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반란-3
"그러면 하연씨는 애들을 지켜 주실래요? 역시 애들끼리만 보내려니까 불안하네요."
"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
하연이가 성난 어투로 말했음에도 월하는 하연이를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었을 뿐이다.
"애들이 걱정되시지도 않으세요?"
"하아, 대신 이번 일 끝나면 대신 네가 오라버니랑 떨어져 있어야 한다?"
"좋아요. 기사님이랑 떨어져 있게 되는 건 슬프지만, 당신 없이 기사님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은 귀중하니까요."
다행히 원만히 합의된 모양이다. 아까 애들이 옷 사러 나간다고 할 때부터이렇게 일을 진행할 생각이었겠지.
하연이가 애들을 지켜 주신다면 안심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일은 없겠지.
로브를 깊게 눌러쓰는 걸 보니 애들 모르게 따라가려는 모양이다. 애들은 아직 아레나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로브의 정체가 하연이인 걸 모르니까.
"계약 내용 잊지 마, 이상한 짓 하면 죽여버릴 거니까."
문을 쾅하고 닫고 나갔다.
"그래서, 언제쯤 쳐들어오는 건데?"
"한 시간쯤 걸릴 거에요. 괜히 건물 망가지는 건 싫으니까 시간이 되면 내려 갈 거랍니다."
"그래."
몸을 어느 정도 긴장시켰다. 제대로 싸워보는 건 오랜만인데?
"푸하,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센 놈들도 아니라니까요?"
"일인데, 열심히 해야지."
"진짜, 고양이 같으셔라."
월하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월하가 나보다 작긴 했지만 내 눈썹 정도에는 왔기 때문에 자세가 엄청 이상하진 않았다.
"고양이 아니라니까."
월하의 손을 쳐내려고 손을 들을 때 월하의 눈빛이 바뀌었다.
"흡!"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온몸에서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이 들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당장에라도 삼켜질 듯한 공포감에 몸을 꼼짝하지도 못했다.
"아아, 귀여운 나의 고양이. 드디어 둘만 남았네요."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점점 밑으로 내려왔다. 귀를 지나서 뺨을 스쳐 목까지 내려와서야 손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마 이대로 힘을 주면 금세 죽어버리겠죠?"
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혔다. 작은 손에서 얼마나 큰 힘이 나오는지, 숨이 하나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힘이었다.
"커헉!!"
"걱정 마요.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냥 내 애완동물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느끼고 싶을 뿐이에요. 내 작은 손짓 하나에 무서워하고 아프기 싫어서 제 말을 듣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에요. 단지 그뿐이랍니다."
의식이 흐려졌다. 당장에라도 기절할 듯 정신이 아찔했다.
"아아, 기절시키면 안 되지."
내 목을 조르고 있던 힘이 풀렸다.
"당장 기사님께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어요. 하연씨와의 약속도 있고 너무 깨지기 전의 기사님을 최대한 오래 보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까요."
월하는 완전히 굳어버린 채 멈춰있는 나에게 안겼다.
"대신 기사님은 저희가 원하면 얼마든 망가뜨릴 수 있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만 알고 살아가 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기쁘답니다."
암흑가의 지배자답게 성격이 단단히 삐뚤어져 있다.
문제는 나에게 거부할 힘이 없다는 거지.
이건 치료가 될까? 하연이가 나에게 집착하는 건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일어난 병이지만 월하의 성격은? 천성일까? 아니면 암흑가의 지배자로 살아가면서 후천적으로 발생한 성격일까?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성격이라도 치료할 수 있을까?
"탈출구는 없어요. 기사님. 그저 기사님이 망가질 날만 기다리고 있으시면 된답니다."
광기와 집착이 가득한 그 말에 오히려 힘이 났다.
누가 너희 마음대로 움직여 줄 것 같아? 망가진 너다 월하야.
"기사님?"
"망가뜨릴 수 있으면 망가뜨려 봐. 대신 네가 고쳐지기 전에 망가뜨려야 한다?"
더 이상 월하가 무섭지 않았다. 아마 더 이상 기세를 담은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아서 그런거겠지.
"푸하하하, 재밌네요. 하연씨를 믿으시는 건가요? 하연씨가 옆에 있으면 제가 기사님을 못 망가뜨릴 것 같나요? 어차피 지금제가 한일도, 하연씨한텐 말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슬슬 내려가야 하지 않아? 건물 망가뜨리기 싫다며?"
억지로 말을 돌렸다. 월하는 나를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져준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긴 한데, 내려가 있죠. 제 부하들은 이미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요."
월하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가니 하연이한테 처맞았던 거한과 어제 가까스로 사과에 성공한 여자가 보였다. 월하는 스스로가 A급 각성자라 긴장한 기색이 없었지만 두 명의 얼굴을 보니 꽤나 긴장하고 있는 티가 났다.
"너무 긴장하지 말렴, A급 각성자가 옆에 있는데 겁을 먹다니, 너희는 그냥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여기서 대기하라 했을 뿐이야."
그녀의 당당하고도 오만한 말투에 둘의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봐 형님."
거한이 나에게 다가왔다. 월하가 나를 기사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고형님이라고 부르던데 나보다 나이 많은사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다고 했더니 놀랍게도 저 얼굴에 월하보다 어리댄다. 도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온 걸까? 액면가로 보면 30대라고 해도 안 이상한데.
"일이 끝나면 나랑 한 번 붙자. 아레나의 지배자라 불리는 남자는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거든."
"일단 로브부터 이기고 오지 그래?"
"로브? 이봐 형님 로브의 정체가 이 도시의 경비대장인 건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고, 굳이 자기 여동생을 로브라는 이상한 호칭으로 부를 필요 없다고?"
하긴 여기 안에선 편하게 돌아다녔으니까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
"그러면 말을 바꾸지 하연이부터 이기고 와."
"그렇게 빼지 말고 한 번만 붙자니까?"
"조건을 좀 완화해서 예지씨라고 했나? 월하 경호 대장부터 이기고 와?"
"예지 정도면 할 만하지. 이기고 나면 빼지 말라고 형님."
그런데 예지씨는 어딨지? 아무리 암흑가 전체에 부하들을 배치해 놨어도 경호 대장이라는 사람은 월하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예지씨는 어디 있는 거야? 아무리 월하가강해도 경호 대장이면 월하 근처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애들 지키라고 했었는데 하연씨가 애들 경호를 맡아주셨으니까요. 다른 곳에 배치했죠."
명령 내리는 모습은 못 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모르는 명령체계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근데 이렇게 1층에서 멍하니 있어도 되는 거야? 놈들이 어떻게 공격해 올 줄 알고?"
"어떻게 공격을 하든 어차피 노리는 건 제 목숨이잖아요? 결국, 이곳으로 오겠죠."
"놈들이 여기로 올까? A급 각성자는 격이 다르다는 걸 놈들도 알 텐데."
"올 거예요. 실제로 B급 각성자한테도 통하는 마탄을 놈들에게 넘겼거든요."
그러면 오히려 더 위험한 거 아니야?
"위험하진 않아요. 제 권능으로 무력화할 수 있게 특수 설계된 거고 A급 각성자인 저한테는 큰 타격을 입히진 못 하거든요. 맞아봤자 생채기 정도나고 말 거에요."
"애초에 소지 자체가 불법이잖아."
"제가 쓰는 게 아니라 놈들이 쓰는 거잖아요?"
뻔뻔하다. 아마 놈들의 의심을 뚫고 마탄을 넘기고 반란을 주동하게 만드는 과정은 내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겠지.
평범한 시민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겠지.
"계획은 완벽해요. 기사님이 없어도 완벽했는데 기사님이 가세한 지금이라면 아마 일말의 변수도 없겠죠."
`글쎄? 나의 존재 자체가 변수가 아닐까? 나는 각성자가 아니라서 무력화된 마탄에 맞아도 상처를 입는단다.`
굳이 입으로 말하진 않았다. 녀석들이 그 귀한 마탄을 나한테 쓸 것 같지도 않았고 설령 나한테 쏜다고 해도 방법이 있었으니까.
-죽여!!
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일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다. 단검을 꺼내 들고 있으니 어제 확인한 적들의 얼굴들이 보였다.
암흑가에서 힘깨나 쓰는 조직들의 보스라는 데 확실히 어제 확인했던 15명 전부 있었다. 또한, 그들의 부하로 보이는 인원 수십 명이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아, 이제 왔니?"
녀석들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월하의 목소리에서 함정의 가능성을 엿봤겠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겠지, 여기까지 몰려놓고 도망간다는 건 죽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면 이제 죽어 주렴."
월하의 권능인 무력화가 모든 적에게 가해졌다. 생생하게 느껴지던 각성자들의 기세가 그녀의 권능 앞에서 사그라들었다.
"이게 여왕의 힘인가?"
어제 확인했던 명단에는 없는 얼굴이었다. 그냥 보스들 근처에 있기에 적당히 높은 줄로만 알았던 놈한테서 심상치않은 기세가 느껴졌다.
월하의 권능 속에서 저렇게 멀쩡한 걸 보면 아마 A급 각성자겠지.
월하의 표정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