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사현이의 시점-3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예지 님이 아리를 데리고 식사를 하셨고 나는 빵 하나를 배식받은 채 아리가 쓸 훈련소를 청소했다.
열심히 빗자루 질 하고 물걸레질을 하다 보니 예지님과 아리가 돌아왔다.
"으으…."
아리가 우물쭈물하면서 나랑 예지님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봤다.
예지님께무슨 명령이라도 받은 걸까?
"진짜 해야 해요?"
예지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 청소는 잘해 놨어?"
"어, 다 했어."
어색한 대화였다. 아리랑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대화도 이렇게 어색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잘했어. 앞으로도 청소 열심히 해."
미안하다는 티 팍팍 내면서 말하는 게 오히려 내가 죄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동생을 위해 이 정도 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자 그러면 훈련을 시작하겠다."
또 한 시간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어제보다 강도가 더 높아진 것 같은데 아리는 잘 따라 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담긴 힘도 어제와는 비교가 안 될 것 같았다.
"오빠! ㄸ...땀 닦아."
아리가 새빨개진 얼굴로 나에게 명령했다…. 명령이라고 해야 하나?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 벌칙수행 하는 건가 싶기도했다.
빠르게 움직여 아리의 몸을 닦아 줬다. 아리는 어제와 같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웃는 것 같은 건기분 탓이겠지? 아리는 착한 아이니까 분명 내가 잘 못 본 걸 거야. 아니면 내가 실수로 간지럽히기라도 했나 보지.
거의 다 닦아 줬을 때쯤 훈련실의 문이 열렸다.
아리의 몸을 닦는 걸 마무리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 본 아저씨랑 여왕님, 그리고 하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누나가 들어왔다.
`진짜 아는 사이였구나.`
여왕님이 우릴 받아준 시점에서부터 여왕님과 보통 사이가 아닌 건 알았지만 저렇게 바로 옆에서 걸을 정도로 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다.
`기사님이라고 하던데 도대체 무슨 사이였던 걸까?`
"월하님 오셨습니까?"
"그래, 애들 훈련은 잘 시키고 있지?"
"네, 어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가 지금까지 훈련 시킨 애들 중에선 제일 성과가 좋습니다."
아리가 제일 성과가 좋다니, 오빠인 내가 괜히 우쭐해졌다.
"큼큼, 너는 이름이 뭐니?"
하얀색 머리의 누나가 아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아리는 아직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건 많이 무서운지 내 뒤로 와서 숨었다
"아리에요."
결국, 내가 대신 대답했는데 누나의 표정이 뚱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리가대답하지 않은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나?
"아리는 저쪽에서 나랑 얘기 좀 할까?"
아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예지님을 쳐다봤지만, 예지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결국, 아리는 반쯤 울먹이는 표정으로 구석으로 갔다.
말릴까 생각을 해봤지만 예지님도 못 말리는 사람을 내가 말릴 수는 없겠지. 일단 조용히 둘의 얘기를 들어봤는데 잘 들리지 않아서 포기했다
여왕님은 예지님께 다가가서 얘기하셨는데 나랑도 상당히 관련 있는 이야기였다.
"네? 아가씨도 같이 훈련받게 하라고요?"
"그래, 그게 더 나을것 같아서."
아가씨? 여왕님께 동생분이나따님도 있으셨나? 따님이 있으셔도 아주 어린 나이 일 테니까 아마 동생이겠지.
내가 그분의 수발도 들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니 괜히 우울해졌다. 어렵지는 않은데 누군가의 수발을 든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당히 깎여 나가는 일이다.
"어이, 꼬맹아, 훈련은 할만하냐?"
어제 본 아저씨…. 아니, 형이라고 하자. 솔직히 아저씨라기엔 액면가가 어렸으니까. 실제 나이는 몰라도 겉으로 보기엔 23살? 정도로 보였다.
아무튼 형이 다가왔다.
"저는 훈련 안 받아요. 아리 시종이나 들죠."
"그게 싫어?"
내 표정에 싫다고 쓰여 있던 걸까? 귀여운 여동생 수발을 해주는 건데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나라도 아리한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드니까 싫다기 보다는 좋다에 가까웠다.
"싫다기보다는, 조금 무료하죠. 맨날 제가 지켜주던 애인데 커서 오빠 지켜주겠다는 소리하는 거 보면 마음이 좀 그래요."
"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거지. 너도 정신적으로 동생을 지켜주면 되는 거 아니야?"
"정신적으로요?"
정신적으로 지켜줘? 나는 그런 능력이 없는데, 내가 무슨 정신계 각성자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 정신을 지켜?
"동생도 너를 많이 의지할 거라는 거지. 동생한테 지킴 당한다고 걱정할 거 없다는 의미야."
아, 그런 의미구나.
하긴, 아리는 남한테 많이 의지하는 성격이니까. 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진짜로요?"
"지금 네동생이랑 얘기하고 있는 누나 있지? 쟤가 내 동생인데 나보다 훨씬 쎄, 그래도 나는 너 같이 뚱해 있지 않지."
동생이었구나? 액면가는 비슷해 보이는데.
확실히 하얀 머리 누나보단 형이 훨씬 약해 보였다. 일단 형은 비각성자로 보였고 누나는 각성자 처럼 보였으니까.
근데 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나? 오늘로 두 번째 만난 사람한테 읽히는 정도면 아리도 눈치를 챘겠지.
표정관리를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뚱해 있던 적 없거든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편안하게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니까 형과 얘기하면서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여동생 보다 약하긴 해도 나는 오빠다. 오빠로서의 본분을 다해야지.
"그래도 고마워요. 형 덕분에 마음이 훨씬 나아졌어요."
형의 얼굴에 동정이 스쳐 지나갔다. 불길한 예감에 일단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나? 이수현, 너는?"
"저는 사현이라고 해요. 형이랑 이름도 되게 비슷하네요!"
"그러게."
짧은 시간에 굉장히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이름도 그렇고 자기보다 센 동생이 있는 것도 그렇고 비슷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가?
"그럼 앞으로 언니가 알려 준 대로 하는 거다?"
"네! 언니!"
아리도 그 사이에 씩씩해 진 걸 보니, 내가 수현이 형한테 동질감을 느낀 것처럼 하얀 머리 누나한테 동질감을 느낀 걸까?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동생이 성장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본다. 수련 열심히 하고 오빠 너무 괴롭히지 마."
"안 괴롭혀요!"
맞아, 우리 아리가 얼마나 착한 데 나를 괴롭….
어제 아리가 조였던 부분이 땡겨왔다.
밤새 푹 잤음에도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서 움직일 때마다 관절들이 시큰거리며 아팠다.
`이건 괴롭힌 게 아니야. 그냥 훈련일 뿐이잖아?`
아리는 절대로 나를 괴롭힐 애가 아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를 향해 다가오는 아리를 보고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오빠~"
"ㅇ…. 왜 아리야?"
"나 훈련 도와줘라."
"ㅎ…. 훈련?"
떨지 마, 떨지 말라고, 동생의 훈련을 도와주는 것뿐이잖아. 고작 이런 거에 무서워하는 거야?
아리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한 발자국씩 뒤로 걷다 보니 어느새 벽까지 밀려있었다.
"응, 혹시 싫어?"
씨익 미소 지으며 말하는 아리의 모습에차마 `응`이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
"거기에 힘을 더 주면 돼."
"이렇게요?"
"꺄흑!!"
`히히, 오빠 귀여워.`
분명 엄청 아플 텐데도 나를 위해서 고통을 꾹 참아내는 오빠의 모습, 어제는 이렇게 괴로워하는 오빠를 보고 많이 미안했고 괴롭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미안하지 않다.
`앞으로는 내가 오빠를 계속 지켜줄 거잖아?`
하연이 언니의 말이 기억났다.
`결국, 오빠를 위한 일이야. 그리고 네가 오빠를 지켜주는 건데 오빠가 널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오빠도 미안해할걸?`
`네 마음대로 오빠를 사용하는 게 오빠는 더 좋아할 거야!`
`사용이요?`
`으음, 사용이 아니라 부탁! 오빠한테 부탁을 많이 할수록 오빠는 널 위해서 일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 더 좋아할 거라고!`
확실히 언니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아마 엄청 아플 텐데, 당장에라도 그만하라고 하고 싶을 텐데, 이렇게 꾹 참고 있는 걸 보면 오빠도 나를 위해 무언갈 해주고 싶은 게 분명해.
오빠가 원하는 데 동생인 나도 따라 줘야지.
오빠는 참 대단한 사람 같아. 아마 엄청 괴로울 텐데도 나 부담될 까봐 비명도 집어삼키다니….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오빠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오빠 너무 좋아♥`
"꺄아아아아아악!!! ㅈ…. 잠깐만!!`
아, 실수로 힘을 너무 줬다. 스승님이 마나 때문에 신체 능력도 빨리 는다고 했으니까, 너무 힘을 주면 오빠가 많이 아프겠지.
오빠가 나보다 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나의 지킴을 받아야 하는 오빠,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오빠.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더 들어갔다.
"꺄아아아아아악!!"
이번엔 참지 못했는지 진짜 제대로 된 비명이 나왔다.
많이 아프겠지만 그래도 괜찮지 오빠? 오빠는 내 거니까. 나 없이는 못 사니까. 내가 오빠를 지켜주는 거니까. 오빠도 나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니까. 내가 맘대로 해도 돼.
헤실헤실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꼭 지켜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