안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따스한 어투로 묻자 하연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믿음을 못 주는 오빠라서 미안해."
몸의 떨림이 심해지는 게 느껴진다. 몸과 몸이 완전히 맞붙어있었기 때문에 하연이의 떨림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어디 안 가, 계속 하연이 옆에 있을 테니까, 이제 믿어 주면 안 될까?"
떨림이 점점 심해졌다. 울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되던 순간 하연이가 벌떡 일어났다.
품 안에 가득 차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휑한 느낌이 들었다.
"알았어요. 믿어드릴게요."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아프긴 했지만, 살짝 휘청거리는 것 외엔 큰 문제가 없었다.
"앞으론 오라버니가 여자를보거나 대화해도 최대한 참아볼게요. 대신!"
뒤로 확 돌아 나를 봤다.
"절대로 다른 여자를 여자로 보지 마요. 그냥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몸에 관심 가지지도 말고 감정도 가지지 말아주세요."
죄책감이 살짝 섞여 있는 집착 가득한 눈빛은 절대 여동생이 오빠를 바라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 절대로 안 그럴게."
나의 확답을 들은 하연이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는지 표정이 누그러졌다.
"일단 저녁이라도 먹으러 갈까? 배 안 고파?"
"좋아요. 밥 먹으러 가요."
다행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다.
빌딩 외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밥을 먹고 아레나에 입장하면 딱 시간이 맞을 것 같다.
"저녁은 네가 사야 한다. 아까 들고 온 돈 다 투자해서 들고 있는 돈이 없어."
"좋아요! 제가 사드릴게요."
아직 남아있는 조금의 어색함은 저녁을 먹으면서 모두 풀리겠지.
***
그를 처음 만난 그 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 믿을 수 있는 사람 맞아?"
"실력은 확실한 놈입니다."
"아니, 아직 너무 어리잖아."
유일한 부하가 데려온 나의 기사님, 그때의 내가 할 소린 아니었지만, 그는 너무 어렸다.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그가 강하다는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중에 가서 15살이란 말을 듣긴 했지만, 나이랑 관계없이 강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이가 많은데 체격 작다는 건 그냥 거지라는 뜻 아닌가?
직접 키를 재보진 않았지만 나보다 살짝 작아 보이기도 했다.
"후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패 입니다."
"필요 없으면 그냥 간다?"
말투도 맘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막내라도 암흑가에서 가장 잘 나가는 조직의 딸인 자신에게 반말이라니 제정신인 걸까?
"하아, 그래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니까."
고양이, 그래, 고양이 같은 존재였다. 까칠하고 도도한 고양이, 아마 그때 내가 고양이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그를 기사님 같은 오글거리는 호칭이 아니라 고양이라고 불렀겠지.
그를 용병으로 고용한 건 큰 이유가 없었다. 하나뿐인 부하가 데려온 애였고 후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누구의 도움이든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후계 전쟁, 이미 쇠락하여 부하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조직의 지분을 자식들에게 뺏겨가고 아버지가 내놓은 고육지책, 자신들의 자식들끼리 싸우게 해서 승리한 자에게 조직을 물려 준다는 참으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아마도 조직이 분열되는 걸 막기 위해 내놓은 생각 같지만 나에게 너무나 불리했다.
당시 13살밖에 안됐던 내가 이미 성인이었던 오빠와 언니들의 손에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아버지도 내가 너무 불리했던 걸 알았는지 나에겐 특혜를 주었다. 한 달, 단 한 달만 죽지 않고 버티면 자신의 직속 친위대를 물려주겠노라고,
아버지의 직속 친위대라면 나라도 위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무력집단이었으니까.
그래선지 후계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언니와 오빠들은 나부터 노려왔다.
그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은 건 오로지 그의 덕분이었다.
"씨발,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안 하는 건데."
그는 너무나 강했다. 단검 하나를 들고 15명과 싸워도 이겨냈다. 그것도 동시에 덤벼들어서 15명이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덤볐다면 수백 명이 덤벼들어도 이길 수 있을지 몰랐다.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범위 조정이 미숙하긴 했지만 그때도 지금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무력화, 내가 가진 권능의 이름이었다.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A급 이상이라는 증거,그토록 강력한 능력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살았다.
B급 이하의 각성자는 내 앞에서 모든 능력을 잃었다. 일반인과 다를 바 없어진 그들은 그의 손에 목이 떨어졌다.
"제 이름은 이월하에요,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이름? 나는 이름 같은 거 없어."
이름이 없는 사람이 어딨어? 나중에 찾아보니까 이수현이라고 말하고 다니더만, 아마 암흑가에서하는 일이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모양이지.
"슬슬 네 몸에서 냄새나는 거 같다?"
"숙녀한테 그런 말 하는 건 실례랍니다."
그는 내 곁에 24시간 같이 있었다. 언제 적이 공격해 올지 모르니 바로 옆에서 꼭 붙어 다녔다. 당연히 따로씻을 시간도 없었고 잘 때도 완전히 꼭 붙어서 잤다.
그렇게 가까이 다녔음에도 나는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고 당신이라고 부르고 다녔다.
"언제까지 몬스터 고기만 먹고 다녀야 하는 거예요?"
"한 달 동안? 네 가족이 네가 들어가는 음식점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데 가게에서 먹을 순 없잖아."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몬스터를 잡는 솜씨는 굉장히 능숙했다.
분명 비각성자는 절대 못 잡는다고 배운 몬스터들도 쓱쓱 하더니 죽여서 손질했다.
근데, 기사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언제였지?
아, 기억난다.
"멀리서 깨작깨작 진짜…."
둘째 언니가 나를 죽여버릴 생각으로 원거리 계열 각성자를 이끌고 나를 추격할 때, 나를 마치 공주님처럼 앉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날,
매초 주변의 건물들이 터져나가고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올 때, 정말 힘들 때 나의 가장 근처에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던 그 모습.
"기사님."
그래, 그 모습을 기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푼 돈을 받았을 뿐이다. 언제 도망간다 하더라도 그를 욕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최선을 다해 지켜줬다.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강한 그였지만 다수가 덤벼드니 몇 번씩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이겨냈고 결국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좋아, 한 달 지났어. 이제 계약 끝난 거지?"
한달 간 24시간 같이 지넨, 우리는꽤 친해졌다. 연인 사이라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친한 친구 정도는 됐다고 생각한다.
"계약 연장해요. 이젠 이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이제 세력이 있으니까. 기사님이 너무 힘들지 않아도 돼요."
"네가 세력이 있으니까 나는 필요 없지. 내가 보기엔 이제 나 없이도 충분해."
그 말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그는 떠났다. 한 번 더 붙잡을까 생각했지만 붙잡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너무 피곤해 보였고, 살인과 암습이 난무하는 암흑가에 지친 모습이었다.
정말정말 보고 싶어지면 그때 찾아 나서면 되겠지, 절대로 객사하진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 이후 후계전쟁에서 승리하고 암흑가를 차지한 건 나의 이야기니 굳이 다시 되새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나는 이제 암흑가의 여왕이고 그는 내 구역 안에 들어온 작디 귀여운 고양이라는 것뿐이니까.
`작은 고양이.`
기사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역시 고양이라는 말이 입에 감긴다. 앞으로 내 손에 쥐고 키울 거니까 확실히 기사님보다는 고양이가 낫겠지.
무슨 재롱을 부리게 할까? 여왕님이라 부르게 하고 복종을 요구할까?
`이건 너무 매니악한가?`
어둡기만한 집무실에서 히죽대고 있다 보니 아레나가 시작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
평소엔 첫날 경기는 구경하지 않지만, 그가 나오는 경기를 놓칠 수는 없지.
복장을 점검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설마 내가 내려올지 몰랐던 것인지 부하들이 흠칫하고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샌가 내 옆에 붙은 예지를 대동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커다란 지하 경기장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나의 자리에 앉았다. 어둡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의자의 모습이 내 모습과 참 잘 어올리는 듯했다.
몇 경기는 이미 진행되었는지 경기장 바닥에 피가 튀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기사님은 이미 경기를 진행했을까?
예지를 빤히 바라봤다. 예지가 아랫것들에게 중얼거리니 잠시 분주해졌다.
"네? 알겠습니다, 자 여러분 이번 매치에는 거물이 등장합니다! 예지님을 꺾은 로브보다 더 강하다는 남자, 이수현이 참여하는 매치입니다."
역시 일 처리가 빨라, 근데 이제는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이름을 그냥 밝히네?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자가 입장하는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등장하는 게 보였다.
성장기가 지나 예전의 얼굴이 사라지긴 했지만 쉽게 알아볼수 있었다.
`이제 넌 내 거야.`
그러니까 누가 내 구역에 발을 들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