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하연이와의 데이트-1
"아 해!"
"ㄴ…. 네…."
여왕을 무너뜨리려고 일어난 반란 세력이 하루 만에 사그라든 다음 날, 우리는 평화로운 아침을맞이했다.
일주일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 반란이 단 하루 만에 제압된 건 월하가 S급으로 승급했기 때문이었다.
암흑가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자를 대상으로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반란은 순식간에 진압 돼버렸다.
`그나저나 쟤네는 하루 만에 엄청 친해졌네.`
역시 애들끼리는 밖에서 뛰댕기면 금방 친해지는 모양이다.
어제 애들끼리 무슨 일 있었고 사현이가 어떻게 가연이를 꼬셨는지 몰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옷 사러 갔다 와도 돼요?"
"그래 다녀오렴."
애들이 떠난 후 묘한 적막감이 집안에 감돌았다.
"그러면 약속대로 오늘 하루는 오라버니랑 나랑 둘이서 데이트하고 온다."
"네, 다녀오세요."
하연이가 나에게 팔짱을 껴왔다.
"오늘 하루는 저희 둘이서만 재밌게 놀아요."
"어어, 근데 경비대장 일은 안 해도 되는 거야? 안 돌아간 지 일주일이 다 돼가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여기 와서도 무전으로 할 일을 다 하고 있으면 큰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해놨어요."
참 편하게 일하는구나.
일하니까 생각 난 건데 사장님께 안 찾아간지도 꽤 오래됐네.
"가는 길에 사장님 좀 뵙고 가도 돼?"
"좋아요. 대신 너무 오래 있진 마세요. 오늘 뭐 할지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놔서 시간이 빡빡해요."
"알았어.금방 끝낼게."
월하가 준 검은 색 로브를 깊게 눌러 썼다. 아레나에서 얻은 인기가 워낙 큰 나머지 그냥 나갔다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알아본다.
하연이의 경우는 오히려 로브를 쓰면 사람들이 알아봐서 머리만능력으로 염색했다.
어떻게했냐고 물어보니까 S급 각성자가 되면 이 정도는 누구든 할 수 있다더라.
암흑가를 빠른 걸음으로 통과한 우리는 바로 총포상으로 향했다.
10년간 총포상에서 일해온 나였지만 오늘 총포상의 모습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당분간 쉽니다.
10년 넘게 영업하면서 한 번도 쉰 적이 없는 가게에 붙어있는 하얀 종이는 정말 어색했다.
"오라버니 찾으러 가신 거 아니에요?"
"착하신 분이긴 한데 그렇게 정이 많으신 분은 아니셔. 그리고 경비대장 손에 끌려갔는데 할 얘기 있으면 경비대에 말이라도 한 번 하셨겠지."
문을 몇 번 훑어 보니 딱히 특별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문 앞에 화분이 나와 있지도 않았고 간판에 무슨 자국이 새겨져 있지도 않았다.
"애들 시켜서 찾아볼까요?"
"아니야, 사장님도 개인 사정이 있으신 거겠지. 필체도 사장님 글씨가 맞으니까 아마 아무 일 없을 거야."
나 줄 월급 모으려고 매일 장사하시다가 내가 일을 그만둔 김에 여행이라도 떠나신 게 아닐까? 쾌활하신 분이니까 충분히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그러면 데이트하러 가자. 에스코트 부탁해도 되지? 이미 뭐할지 전부 짜놨다면서."
"그럼요.맡겨만 주세요."
하연이는 일단 내 머리에 쓰인 모자부터 벗겼다.
여동생한테 벗겨진 다라,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
"여긴 암흑가가 아니니까 굳이 가리고 다닐 필요 없잖아요? 다른 여자가 오라버니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저도 봐야 하니까요."
"나 같은 인간 얼굴을 굳이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월하나 너 아니면 딱히 내 얼굴을 신경 써서 볼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잘 생기지도 않았으니까."
"오라버니가 그렇게 자기 외모에 신경을 안 써서 더 걱정되는 거라고요! 오라버니가 초절정 미남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잘생긴 얼굴이란 말이에요!"
"옆에 있는 사람이 초절정 미녀니까 사람들이 네 얼굴을 보면 봤지 내 얼굴을 안 보지 않을까?"
뜬금없는 나의 칭찬에 하연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오라버니도 참, 부끄럼도 많으시지, 칭찬을 꼭 그렇게 하셔야겠어요?"
좋아 계획대로 됐어.
"시간 없다면서? 빠릿하게 움직여야지?"
"부끄러우신 거죠? 알았어요. 더 말 안할게요."
하연이가 헤헤 웃으면서 팔짱을 껴왔다.
키가 비슷한 우리였기에 자세는 편했다.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가 따가워서 문제지.
동생이에요 동생, 연인 아니니까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마.
하연이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커다란 빌딩이었다. 도시 중심부엔 빌딩이 꽤 많이 존재한다는 걸 자주 봐오긴 했지만 실제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이 빌딩엔 슬픈 전설이 있데요."
"귀신이라도 나온 데?"
"도시 한복판에 귀신이 나오면 큰일이죠. 경비대 난리 날 걸요?"
게이트에서 나오는 귀신을 말하는 게 아닌데, 하연이는 아직 귀신을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면 무슨 슬픈 전설이 있는 건데?"
"대격변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건물주가 세운 건물이래요."
"그게 슬픈 전설이야? 그냥 사실 아니야?"
"건물 들어가자마자 그렇게 적혀있는 걸 어떡해요."
하연이가 가리키는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스크린에 적혀있는 문장들이 보였다.
짧은 글은 아니었기에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건물엔 슬픈 전설이 있습니다. 건물주님이 대격변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슬픈 전설이죠. 그래서 건물주님은 사랑하는 이들을 추억하기 위해 이 건물을 세우셨습니다. 다들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놀러 오세요.`
마케팅 담당이 누굴까? 건물주란 사람은 이런 글을 입구에 달아 놓은 걸 허락 해 준거야?
"아무튼, 여기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많이 놀러 오는 곳이에요. 가족들이랑도 놀러 오고 연인이랑도 놀러 오죠. 저희처럼요!"
너랑 나는 가족으로 온 거다. 알지?
"입장료가…. 한 사람당 15만원? 왜 이렇게 비싸?"
"애초에 부자들을 위해서 있는 곳인 걸요. 제가 낼 테니까 오라버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하연이가 지갑에서 현금으로 30만원을 꺼내서 결재했다.
30만원? 뭔가 익숙한 금액인데….
`아, 저번 주에 계약한 집`
그 집 월세가 30만원이었지.
무슨 건물 입장료가 월세값이야.
"오라버니! 결제했어요. 이제 들어오시면 돼요."
"어어, 그래."
하연이를 따라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 왜 이 건물의 입장료가 이렇게 비싼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수족관이라니, 대격변 이후에 수족관이라니! 너무 사치스러운 거 아니야?`
물고기는 기본적으로 고기보다 값이 더 나가는 귀한 몸이다. 그런 비싼 것들을 이렇게 사방에 가득 채워놓고 있으니 입장료를 비싸게 받지 않으면 건물을 유지 할 수 없으리라
"오라버니, 이거 봐요! 물고기들이 너무 예뻐요"
확실히 푸른 물속에서 떠다니는 물고기들은 굉장히 예뻤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처음 보이는 곳이어서 그런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수족관을 구경하고 있었다.
거대한 물고기들은 없었지만,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은 최근 들어 지친 나의 마음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그러게 이쁘네."
"이제 다음 층으로 갈까요?"
"그래, 가자."
1층을 구경한 것만으로 이 빌딩에 나를 데려와 준 하연이에게 감사하긴 충분하리라.
집에 돌아가면 하연이한테 감사 인사를 해야지.
"2층은 어린애들을 위한 곳인가 보네요."
"그런가 보네."
슬쩍 훑어 보니 넓게 펼쳐진 트램펄린 방과 풍선으로 만들어진 성들이 보였다.
저런 데서 뛰어다니는 게 뭐가 재밌나 싶었지만, 아이들의 입에서는 미소가 가득했다.
도시 외곽에선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에 가슴이 아려왔다.
"나중에 애들 데리고 오자. 좋아하겠다."
사현이는 안 좋아할 수도 있겠다. 어린놈이 철이 빨리 들어서, 이런 곳에 데려와 봤자 놀면서 즐기는 게 아니라 아리랑 가연이를 놀아주는 마음으로 있겠지.
애들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사현이의 모습이 상상이 됐다.
"그러게요. 다음에 시간 나면 꼭 데려와요."
"아들이랑 딸이 생긴 기분이네. 결혼도 안 했는데."
"사현이랑 아리가 아들딸이면 부인은 누구에요?"
가연이는 쏙 빼놓고 말하는 거 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연이와 하연이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고 월하와 아리도 그렇게 사이 좋가 좋진 않았다.
월하는 암흑가의 지배자니 만큼 자신의 밑에 속해 있는 아리한테 살갑게 대하지 않아도 어색함이 없지만 하연이 얘는 아리한테는 살갑게 대하면서 가연이 한테는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 지 모르겠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하연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지는 뻔히 보였지만 그 기대에 응해주진 않았다
"부인이 어딨어 그냥 아들딸이 생긴 기분이라는 거지. 입양이야 입양."
실제로 입양과 굉장히 비슷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기도 하고.
"다음 층으로 가자. 여기서 애들처럼 놀 건 아니잖아?"
하연이의 등을 밀어서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