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달빛 아래의 여왕-11
"저기 얘들아? 정신 차려."
내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술이라도 마시면서 친해진 건가? 해롱해롱한 둘의 모습에 눈앞에서 몇번 손을 흔들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보인 그녀들은 내 시선을 피하며 식기를 들고 일어났다.
"네, 일어나야죠."
"알겠어요. 일어날게요."
그릇을 정리하는 곳으로 이동하니 남기면 10만 원이라고 쓰여진 문구가 보였다.
왠지 아까 우리를 피해 도망간 여자한테 미안함이 가중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연아, 일 다 끝났으면 돌아가도 되는 거 아니야?"
하연이가 암흑가의 여왕인 월하를 밟아 준다고 들어 온 건데 둘이 저렇게 친해졌으니 온 이유가 사라져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면 암흑가의 지배자랑 경비대장이 친해진 거잖아? 괜찮은 거 맞아?`
평범한 시민 1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도시가 부정부패에 휩싸여 버리는 게 아닐까?
"멋대로 가시려는 거에요? 두 분은 아레나가 끝날 때까지는 남아 계셔줘야겠어요. 암흑가의모든 사람이 두 분의 경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가시는 건 제가 용서 못 해요."
"저는 오라버니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그러면 일단 조금 더 있어 볼까? 그런데 어제처럼은 못 싸워, 내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싸운 거거든."
"확실히, 어제의 기사님은 지금보다 고양이 같으셨어요."
"응? 고양이?"
늑대도 아니고 고양이? 역시 각성자 한테 내 무력은 그렇게 위협이 안 되는 건가?
"확실히 오라버니가 날카로울 땐 고양이 같긴 하지."
"맞아요! 날세우는 게 얼마나 귀여우신지,"
둘은 또 어디서 공감대가 맞았는지 빠르게 대화가 왔다 갔다. 했는데 화나면 귀엽다느니 폼 잡는 게 귀엽다느니, 멋있다는 말 하나 없이 귀엽다는 말뿐이었다.
"내가 오빤데 너무 한거 아니야?"
"귀엽다는 말도 칭찬이랍니다. 기사님."
"맞아요. 오라버니. 칭찬도 못 해요?"
아주 쿵짝이 잘 맞는 듀오다. 서로 싸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둘이서 나를 공격할 줄은 몰랐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소매치기하던 애들이 찾아오진 않았어?"
"네, 왔어요. 기사님 소개로 왔다고 해서 받아들였는데, 여자아이 쪽에 재능이 상당해 보여서 일단 우리 조직에서 기르기로 했어요."
"남자애도 잘 키워 주라. 꼭 내 어린 시절 보는 거 같아서 마음이 가네."
"당연하죠. 누구처럼 엇나가지 않게 할 거에요."
월하의 눈이 음침하게 변했다.
누구, 라는 존재가나인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소매치기 애들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에요?"
"어제 너 싸우고있을 때 만난 애들 있어. 꼭 우리 어릴 때 보는 거 같더라."
"기사님이랑 경비대장님 어릴 때요?"
"응, 남매가 서로 의지하는 게 우리랑 똑 닮았어."
"남매..."
음침하게 변했던 월하의 눈이 초점을 잃고 공허해졌다.
`얘는 갑자기 왜 이래?`
"아, 그러면 되겠구나. 후후."
좋은 생각이 났는지 실실 웃는 월하의 모습은 굉장히 무서웠다.
"나한테도 소개해주면 안 돼? 여자아이 쪽에 해줄 말이 많을 거 같은데."
나의 괜한 관심이 한 명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래요.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괜찮겠지, 별일이야 있겠어?
"근데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거야?"
그릇 정리하는 곳에서 얘기하고 있느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쪽 눈치를 보는 게 명확히 느껴졌다.
"이제 들어가야죠. 눈치 없는 상사라고 찍히긴 싫으니까요. 따라오세요. 건물 구경이라도 시켜드릴게요."
월하를 따라 건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밖에서 봤을 때도 엄청 커다란 건물이었지만 안에서 돌아다니니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넓었다.
사무실로 보이는 방만 수십 개였고 여가시설도 많았다.
수련실로 보이는 장소도 굉장히 많이 보였는데 그중 한 방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벌써 이런 데서 훈련하는 거야?"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아야 고점이 높으니까요. 아마 성인이 될 때 쯤엔 A급 각성자가 되어있을 걸요?"
방에 작게 나 있는 창문으로 보이는 얼굴은 예지라는 여자한테 훈련 받는 여자아이였다.
남자아이는 어디 있나.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한쪽 구석에서 수건을 들고 대기하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얘네가 아까 말한 걔들이에요?"
"네, 여자아이는 벌써 각성했는데 남자아이는 크게 쓸모가 없어 보여서 여자아이 하인으로 삼으려고요."
"좋네."
뭐가 좋다는 걸까? 얘네들의 생각은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너무 많다.
"지금 들어가 봐도 되지?"
"물론이죠."
하연이가 수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자아이의 훈련이 잠시 멈췄다.
어린애한테 무슨 훈련을 시키는 건지 온몸에 땀이 뻘뻘 흐르고 있었는데 바로 남자아이가 다가가서 수건으로 땀을 닦아줬다.
여자아이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남자아이를 바라보면서도 입가에 작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월하님 오셨습니까?"
"그래, 애들 훈련은 잘 시키고 있지?"
"네, 어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가 지금까지 훈련 시킨 애들 중에선 제일 성과가 좋습니다."
"큼큼, 너는 이름이 뭐니?"
하연이가 성큼 다가가서 여자한테 이름을 물었지만, 여자아이는 갑자기 다가온 하연이가 무서웠는지 남자아이의 등 뒤에 숨었다.
"아리에요."
결국, 남자아이가 대답했는데 그걸 본 하연이의 표정이 뚱해졌다.
"아리는 저쪽에서 나랑 얘기 좀 할까?"
여자아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스승님을쳐다봤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스승의 모습에 하연이를 따라 구석으로 갔다.
하연이는 작게 소근거리 듯 말을 하긴 했지만 방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기에 청각에 집중하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오빠가 네 몸 닦는 게 미안해?"
"으으, 네, 더럽기도 하고 괜히 오빠만 힘들잖아요."
"앞으로는 네가 오빠를 계속 지켜 줄 거잖아? 그 정도는 시켜도 돼. 그리고 솔직히 좋았잖아. 아까 너 웃는 거 다 봤어."
"ㅇ…. 아니에요!"
그 이상은 신경을 껐다. 괜히 더 들었다간 마음속에 불안감만 더 들어찰 것 같으니까.
"네? 아가씨도 같이 훈련받게 하라고요?"
"그래,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월하랑 예지씨도 서로 할 말이 있는 거 같아서 혼자 뻘하게 남겨진 남자아이 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꼬맹아, 훈련은 할만하냐?"
"저는 훈련 안 받아요. 아리 시종이나 들죠."
표정이 뚱한 게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게 싫어?"
"싫다기보다는, 조금 무료하죠. 맨날 제가 지켜주던 애인데 커서 오빠 지켜주겠다는 소리하는 거 보면 마음이 좀 그래요."
"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거지. 너도 정신적으로 동생을 지켜주면 되는 거 아니야?"
"정신적으로요?"
애한테 말 하기엔 조금 어려웠나?
"동생도 너를 많이 의지할 거라는 거지. 동생한테 지킴 당한다고 걱정할 거 없다는 의미야."
"진짜로요?"
"지금 네 동생이랑 얘기하고 있는 누나 있지? 쟤가 내 동생인데 나보다 훨씬 쎄, 그래도 나는 너 같이 뚱해 있지 않지."
"뚱해 있던 적 없거든요?"
표정이 밝아진 걸 보니 어느정도 걱정이 풀린 모양이다.
"그래도 고마워요. 형 덕분에 마음이 훨씬 나아졌어요."
밝아진 채로 씩 웃는 애를 보니 네 인생엔 먹구름만 가득하다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멘탈 단단히 부여잡고 꼭 살아남으렴.`
나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슬퍼해 줬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나? 이수현, 너는?"
"저는 사현이라고 해요. 형이랑 이름도 되게 비슷하네요!"
"그러게."
통성명을 하던 찰나에 저쪽 대화가 다 끝난 듯 걸어오는 하연이와 아리가 보였다.
살짝 움츠려 들어있었던 아리의 어깨가 펴진 걸 보니 뭔가 대단한 대화가 오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 언니가 알려 준 데로 하는 거다?"
"네! 언니!"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사현이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 소리가 귀로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내 일 아니니까 알아서 하겠지.`
나 살기도 바쁜데 남까지 신경써줄 생각은 없다. 나중에 진중하게 얘기를 나눌 여유가 생기면 팁이나 좀 알려주면 되겠지.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본다. 수련 열심히 하고 오빠 너무 괴롭히지 마."
"안 괴롭혀요!"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소심했던 애가 저렇게 큰소리를 지르다니, 하연이는 애를 기르는데도 대단한 재능이 있는 거 아닐까?
수련실 밖으로 나와서 하연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무슨 말을 해준 거야?"
"그냥, 제가 오라버니한테 미리 했으면 좋았을 것들을 얘기해 줬어요."
하연이는 방긋 웃으며 얘기 했지만 나는 쉽게 웃을 수 없는 얘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엄청 무서웠으니까 평범한 걸 얘기해 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연씨 잠시 귀 좀 대 주시겠어요?"
둘이서 소곤소곤 대화를 하는 데 내기, 대결 정도를 제외하고 내가 들을 수 있는 말은 딱히 없었다.
"좋아! 어차피 내가 훨씬 유리한 승부인 거 같은데. 졌을 때 괜히 딴말 하기 없기다."
"후후, 제가 이길 거거든요?"
나 없이도 재밌게 잘 노는 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