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반란-2
이틀 후에 반란이 일어난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한들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암흑가에 가서 사람들한테 대비하라고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암흑가 사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도 딱히 없었다.
`지금 말하면 들어주긴 하려나?`
아레나에서 내가 보여준 모습을 보고 암흑가 전체가 열광하고 있다던데,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벌인 일이라 괜히 부끄럽기만 하다.
"오랜만에 싸우는 거라서 몸 좀 풀고 싶은데, 세력들의 보스들이 온다며, 어제 만난 사람들보다는 셀 거 아냐. 준비를 좀 해둬야 할 거 같아."
"그러면 저랑 한 번 붙어 보시겠어요? 기사님이 기억하시던 저랑은 많이 다르답니다."
"너랑? 으음, 좋아."
A급 각성자지만 설마 비각성자 상대로 마나를 쓰진 않겠지. 몸풀기로 가볍게 싸워보기엔 적당할 것 같다.
"그냥 싸우면 재미없으니까 소원 하나씩 걸고 하죠. 너무 무겁지 않은 거로."
"좋아, 마나 없이 싸우는 거다?"
"아무리 저라도 비각성자 상대로 마나를 사용하지는 않는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음산하게 웃는 모습이 불안하긴 하지만 설마 자기가 한 말을 어기진 않겠지.
"그런데 어디 가서 싸울 거야? 장소는 많아 보이긴 하는데."
"빈방이 생길 예정인 곳이 있어요. 따라오세요."
월하를 따라 걸어가니 수련실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검을 휘두르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가연아, 언니 왔다."
"아, 언니, 오셨어요?"
소녀의 인상은 월하와 상당히 비슷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고 눈동자도 월하와 같은 보랏빛이었다.
"동생도 있었어? 네가 막내였다며."
"후계 전쟁 막바지에 태어난 아이예요. 죽일까 고민도 했는데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냥 아버지만 보내드리고 애는 거둬들였죠. 어린 나이에 각성도 하고 생각도 깊어서, 저 없을 때 암흑가를 관리할 사람으로 키우려고 해요."
"안녕하세요. 이가연이라 합니다. 매형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매형? 매형은 손위 누이의 남편한테 하는 칭호 아닌가? 어린애라서 호칭에 대해 잘 모르는 걸까?
"아냐, 그냥 오빠라고 불러."
월하는 가연이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차갑게만 보였던 월하였는데 자기 가족한텐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싶었다.
"언니는 여기 웬일이세요? 지금은 개인 연습시간인데."
"12층 A수련실로 가면 예지 언니 있거든? 가서 훈련시켜달라고 하렴, 네 또래 여자아이가 들어왔는데 가연이랑 좋은 상대가 될 거 같아. 그리고 귀여운 오빠도 있단다."
"저한테도 라이벌이 생기는 건가요?"
눈이 반짝하고 빛나는 게 그 나이다워서 귀여웠다.
"라이벌도 라이벌인데 오빠한테도 집중해 줄래?"
"저는 가볼게요! 라이벌, 라이벌."
가연이는 흥얼흥얼 거리면서 수련실을 빠져나갔다. 사현이한텐 큰 관심이 없는 듯 보이니 사현이입장에선 정말 다행이겠지.
"이럼 안 되는데…."
월하가 난처한 표정을 지은 건 처음 봤다.
아까 하연이랑 한 내기랑 관련이 있는 걸까? 대충 무슨 내기인지 그려지긴 했다.
"하아, 일단 몸 좀 풀까요?"
그러면서 스트레칭을 시작하는데 고의인지 아니면 진짜로 몸을 그렇게 푸는 건지 자신의 몸매를 나한테 과시하는 듯한 포즈를 많이 취했다.
"부끄러우세요. 기사님?"
"그런 거 아니거든."
완전히 뒤돌아 있기를 잠시 월하의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걸 느끼고 뒤로 돌았다.
"안 봐 드릴 거에요. 저도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니까요."
자세를 잡고 있는 월하의 모습은 대련을 하기 위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사생결단을내겠다고 다짐하는 모습과 더 닮아있었다.
"... 먼저 들어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월하가 쇄도해 왔다.
얼굴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주먹을 피하고 뒤로 쭉 빠지자 바로 후속타가 들어왔다.
-퍽!!!
팔에 박히는 주먹의 무게가 상당했다.
`얘 진짜 진심으로 덤비는 거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막고만 있으니 조금씩 데미지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기사님도 공격하시죠."
말투까지 싸늘하고 차가웠다. 이렇게 진지하게 덤비는 데 나도 빼기만 하면 안 되겠지?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고 월하의 공격을 막아내며 반격을 가했다.
완전 진심으로 싸운 건 아니었다. 실전이었으면 여자고 뭐고 명치를 노리기도 했을 거고 추잡하게 다리도 몇 번 걸었겠지만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싸울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근본적인 실력 차이 때문에 월하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팍!!
`얘가!!`
재빨리 막지 않았으면 내 2세를 영영 못 볼 뻔했다.
아니 누구랑 결혼할 생각도 없으니까 필요 없긴 한데,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잖아.
식겁한 표정으로 월하를 바라보니 분위기가 풀린 채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가 졌어요. 역시 기사님은 못 당하겠네요. 제대로 싸우시는 것 같지도 않은데…."
"월하 너도 실력 많이 늘었는데?"
빈말이 아니다. 수 없이 월하의 공격을 받아온 팔이 욱씬 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연이랑 비슷하거나 살짝 아래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 위력의 공격들이었다.
`기술적으로도 훌륭하고.`
"그래서 소원은 뭔가요?저는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드릴 수 있답니다."
월하가 매혹적으로 웃었지만 나는 미리 생각해둔 벌칙이 있었다.
"앞으로 기사님이라고 부르지 말 것."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역시 기사님이라는 호칭은 불릴 때마다 오글거리는 게 너무 심했다.
"기사님이라고만 안 부르면 되는 거죠?"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당당한 눈치다.
"그렇긴 한데, 뭐라고 부르려고."
"고양이, 까칠하고 귀여운새끼고양이요."
얘는 또 이러네. 내가 고양이처럼 생기…. 긴 했지만 고양이 고양이 노래를 부를 정도는 아닌데.
"나는 고양이도 아니고 까칠하지도 않고 귀엽지도 않고 새끼도 아닌데?"
"그냥 고양이 같아서 그렇게 부르겠다는 거죠. 그렇게 따지면 고양이는 하연씨의 오라버니가 아닌데 오라버니라고 불리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르겠어요."
입가에 미소가 씰룩하고 지어져 있는 게 내가 무슨 벌칙을 말할지도 예측하였던 것만 같았다.
"그냥 기사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그래, 그게 나을 것 같다."
"대신 소원권 하나 받아갈게요."
승부에서 이겼는데도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동생 부탁 하나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무슨 소원 쓸건데?"
"천천히 고민해 볼게요. 가장 큰 이득을 얻을 때 쓸 거예요."
"그래, 알아서 하렴."
월하의 성격을 생각하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상식적인 선에서 소원을빌겠지.
***
이틀 뒤의 아침, 언제 반란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 이것만 앞에서 꽁트를 찍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빠! 나 물 좀 떠줘!"
"응, 잠시만!"
사현이가 아리의 물을 떠다가 식탁에 내려놓는 그 순간 가연이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내 것도 떠와야 하는 거 아니야? 너 바보야?"
"죄송합니다."
곧바로 물을 떠다가 가연이한테 대령했지만, 가연이는 한 모금 마시고는 사현이의 머리 위로 부어버렸다. 어, 저건 선 넘는 거 아닌가?
"너무 차갑잖아. 다시 떠와."
"...네."
사현이의 목소리에서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화내고 싶어도 암흑가 여왕의 동생이니까 마음속으로 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겠지.
가연이와 사현이를 이어주고 싶은 월하의 마음과는 다르게 가연이는 사현이를 사용하기 좋은 노예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않는 듯했다. 아리와는 친하게 지내려 노력하는 것 같지만, 사현이한테는 늘 차갑게 대하는 데다가 별거 아닌 거로 화내고 괴롭히는 걸 자주 봐왔다.
아리는 자기 오빠를 괴롭히는 가연이한테 화를 내고 싶지만 높으신 분이니까 꾹 참는 게 보였다.
"이번엔 너무 미지근해."
-촤아악!
`그런데 가연아, 나는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을 엄청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 밥을 먹고 있는 곳은 뷔페가 아닌 커다란 식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커다란 거실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같이 밥을 먹게 된 이유는 이틀 전에 아레나가 끝나고 자러 가기 전에 애들이랑 같이 지네자는 하연이의 제안 때문이었다.
월하도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했는지 즉시 빌딩의 일부를 개조해서 내부만 보면 커다란 주택인 것 처럼 꾸미고 같이 살고 있었다.
건축에 특화된 각성자가 몇 번 능력을 발휘하니까 금방 개조되더라.
본론으로 들어와서, 애들 구경하는 게 아주 재미지다. 가연이가 사현이한테 물을 뿌린 건 아무리 애라도 선을 넘은 게 아닐가 싶기도 했지만 평소에 노는 걸 보면 애들스럽고 귀여워서 삶에 활기가 차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물심부름을 끝내고 자리에 앉은 사현이의 밥 위에 고기반찬 몇 개 올려줬다.
어제 보니까 눈치 보면서 맨밥만 먹던데 나라도 챙겨줘야지.
사현이가 이렇게 고통받는 데에는 내 업보도 분명 있으니까.
"형."
감동 받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현이의 시선을 피했다. 형이 미안해.
"저희 오전에 잠시 외출하고 와도 돼요? 아리 옷 사주려고요."
"그래, 다녀와."
오늘 반란이 일어난다면서 애들을 보내도 되나 싶었지만 월하가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 아무 말 않기로 했다.
식사가 끝나고 애들을 배웅해 준 후 무기들을 점검했다.
지금부터는 언제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단단히 대비해야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권총도 손질 해 놓는 걸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