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사현이의 시점-4
아파…. 진짜 미친 듯이 아파….
아리의 훈련은 하얀 머리 누나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다행히 누나가 돌아온 이후엔 둘이서 얘기도 하고 누나가 아리한테 가르침도 주면서 나는 뒷전이 되면서 더 괴롭힘…. 아니지, 더 훈련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솔직히 너무 아팠다. 훈련실 구석에서 누워있은 지 30분이 다 돼가는 데 아직 온몸이 다 아팠다.
"예지 언니! 저 왔어요."
"오셨습니까? 아가씨."
누운 상태로 고개만 돌려 문 쪽을 바라보니 여왕님과 굉장히 닮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예지님이 아가씨라고 하는 걸 보니까 아까 여왕님이 같이 배우라고 했던 그분인가.
일어나서 인사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가씨는 나한테는 관심도 가지지 않고 아리한테 달려갔다.
"네가 내 라이벌이야?"
"라이벌?"
처음 보는 사람이랑 떨지 않고 말할 수 있다니, 아리 너도 다 컸구나.
"언니가 그랬어! 내 또래 여자애가 들어왔다고, 나랑 좋은 상대가 될 거래!"
"좋은 상대? 글쌔…. 나는 배운지 얼마 안 돼서…."
아가씨가 예지님을 빤히 쳐다봤다.
"아리는 재능이 있는 아이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가씨에 비해서 많이 뒤처지지만 언젠가는 아가씨를 따라잡을지도 모르죠."
"진짜지? 아싸!"
"휴우…."
아가씨가 들어오자 왠지 모르게 경계하고 있던 하얀 머리 누나가 안도의 한숨을쉬는 게 보였다.
"넌 몇 살이야?"
"나? 아마 9살일 걸?"
"진짜? 나도 9살이야! 잘 지네 보자, 아리라고 했지? 나는 가연이라고 해!"
가연이 아가씨구나.
"그러고 보니 언니가 귀여운 오빠도 있다고 했는데."
귀여운 오빠? 나를 말하는 건가? 멋진 오빠도 아니고 귀여운 오빠가 뭐야….
"... 설마 저거를 말하는 거야?"
아가씨가 나를 보고 인상을 팍 구겼다.
"어디서 거지새끼를 주워왔어?"
확실히 내가 거지꼴이긴 했다. 수련 복으로 환복한 아리랑 다르게 나는 여기 올 때 입고 온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아가씨가 인상을 쓴 채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이거 아무래도 단단히 찍힌 것 같은데.
"야, 안 일어나?"
"ㅈ…. 죄송합니다."
아픈 몸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안 일어나면 진짜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확실히 생김새는 꽤 귀엽네. 노예로 쓰면 딱 좋겠어."
고개를 슬쩍 돌려 아리를 바라보니 안절부절못하는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왕님의 동생분이니까 함부로 말을 못 하겠지….
"더러운 눈으로 아리 쳐다보지 마."
-짝!
가뜩이나 아픈 상태에서 뺨까지 맞았다. 몸이 버틸 힘이 부족했는지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우리 오빠 괴롭히지 마!"
아리가 곧장 달려와서 내 앞을 막아섰다.
"어? 오빠?이 거지가?"
"거지라 그러지 마!"
아가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댔다. 이것까진 예상 못 했나 보지?
둘 사이의 분위기가 흉흉해지려고 하자 예지님과 하얀 머리 누나가 끼어들었다.
"아가씨 일단 점심 먹으러 가시죠."
"아리도 배고프지? 점심 먹고 마저 훈련하자."
아리는 문밖을 나설 때도 아가씨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 감싸주려다가 괜히 찍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꼬르르륵
`배고프다….`
오늘은 빵을 배급받을 여유는 없을 것 같다. 예지님도 당황한 표정으로 나가셨으니까.
푹신한 매트 위에서 뒹굴 거리다 보니 밥 먹으러갔던 여자들이 돌아왔다.
"아리야? 너도 이제 각성자잖아. 아무리 오빠여도 비각성자를 그렇게 신경 쓰면 안 되는 거야."
밥 먹으면서 어느 정도 화해를 한 걸까? 아리의 시선이 많이 누그러졌다.
대신 아가씨가 당장에라도 나를 찢어죽일 것처럼 쳐다봤다.
한 시간 정도 누워있으니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돼서 일단 아리한테 다가가서 속닥였다.
"아리야, 아가씨 너무 싫어하지 마."
"하지만 쟤가 오빠한테 거지라고 했잖아? 그리고 때리기도 했어."
"나는 괜찮아. 그리고 아가씨는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인데, 친해지고자 하는 애를 밀어내면 안 되잖아?"
나는 무슨 욕을 듣든 어떤 괴롭힘을 당하든 상관없었다. 아리가 잘 되는 게 중요하지.
"울지 말고."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미안해!!"
아리가 나에게 안겨왔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크면지켜주면 되지. 오빠는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마 뚝!"
아리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꼭 안아줬다.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가씨의 눈길이 따갑긴 하지만, 여동생 달래주는 게 훨씬 중요하지.
다행히도 아리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그러면 일단 훈련을 시작합시다!"
예지님의 지도하에 아가씨와 아리가 가볍게 대련했다.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아리가 순식간에 패배했지만, 아가씨는 오히려 눈을 빛냈다.
"아리, 어제부터 훈련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아리 진짜 대단해!"
자신 또래의 여자아이가 눈을 빛내며 칭찬해 오고 먼저 친해지고자 다가가니 아리도 금방 아가씨랑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뿌듯한 눈빛으로 아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아가씨가 나를 째려봤다.
"예지 언니, 쟤를 연습도구로 쓸게요? 아리도 아까 연습 도구로 썼으니까 나도 써도 되지?"
"어? 그게…."
아가씨는 아리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나에게 다가와서 아리는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아리는 너 따위랑 차원이 다른 인간이야. 괜히 아리 방해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보는 모습이 굉장히 무서웠다. 아리랑 동갑 맞아? 눈빛이 왜 이렇게 살벌….
-퍽!!!
"커헉!!"
`ㅂ…. 배가….`
한쪽 무릎이 털썩하고 꿇렸다.
"우웁…. 우웩!!"
빵을 안 먹은 게 다행이다. 아마 먹었으면 지금 다 토해냈겠지. 배 깊숙이 꽂힌 주먹이 너무 아파서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아직 안 끝났어."
-빠아악!! 퍼억!! 퍽!!
복날에 처맞는 개가 이런 기분일까? 한 대만 맞아도 죽을 것 같은 위력으로 수십 대를 맞았다.
다행히 죽기 직전에 예지님이 아가씨를 말려주셔서 살수는 있었지만, 진짜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 이후엔 기억이 없다. 반쯤 기절한 상태로 누워있다가 정신 차리니까 방이었다.
"오빠 내가 미안해애!!"
아리가 울면서 내게 안겨왔다.
"네가 미안할게 뭐가 있어. 아리는 잘 못 한 거 없어."
"하지만 내가 지켜준다고 해 놓고서 하나도 못 지켜 줬잖아."
"오빠는 괜찮아. 나중에 세지면 지켜주면 되지."
훌쩍이는 아리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흐윽..."
그렇게 아리를 안고 있길 10분, 얘가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인다.
"아리야, 이제 슬슬 씻어야 하지 않을까?"
"아, 맞다."
아리가 내 품에서 벗어나서 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같이 씻자."
"오빠는 혼자 씻고 싶은데."
"나는 오빠랑 같이 씻고 싶어!"
"아리야 부탁할게."
"나도 이렇게 부탁할게!"
아리가 오른손을 들었다.
-후웅
아리의 오른손에 선명한 마나가 깃들었다.
"ㅇ…. 아리야?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부탁`하고 있는데."
아리가 천천히 나에게 걸어왔다. 뒷걸음질 칠 새도 없이 아리의 오른손이 내 얼굴 바로 아래까지 다가왔다.
"아리는 오빠랑 같이 씻고 싶어. 오빠는 싫어?"
나 지금 협박당하고 있는 거야? 아리한테? 하나뿐인 여동생한테?
"아리야? 장난이지?"
말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나의 공포가 명확히 느껴졌다. 아리가 내 공포를 못 알아챌 리가 없어. 분명 장난이라고, 장난쳐서 미안하다고 하고 마나를 거둘 거야.
"응?"
아리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얼굴이 아릿했다.
"아리는, 오빠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내 안에서 뭔가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오빠?"
아리가 검지손가락을 살짝 들었다가 내 뺨을 쳤다. 얼굴이 짜릿하게 아파왔다.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끊어졌던 무언가를 강제로 묶었다.
수현이 형의 말을 기억해 냈다. 동생을 정신적으로 지켜줘야지.
엇나가지 않게 바로 잡아줘야지. 아직 끊어져선 안 된다. 절대로
"그래, 같이 씻자."
근데 지금은 아니다. 한 번만 더 간 보면 진짜 때릴 분위기야.
"좋아! 같이 씻자!"
"먼저 들어 가 있어."
"오빠 안 들어오면 나 화낼 거야!"
아리가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착하던 아리가 어쩌다 저렇게 된 걸까. 역시 힘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걸까?
옷을 벗었다.
수많은 상처 자국들이 몸에 남아있었다. 멍들도 있고 까져서 피가 난 부분도 있고 새빨갛게 자국이 남은 부분도 있었다.
"어째 여기 와서 더 고생하는 거 같네."
상처도 훨씬 많고 밥도 덜 준다. 평소엔 못 해도 빵 두 개는 먹었는데….오늘은 아침에 먹은 빵 한 개가 끝이다.
`배고프네….`
일단 욕실로 갔다. 더 안 들어갔다간 아리가 화낼 것 같으니까.
"아리야. 잠깐 눈 좀 감고 있을래?"
"응? 알았어."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리가 눈을 감고 있었다. 재빨리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러면 상처가 좀 덜 보이겠지.좀 쓰라리긴 했지만 괜찮았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는 아픔이었다.
"이제 눈 떠도 돼?"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 아리가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었다.
"오빠, 일어나봐."
`들켰나 보네.`
하긴 물로 가려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천천히 일어났다.
"다 가연이 때문에 생긴 거지? 내가 미안해…. 앞으론 꼭 지켜줄게."
절반은 네가 만든 거란다.
그래도 자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고 자책하지 않게 됐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리는 아마 화기애애하게 씻는 걸 기대한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목욕을 마쳤다.
"잘까?"
"...응."
아리에게 잠옷을 입히고 침대에 누웠다.
"아리야."
"왜 오빠?"
"아까 왜 그랬어?"
아까 아리가 나에게 협박을 한 걸 떠올리자 순간적으로 감정이 복받쳤지만, 최대한 말이 격해지지 않게 조심했다.
"어?"
"아까 오빠 협박했잖아."
"ㅎ…. 협박이라니?!"
스스로도 찔리는 지 아리의 몸이 떨려왔다.
`협박인 건 아는 모양이구나.`
"오빠 진짜 무서웠어."
굳이 연기할 필요도없었다. 아까 나를 협박하던 아리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몸이 떨렸으니까.
"아리는 오빠가 아리한테 겁먹는 걸 원하는 거야?"
"ㄱ…. 그런 거 아니야!"
"아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해줬으면 해? 오빠의 의지와 상관없이?"
"ㅇ…. 아니야아…."
아리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끼는 게 느껴졌다. 미안하긴 했지만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오빠가 아리 노예할까? 주인님이라고 불러줘?"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어투가 사나워지면 화내는 게 돼버리니까.
"흐아아앙, 아리가 미안해."
동생을 울리는 나쁜 오빠가 되어버렸네.
"앞으로 안 할게! 절대 오빠한테 협박 안 할 거야."
"고마워 아리야."
아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리가 지쳐서 잠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