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하연이와의 데이트-2
3층은 왠지 모르게 핑크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분명히 분홍색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아마 3층에서 돌아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이 남녀 한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인들이 이렇게 많으니 당연히 분위기가 핑크빛일 수 밖에 없지.
"우리가 돌아다닐 만한 데는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소리여요. 오라버니, 여기야말로 저희가 다니기에 딱 좋은 곳이죠. 저희 사이니까요."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인데?
네가 아무리 나를 좋아해도 나는 너를 사랑해 줄 수 없단다.
그러니까 제발 남매 사이로 남자.
`라고 말하면 아마갈갈이 찢기겠지?`
저번처럼 폭주해서 나를 노려볼지도 몰랐다.
언제까지고 이런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 할 수 없으니 한번 말하긴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평화를 즐기고 싶다.
"어때요?"
"나쁘지 않네."
연인들 사이에 추억을 만드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크게 드는 곳이었다. 사진을 찍을 만한 곳도 많았고 구경할 곳도 많았다.
소소한 이벤트도 많았다. 팔짱을 낀 상태로 입장하면 할인해 주는 곳도 있었고 볼에 뽀뽀 하는 사진을 제시하면 인형을 주는 곳도 있었다.
하연이한텐 미안하게도 너무 부끄러운 일이라 인형을받진 못했다.
그렇게 30분 동안 3층을 돌아다닌 우리의 종착지는 한구석에 작게 차려진 카페, 평범한 작물도 구하기 힘든 세계에서 커피콩을 수확해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역시 부자들은 다르구나 싶었다.
"신나게 돌아다녔네요."
"그러게, 재밌었어."
핫초코를 한 모금 쭉 빨아먹었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강한 단맛이었다. 최근엔월하의 집에 살면서 단 음식을 자주 먹긴 했지만, 이 정도로 단맛은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돈 만 있으면 매일 같이 사 먹었을 텐데 참 아쉽네.
"오라버니는 그게 맛있어요?"
"응, 달달한 게 맛있어."
하연이가 마시고 있는 건 에스프레소, 엄청 쓴 커피라는 데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잘도 마시는 걸 보면 참 신기했다.
"그거엄청 쓰다는 데 맛있어?"
"쓴맛에 먹는 거죠. 궁금하면 한 입 드셔 보실래요?"
하연이가 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컵을 내밀었다.
S급 각성자여도 몸이 떨림을 숨길 수는 없는 건지 아니면 나 긴장하고 있어요. 하고 밝히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연이의 손은 긴장한 듯 떨리고 있었다.
간접키스를 의식하는 듯 보였는데 남매 사이니까, 크게 신경 안 써도 상관없겠지.
"한 모금만 먹어볼게."
컵을 받아서 한 입 삼켰다.
확실히 쓰다는 느낌은 있었다. 기분이 막 나빠지진 않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확실히 좀 쓰긴 하네, 맛이 없는 건아닌 데 내 취향은 아니야."
하연이에게 컵을 돌려주자 내 손에 들린 핫초코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연이의 시선이느껴졌다.
"너도 내거 한 모금 먹을래?"
"네! 한입 먹어볼래요."
말하자마자 핫초코를 잽싸게 가져가는 걸 보니 어지간히 먹고 싶었나 보다.
"켁켁!! 이거 뭐에요. 왜 이렇게 달아요?"
한입 먹어보더니 얼굴이 사색이 돼서 나에게 컵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하연이는 단 걸 잘 못 먹는 모양이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달게해달라고 했거든. 근데 그렇게 달아?"
"설탕을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이렇게 달진 않을 것 같은데요."
설탕을 숟가락으로 퍼먹는다니, 도대체 얼마나 큰 사치인 걸까?
핫초코를 받아서 한 모금 입안에 머금었다가 삼켰다.
머리가 찌릿해질 정도의 단맛이 내 스트레스를 전부 날려주는 기분이었다.
"오라버니, 도대체 그걸 어떻게 마시는 거에요?"
"나는 단 걸좋아하니까 그렇지. 네가 단 거 안 좋아한다고단 거 잘 먹는 사람 차별하는 거야?"
"단 걸 잘 먹는다고 먹을 수 있다는 정도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긴 하연이의 표정에 마음 한구석이 콕콕거리며 아파왔다.
"이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어? 단 걸 좀 잘 먹을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오빠 상처받는다."
얘기하면서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어느새 컵을 전부 비워버렸다. 내가 잔을 비워내자마자 벌컥벌컥 커피를 마시는 하연이를 보니 조금 천천히 마실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들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죠."
"위층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요. 다른곳으로 갈 거예요. 위로도 층이 많긴 한데, 한 날에 전부 도는 것 보다는 여러 번 와서 차근차근 즐기는 게 더 좋은 곳이거든요."
여기 온지1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나가? 30만원이나 쓰고 들어온 곳인데 1시간만 즐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돈을 낸 건 하연이니까. 그녀의 말에 따라야지.
"어디 갈 건데?"
"슬슬 점심시간이니까 밥 먹으러 가요. 진짜 맛있는 음식이 뭔지 알려드릴게요."
밥 먹을 때마다 월하랑 그렇게 맛 가지고 싸우더니 오늘은 단단히 결의 다진 모양이다.
얼마나 맛있는 데로 데려다줄지 기대됐지만,어차피 내 입맛은 월하네 뷔페나 내 요리나, 고급 음식점이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어디를 데려다주려고 그렇게 자신만만해?"
"제가 아는 한 가장 맛있는 곳이에요. 오빠 입맛에도 잘 맞을 거에요. 고급 식당 느낌은 아니거든요."
"숨은 맛집 느낌이야?"
"빙고, 저랑 친한 사람 몇 명 밖에 모르는 곳이에요."
"너랑 친한 사람? 너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네, 이 도시가 아니라 옆 도시에 있는 음식점이거든요."
***
대격변 이후 사람들은 도시 단위로 뭉쳐 살기 시작했다. 수 없이 나타나는 게이트를 모두 막기엔 역부족이었으므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일정 구역을 지정하고 그 구역 내의 게이트만 처리하는 방식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20년쯤 전부터 시작된 도시 세우기는 성공스런 성과를 거둬서 도시 외곽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몬스터로 인한 위협을 느낄 수 없는 세상이 왔다.
어딜가도 몬스터가 보였고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하나의 도시 안에서 시민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래 도시 안에선 말이다.
도시 밖은 과거보다 더 살기 힘든 곳이 됐다. 20년간 수도 없이 생성된 게이트로 인해 완전히 몬스터 밭이됐으니까.
다행히 몬스터들끼리 싸우느라 바빠서 대대적으로 도시를 침공하진 않았지만 어딜가도 몬스터가 보이는, 그야말로 인외마경이라는 말이 절로 어울리는 곳이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하연이의 시선이 닿는 곳에 존재했던 모든 몬스터들이 썰려 나갔다. 일말의 저항도 못 하고 죽어 나가는 걸 보니 오히려 몬스터들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어릴 때는 손을 휘두른 다거나, 이를 꽉 깨무는 등의 시동이 필요했던 걸로 기억했는데 지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몬스터들이 학살당했다.
"오라버니는 그냥 편하게걸으시면 돼요. 이 길은 양쪽 도시를 오가는 행렬이 가장 자주 다니는 곳이라서 위협적인 몬스터가 나오면 금방금방 처리하거든요."
"이 길로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어?"
"A급 인원 한 명만 있어도 충분히 오갈 수 있는 길이에요. 같은 태양길드 휘하 도시라서 은근히 자주 쓰이는 길이랍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쓰일걸요?"
나랑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에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마 대격변 이전엔 평범한 도로였겠지만 지금은 군데군데 박혀있는 콘크리트를 제외하곤 삭막한 평야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특이 사항은 마목이라 불리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는 거? 확실히 관리를 받는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는 데 얼마나 걸려?"
"30분 정도 걸려요. 빨리 가려면 빨리 갈 수 있는데 오라버니가 좀 힘드실걸요?"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말고 뛰어가면 빨리 갈 수 있어요. 라고 말하지그래?"
"그렇게 말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리고 애초에 오라버니가 뛸 일은 없는 걸요."
"그러면 어떻게 가는 건데."
"이렇게요."
하연이가 내 몸에 손을 대더니 시야가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공기저항이 가져다 주는 가속도가 내 몸을 누르길 잠시 처음 보는 성벽이 나를 맡이했다.
"도착했어요."
"... 너 순간이동도 할 줄 알아?"
"아뇨, 그냥 빨리 이동한 것 뿐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S급이니까, 걸어서 30분걸리는 거리를 1분만에 주파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그것도 옆에 비각성자가 다치지 않게 조절도 해주고 말이야.
"오빠는 솔엔 처음 와보죠?"
"솔?"
빛이 날 것 만 같은 이름이었다.
"이 도시 이름이에요. 태양 길드의 수도랑 비슷한 곳인데 이름도 없으면 안 된다면서 길드장이 멋대로 지어버렸어요.
진짜 대충 지은 티가 팍팍 나는 이름이었다. 어떻게 도시 이름을 솔, 외자로 지을 생각을 했을까.
"일단 들어가죠. 도시 밖에서떠들어도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연이를 따라서 걸어가니 도시의 입구로 보이는 곳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