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달빛 아래의 여왕-8
대기실로 들어오니 여자가 나를 피해 구석에 박혀있는 게 괜히 기분이 언짢았다.
"나 잘 거니까 로브 싸울 때 깨워."
뭐가 그리 무서운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보아하니 각성자인 거 같은데 비각성자인 내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자리에 털썩 앉고 고개를 숙였다.
분명 방금 막 앉았을 뿐인데 하연이가 내 옆에 기대는 게 느껴졌다. 아까의 소란 때문에 잠시 깼던 것일까?
쉽게 잠이 오진 않았지만, 하연이의 온기에 집중해 억지로 자려고 하니 잠이 들 수는 있었다.
만약또 악몽을 꾸게 된다면 그 장소를 철저하게 박살 내리라 생각하고 잠들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번엔 아무런 꿈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마음도 정리되겠지.
***
모든 경기가 시시했다. 혼자서 경기장을 씹어먹을 듯한 압도적인 위용을 보고 나서일까? 일반적인 경기로는 한껏 달아오른 경기장의 분위기를 만족 시킬 수 없었다.
좆밥 싸움이 재밌다는 것도 어느 정도의 수준이 돼야 하는 말이지 그와 비교하면 벌레만도 못한 잡것들의 싸움으론 아무런 흥도, 재미도, 쾌락도 없었다.
눈을 감고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멀어서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확실히 키도 컸고 어른스러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보인 위용은 어떠한가? 그의 모습에 수많은 관객들이 얼어붙었고 혼자서 15명이나 되는 인원을 숨쉬 듯 쉽게 참살했다.
그의 싸움을 본 사람들은 최소한 비각성자 중엔 그 사람이 최강이라는 것에 이견을 달 인물이 없겠지.
곱 씹어 볼수록 멋지다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지금 찾아갈까?`
본래라면 아레나가 끝난 후 그와의 독대에서 그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그의 모습을 본 지금은 굳이 아레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지금 찾아가서 그를 내 손안에 쥐면 되는 것을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경기장에서 그가 아무리 대단한 위용을 보여줬다고 한들 내 앞에선 그저 재롱일 뿐이다. 마나도 잘 못 다루던 어릴 때의 나와는 다르다. 아마 진심으로 싸우고자 하면 단 일격에 즉사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나는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며 내가 가볍게 휘두른 손짓에 그는 무너져 버리겠지.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잘못 다루면 죽어버릴 정도로 약한 존재라는 생각은 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 지금 찾아가자, 작고 귀여운 고양이를 내 것으로 만들자.
칠흑빛 옥좌 위에서 일어나 그가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10년 만에 만난 내가 갑자기 나한테 복종하라고 하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역시 반항하겠지? 하지만 그가 반항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가볍게 몇 번 어루만져 주면 금세 온순하게 변할 테니까, 오히려 반항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나라도 아무런 명분 없이 그를 괴롭히고 싶진 않으니까.
대기실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예지가 열어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의 구석에 박혀서 울고 있는 행동대 부대장이 보였다. 가볍게 무시한 채 그에게 다가가니 그의 어깨에 기대서 자고있는 경비대장년이 보였다.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감히 내 것을 건드린다는 생각에 당장에라도 썰어버릴까 고민했지만, 그녀는 S급 각성자, 절대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아마 암흑가의 모든 총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녀 하나를 잡을 수 없겠지. S급 각성자란 그런 존재다.
어차피 그의 실력을 보고 접근한 사람이고, 경비대에 비각성자가 필요하지도 않을 테니 군침이 당기는 제안을 한다면 금방 물러서겠지. 필요하다면 암흑가 전체를 그녀의 손에 넘겨줄 수도 있었다.
"뭐야."
내가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경비대장이 일어서서 나를 막아섰다. 아무리 경비대장이라도 그렇지 깨어나는 기색 없이 바로일어나서 내 앞을 막아서는 모습은 기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변조된 목소리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노인인지 어린애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정체를 알고 있는 나한텐 큰 의미가 없었다. 목소리와 외모는 잘 숨겨 놓고 예지랑 싸울 때는 자신이 어떻게 싸우는지 신경도 쓰지 않다니, 아직 잠입엔 미숙한 인간인가 싶었다.
"경비대장님인 걸 알고 있습니다. 편하게 얘기하시지요."
"네가 오라버니가 얘기한 그년이구나?"
경비대장이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아무리 경비대장과 암흑가의 지배자 사이라지만 초면에 이렇게까지 화낼 정도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 경비대장이 그토록 찾았다던 오빠가 내 고양이었다고?`
그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워낙 자기이야기를 하지 않던 그였기에 그가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설마 경비대장이 그토록 찾아 다니던 남자가 그였다니, 성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걸 보니 친남매 같지는 않았지만, 경비대장이 자기 입으로 오라버니라고 말할 정도니 보통의사이는 아니겠지.
일이 좀 복잡하게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예 모르고 살았으면 몰라도 이렇게 만나게 된 이상 그냥 놓아준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나만의 고양이여야 하니까. 내 손 안에서 나한테 굴복해야만 하니까.
편하게 자고있는 그를 훑어보니 놀랄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해 있었다. 또래 보다 작던 키도 평균 이상 정도로는 자랐고 귀엽기만 했던 얼굴에도 나름 잘생김이라는 것이 깃들었다.
아주 잘 생겼다고는 못 하지만 잘 생겼는지 못생겼는지를 논하라면 분명 잘 생겼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뭐하러 왔어."
경비대장년이 그의 앞을 막아서서 잘 구경하고 있는 얼굴이 가려졌다. 로브를 꾹 눌러쓰고 있어서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암흑가의 지배자가 자신의 오라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생각보다 훨씬 과한 반응이었다.
`오빠를 끔찍이 아끼는 년인가 보네.`
어쩌면 조금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여동생을 두고 그를 지배하는 과정이 결코 쉬울 리는 없으니까.
"옛 인연을 만나러 왔습니다."
"옛 인연? 오라버니는 너 같은 거 모를 거야. 그냥 꺼져."
이미 정체가 밝혀졌다고 생각했는지 로브의 모자를 벗은 경비대장의 눈빛은 자기 오빠를 찾아온 여자를 바라보는 여동생의 눈빛이 아니었다.
끈적한 소유욕, 집착, 강렬한 질투심, 경계.
어쩌면 나와 닮아있는 그 눈빛은 오빠를 향한 여동생의 눈빛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쳐다보는 눈빛에 훨씬 가까웠다.
"일단 진정하시고 대화를 좀 나눠볼까요?"
생각보다 훨씬 더 일이 어려워졌다. 아마, 오늘 안에 그를 내 손안에 넣는 건 불가능하겠지.
몇 달이 걸려도 힘들지 모른다.
이렇게 강력한 상대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몇 달, 몇 년이 걸려도 그를 차지하리라.
"닥쳐. 우리 오라버니 곁으로 다가오지 마."
"으으, 무슨 소리야."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던 걸까? 그가 눈을 부비적 대며 일어났다.
싸울 때와는 다르게 독기가 빠진 모습도 굉장히 귀여웠다.
"오랜만이에요. 나의 기사님?"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만나자마자 굴복하라고 할 계획이었지만 경쟁자가 있는 만큼 그의 마음을 얻어내는 게 더 중요하겠지. 속마음을 숨기고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했다.
"월하? 오랜만이다. 근데 기사라는 호칭은 안 쓰면 안 돼?"
그는 기사님이라는 호칭이 부끄러웠는 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표정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 귀엽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연아? 너도 기분 좀 풀어라. 그냥 어릴 때 한 번 같이 일한 사이일 뿐이라니까?"
그의 말에도 경비대장의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인생의 숙적이라도 되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멍청하긴.`
경쟁자가 존재하는 이상 주도권은 그가 가지고 있거늘, 그가 싫어할 만한 행위를 하다니 자신의 상대라기엔 너무나도 미련해 보였다.
경비 대장년은 내 상대가 되기엔 너무 멍청했다.
너보다 훨씬 더 큰 욕망을 가지고 있는 나도 숨을 죽이고 그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데 그의 말은 신경도 안 쓰지 않는 모습이라니, 이미 그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이 승부,내가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금 못 한 것까지 마음껏 귀여워 해주리란 마음가짐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내 눈빛을 느꼈는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그의 모습이 굉장히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