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달빛 아래의 여왕-10
꿈을 꾸었다.
하늘에 뜬 거대한 황금빛이 나를 빤히 비추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감싸는 꿈을,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멀리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다른 존재들도 보였다. 하나 같이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들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왜 약하긴 각성을 못 했으니까 약하지.
마나가 없는 나는 그녀들의 손 앞에 장난감에 불과했다.
열심히 살면 뭐하나 결국 그녀들의 손에 예속된 존재인 것을.
사랑받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나에게 그녀들의 사랑은 너무 무거웠다.
그녀들의 사랑에 보답할 수 없다. 그녀들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없다.
`그랬다간 진짜 어딘가에 감금될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슬아슬한 선을 타면서 버티는 것뿐이다.
그녀들을 구하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괜히 오지랖을 부린 걸까?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나의 마음이 잘못됐었던 걸까?
얀데레.
병적인 사랑을하는 사람.
나도 바보는 아니다. 나에 대한 하연이의 사랑, 집착, 그리고 월하의 소유욕, 그것을 읽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정신이 일부러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지.
`병이라면 치료할 수 있겠지.`
그녀들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 내가 그 병을 치료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이렇게 결론을 내니 정신이 깔끔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를 감시하던 햇빛과 내 몸을 옭아매던 어둠은 어느새 내 주변에 떠 있을 뿐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까짓거 해보자고.`
수마가 나를 덮치고 의식을 잃었다.
***
희망적인 꿈을 꾼 기분이 들었다.
무슨 꿈을 꾼 건지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이 가벼워졌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내가 자고 있는 곳도 의자가 아니라 푹신한 침대였다.
허리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방의 인테리어가 개성이 없는 게 손님방인가 싶었다.
`근데 허리가 좀 무거운데.`
아니나 다를까 양옆에서 하연이와 월하가 나를 안고 누워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덤덤히 받아들이는 걸 보면 나도 정신이 반쯤 나간 모양이다.
기절하기 전까지 엄청 많이 싸웠던 거 같은데 그새 화해한 건가?
하연이의 얼굴을 봐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올 벌이란 걸 떠올리면 몸이 조금 떨리긴 했는데 그까지 벌, 한 번 받고 받으면 되지.
두 명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려 했지만,A급 각성자와 S급 각성자를 속이고 일어나기엔 부족한 모양이었다.
내가 일어나기 위해 허리를 완전히 굽히자 두 사람 모두 따라 일어났다.
"으으, 오라버니 일어나셨어요?"
"푹 주무셨어요?"
양손의 꽃일까 폭탄일까. 부스스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 꽃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가진 힘을 생각하면 폭탄이 아니라 핵폭탄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겠지.
`요즘엔 꽃 모양 폭탄도 있나 보네.`
"하연이는 그렇다 치고 왜 월하까지 같이 있는 거야?"
"왜 하연씨는 그냥 넘어가 주는 거에요?"
"그야, 나는 너…. 가 아니라 월하씨랑 다르게 오라버니의 여동생이니까."
둘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보이긴 했지만 언제 싸울지 모르는 폭탄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대격변보다 한참 전에 있었다는 두 강대국의 냉전과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둘 다 왜 들어온 건데. 여기 방 많아 보이는데 각자 자면 되는 거 아니야? 월하는 네 방도 따로 있을 거 아니야."
겁먹은 티 하나도 안 나는 깔끔한 문장이었다.한동안은 멀쩡히 대화할 수 있겠네.
"기사님이 걱정 돼서 왔죠. 비각성자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강력한 폭력이었잖아요."
"폭력이라니!"
"그러면 폭력이죠. S급 각성자씩이나 돼서 비각성자한테 기세 뿌리는 게 폭력이 아니면 뭐에요?"
"그건 맞긴 한데…."
둘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얘네들이 나 없을 때 뭔가 협약을 맺었구나 싶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둘이서 진심으로 싸웠다간 나 같은 새우는 허리가 터져버릴 테니까. 아니 등이었나?
"지금이라도 기사님께 사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까 악몽이라도 꾸시는 듯 엄청 많이 끙끙대시던데."
월하의 날 선 어투에 하연이가 쭈뼛대더니 나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그 모습이 썩 귀여워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줬다.
"괜찮아. 대신 앞으로는 안 그럴 거지?"
"네, 앞으론 오라버니한테 기세를 뿌리지 않을게요."
왜 저 말이 오라버니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는 뿌리겠다는 말로 들리는 걸까?
"기사님 출출하지 않으세요? 하연씨도 그렇게 난리를 치셨으니까 배고프실 것 같은데."
도대체 자고 있던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난 거야?
"좀 배고프긴 하네."
"그러면 같이 식당으로 가시죠. 암흑가에서 가장 맛집이 저희 빌딩 이거든요."
월하를 따라서 이동했다. 복도를 좀 걷고 엘리베이터를 한 번 타고 조금 걸어가니 호텔뷔페처럼 생긴 장소가 나왔다.
"저랑 제 최측근들이 이용하는 곳이랍니다. 뷔페식이긴 한데 맛은 어지간한 레스토랑보다 좋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어요."
"미안하지만 나는 레스토랑을 가본 적이 없어."
"지금부터는 많이 모셔다드릴게요, 근데 하연씨는 그렇게 찾아대던 오라버니를 만나시고도맛난 거 하나 안 사드렸어요?"
"나도 이틀 전에 봤거든?! 첫날엔 내가 만든 음식 줬고 이번 일만 끝나면 맛있는 거 많이 먹여주려고 했어!"
하연이의 반말이라니, 이건 좀 귀하다. 처음 만날 때 듣긴 했지만 그건 경비대장으로서의 어투였으니 저게 하연이의 반말이겠지. 어느정도 껄렁함이 섞여 있는 걸 보니 편한 부하들한테 저런 말투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서로 친근하게 딜을 넣는 모습에 안심하고 음식을 받으러 갔다.
스테이크처럼 보이는 고기에, 맛있게 튀겨진 음식, 도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신선한 샐러드에 심지어 물고기로 만든 요리까지 보였다. 적당히 음식을 담다 보니 반대쪽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에 한숨을 푹 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세요!!"
단단히 겁을 먹었나 보네. 하긴 어제 내가 좀 무섭긴 했지.
"죄송해요. 어제 제가 악몽을 꿔서요. 너무 예민하게 굴었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녀가 일어서려 할 때 뒤에서 두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뭐 하고 계신 거예요?"
"지애야? 어제 기사님께 뭐 잘못 한 거 있니?"
두 사람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내가 다가올 때보다 더 사색이 되어 있는 여자의 표정을 보니 절대 웃고 있지는 않으리라.
"죄송합니다!!"
그녀는 부리나케 일어나 도망쳤다. 접시엔 아직 음식이 절반 이상 남았던 거로 보였는데, 괜히 밥 먹는 걸 방해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근데 내가 다른 사람 걱정할 상황은 아니지.`
애들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조심히고개를 돌려보니 자기들은 화낼 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밝게 웃고 있는 둘이 보였다.
"이제 밥 먹어요."
`타겟을 바꿨구나?`
나한테 압박이 오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괜히 다른 사람만 피해 보는 걸 죄송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둘 다하기로 했다
"하연씨는 엄청 많이 드시네요."
"그래서 뭐, 불만 있어?"
하연이의 접시에 담긴 음식은 굉장히 많았다.
많이 퍼왔다고 생각하는 나보다도 3배 정도 많았으니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쉽게 알 수 있겠지.
`근데 월하 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닌데?`
월하도 내가 퍼온 양에 2배는 돼 보이는 양이었다.
각성자들은 원래 밥을 많이 먹나 고민하면서 밥을 맛있게 먹었다.
확실히 좋은 식당인 듯 굉장히 맛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고기는 속은 부드럽게 잘 익었으면서도 겉에서는 마이야르 반응으로 만들어진 맛이 퍼졌고, 튀김도 느끼하지 않고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거 같아. 고마워 잘 먹었어."
"기사님이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하연씨는 잘 드셨어요?"
"그럭저럭 맛있게 먹었어. 순위를 꼽자면 9위 정도?"
"공짜로 이만한 음식을 3그릇을 먹어 놓고 9위라고요? 참 뻔뻔하시네요."
"공짜니까 9위지 순수 맛으로 따지면 10위권도 못 들어. 너내가 누군지 몰라?"
늘 존댓말만 했던 하연이의 이런 모습 굉장히 색달랐다. 하연이한테도 이런 모습이 있구나.
부담스럽게 예쁜 두 미인이 티키타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두 여자가 대화를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둘의 얼굴이 빨간 걸 보니 많이 흥분한 모양이다.
"다 싸웠어? 그러면 이제 일어날까?"
"귀여워귀여워귀여워귀여워…."
하연아,속마음은 안 들리기에 속마음인 거란다 그렇게 다 말하고 다니면 속으로 생각하는 의미가 없잖니.
월하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의 냉철하고 차가운 도시 미녀 느낌은 어디 가고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얘네 진짜 괜찮은 거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