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달빛 아래의 여왕-9
"으으, 무슨 소리야."
그렇게 오래 자진 않았지만 꿈도 꾸지 않고 깔끔하게 잠이 들어서 그런지 정신은 상쾌했다.
하연이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서 일어나 보니, 월하와 하연이가 대치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파악은 잘 안 됐지만 하연이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것을 보니 내가 자고 있을 때 한판 붙기라도 한 모양이다.
"오랜만이에요. 나의 기사님?"
오랜만에 듣는 월하의 목소리는 어렸을 때의 목소리와 굉장히 닮아있었다. 성숙해진걸 제외하면 목소리의 톤에서 예의가 느껴지고 침착한 어투를 유지 하는 것이 어릴 때와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기사라니, 얘는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어릴 땐 이런 호칭을 어떻게 들은 걸까?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월하? 오랜만이다. 근데 기사라는 호칭은 안 쓰면 안 돼?"
기사라는 호칭이 거슬렸던 건 나만이 아닌지 하연이가 눈에 불을 켜고 월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연아? 너도 기분 좀 풀어라. 그냥 어릴 때 한 번 같이 일한 사이일 뿐이라니까?"
간절한 내 말에도 하연이는 분위기를 전혀 풀지 않은 채 월하를 노려봤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애초에 하연이가 이곳 까지 온 이유가 월하를 한번 밟아주고 싶어서 온 것이니 일만 일찍 끝내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
무심코 월하를 쳐다보니 정말 끈적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독심술을 사용할 순 없었지만 월하의 표정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탐욕과집착이 묻어있었다.
마치 뱀에게 옥죄여진 듯한 압박감에 시선을 피했다.
"한 번? 아 한 번이 맞죠. 만나서 한 달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지냈으니까 확실히 한 번이네요."
아까 보여줬던 탐욕과 집착은 내 착각이라는 듯 월하의 말투는 하연이를 놀리듯 가벼웠다. 아까 느껴졌던 끈적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소의 말투였다.
"... 오라버니?"
기계처럼 삐거덕거리며 목을 꺾어나를 바라보는 하연이의 눈빛은 정말 무서웠다.
하연이는 그 표정 그대로 앉아있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살려달라는 표정으로 월하를 바라보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 나에게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다.
"ㅎ…. 하연아…. 그게…."
공포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잠깐을 넘기려고 한 달간의 여정을 한 번이라고 퉁치고 넘어간 과거의 내가 너무 증오스러웠다.
"오라버니 저를 보셔야죠."
하연이가 내 턱을 잡고 나와 시선을 맞췄다. 아까 낮에 잡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악력에 턱이 박살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한 번 만났다면서요? 그래서 오라버니를 용서 해 드린 거고 앞으로 말도 잘 듣겠다고 했는데 거짓말을 하신 거에요?"
할 말이 없었다. 당장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번엔 절대 쉽게 못 넘어가요. 일단 저년부터처리한 다음에 오라버니한테 벌을 드리도록 할게요."
하연이는 내 머리를 톡톡 건드린 다음에 뒤돌아섰다. 둘이서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공포에 잠식된 내 정신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연이는 언성을 높이고 있고 월하는 부드럽게 넘기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월하의 말을 마지막으로 둘이서 같이 밖으로 나간 이후로는더 들을 수 있는 정보도 없었다.
쓰러져서 멍하니있으니 나랑 비슷한 처지로 구석에서 떨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나나 저 여자나, 진짜 강자 앞에선 아무것도 못 하는 벌레나 마찬가지란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
정말 정말 화가 났다. 한 달? 한 달 동안 24시간 같이 지냈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래 놓고 나한테는 한 번 만난 거니까 용서해 달라고 해?
오라버니에게 진심으로 화가 났다. 내가 어떻게 욕구를 억누르고 있는데, 오라버니 말을 듣고 질투도 안 해보려고 했는데 나한테 어떻게 그래?
이번엔 진짜 용서 못 한다. 저년만 처리하고 오라버니한테 벌을 내려야지, 나는 착하게 있었는데 오라버니가 잘못한 거니까.
잔뜩 겁에 질려 떠는 오라버니를 두고 감히 내 오라버니를 건드리려 했던 년을 쳐다봤다.
월하라고 했었나? A급 정도는 되어 보이는 각성자 였지만 내 앞에선 오라버니나 저년이나 똑같은 약자일 뿐이었다.
"죽여버릴 거야."
"경비대장님? 일단 진정하세요. 여긴 암흑가에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너희 구역이라고 숙이고 들어가야 해? 내가 누군지 몰라?"
"경비대장님은 괜찮으시겠지만, 기사님의 안전은 보장 못 해 드려요."
그놈의 기사님, 기사님, 혈압이 오르는 걸 느끼며 눈앞의 여자를 노려봤지만, 그년은 내가 공격을 못 할 것임을 안 듯 태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여자의 말이 맞았다. 내 권능과 능력은 철저하게 공격에 치중 되어 있기에 작정하고 오라버니만 노린다면 오라버니를 지킬 수 없겠지.
오라버니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그건 비각성자의 영역에서 일뿐 각성자가 마음먹고 공격하면 금방 다칠 테니까.
"그래도 나는 너를 좀 패고 가야겠는데? 애초에 여기 온 목적이 너를 한 번 밟아주고 가는 게 목적이어서 말이야. 거기에 우리 오라버니까지 노리는 암고양이 년이니까. 단단히 짓밟아 줘야 반항을 못 하지."
"일단 저희 밖에 나가서 얘기할까요? 기사님 무서워하세요."
시선을 돌려 오라버니를 바라보니 공허한 눈빛으로 덜덜 떨고 있는 오라버니가 보였다.
오라버니의 겁먹은 모습은 굉장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귀여운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좋아, 일단 나가자고."
대기실 밖으로 나가니 서늘한 공기가 느껴져서 어느 정도 열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기사님 참 귀여우시죠?"
능글맞게 웃는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마나를 담진 않은 일격이었지만 내 육체 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치명타가 되겠지
-텁
"일단 진정 좀 해봐요."
아무래도 상대도 싸움을 좀 하는 모양이다. 마나를 사용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그년이 입을 열었다.
"기사님, 일단 저희 둘이 나눠 갖는 건 어때요?"
"닥쳐! 오라버니는 내거야. 절대 안 나눠줘."
"기사님이 불쌍하지 않아요? 경비대장님 혼자서 차지하면 결국 기사님은 경비대장님 원하는 대로 행동할 거 아니에요? 반항하면 아까처럼 협박하고 괴롭힐 거잖아요?"
아니라고 말은 못 하겠다. 귀여운 오라버니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든 아니면 귀여운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든 점점 괴롭힘의 강도가 세지겠지.
"근데 너랑 나눠 가져도 똑같은 거 아니야? 오히려 둘이 괴롭히니까 더 불쌍해지는 거 아니냐고."
"다르죠."
분위기가달라져서 무겁게 얘기를 시작했다.
"선택지가 둘이면 결국 기사님께 선택권이 있는 거잖아요? 선택을 받기 위해선 더 잘 보여야 하죠. 저 라는 경쟁자가 있어야 당신도 기사님께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거 아니에요."
"들으면 들을수록 네가 필요 없는 거 같은데? 굳이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잖아. 오라버니가 내 것이 되면 그냥 그걸로 끝인데."
"경비대장님은 기사님의 사랑이 필요 없으신 건가요?"
어둡게 노려보는 시선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분명 내가 더 강한데,
"강제로 지배하는 관계에서 지배당하는 쪽이 지배하는 쪽을 사랑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이야 괜찮겠지만 1년만 흘러도 기사님이 당신을 사랑하실까요? 툭하면 협박하고 괴롭히는 당신을?"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 갔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절대로 혼자서 제어하지 못합니다. 평생 기사님을 지배하면서도 결국 기사님의 사랑은 받지 못하게 되겠죠."
"설마 그런 인생을 살고 싶으신 건가요? 어차피 최종적으로 기사님께 선택만 받으면 훨씬 더 좋은 결말을 낼 수 있는데도?"
잠시 생각을 해봤다. 오라버니가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되고 나의 말을 잘 들으며 내가 오라버니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인생, 확실히 좋은 인생이지만 내가 어릴 때 꿈꾸던 미래와는 백만 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인생이었다.
게다가 오라버니가 평생 불행할 거라고 생각을 하면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오라버니한테 받은 은혜가 얼만데, 나 때문에 오라버니가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이 욕구를 제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아마 천천히 욕망을 드러내고 오빠를 내 지배하에 놓으려고 하겠지.
상대가 있으면 오라버니에게 잘 보이려고 욕구를 참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곰곰이 생각해도 맞는 말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이년을 오라버니 곁에 붙여?`
내가 24시간 감시하고 있으면 이상한 짓을 할 수 없겠지.
게다가 언제든 이상한 짓을 하면 오라버니 몰래 처리해 버리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머리가 깔끔해졌다. 일단 제안을 받아들이되 언제든 죽여버릴 준비를 하자.
그리고 어차피 질 자신도 없었다. 저년은 고작 한 달을 같이 지냈지만 나는 1년을 오라버니랑 같이 지냈으니까. 결국, 오라버니는 나를 선택하게 되겠지.
부디 그때까지 내 성격이 유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지."
"좋아요. 그럼 이제 당신은 기사님의 여동생으로서 저는 기사님의 옛 의뢰자로서 정정당당한 승부를 해보자고요."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줄 아는 건가? 입꼬리를 삐죽올리고 웃고 있는 모습이 약이 올랐지만 내가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 때 까지는 살려둘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오라버니는 나를 선택하게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