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하연이와의 데이트-4
알았다는 표정으로 하연이의 검지 손가락을 톡톡 치자 금방 손을 치워줬다.
입이 풀렸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연이만 바라봤다.
일주일 정도 같이 지네긴 했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예쁜 얼굴이었다.
예쁜 것도 예쁜 건데 눈동자랑 머리카락이 너무 튀는 색이라 쉽게 익숙해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왜 그렇게 바라보세요?"
"그냥, 예뻐서."
하연이의 볼이 확 붉어졌다.
아차 싶었다.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거지만 하연이가 나한테가지고 있는 무거운 감정을 생각하면 이런 칭찬은 최대한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법.
한 번쯤 칭찬했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오라버니도 잘생기셨어요."
퍽이나 잘 생겼겠다.
나는 잘 생긴 편이 아니다.
평범하게 생겼다기엔 흔한 인상은 아니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땐 분명 잘 생겼다. 라고 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런 나를 두고 잘 생겼다. 말하는 하연이의 눈에는 일말의 거짓도보이지 않았으니 콩깍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었다.
"나랑 떨어져 있을 때는 어떻게 지냈어?"
나는 하연이를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우리 사이를 남매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하연이와 헤어진 게 15년전이니, 지금까지 살아왔던 날 중에 절반 이상을 떨어져 있었다.
그 동안은 조금 바쁘기도 했고, 이렇게 둘이서만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하자고 미뤄왔지만, 지금만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때가 언제 또 날 수 있을까?
"오라버니한테는 죄송하지만 나름 잘 냈어요. 가끔 오라버니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밤새 울었던 걸 제외하면 친구도 사귀고 부하들이랑 관계도 좋았어요."
"오빠한테도 소개시켜 줄 수있어?"
"되는 친구도 있고 안 되는 친구도있어요. 일단 오늘은 저랑 데이트하러 온 거니까, 오늘은 안 되지만 다음에 솔에 오면 꼭 소개 시켜드릴 게요."
여성은 안 되고 남성은 되는 건가?
"뉴스에서 볼 때는 엄청 무서운 인상이었는 데 친구나 부하들한테는 아니었나 봐?"
하연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는 내가 하연이랑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서로 알아 차리고서는 둘 다 모른 척 했을 때, 뉴스에서 비춰지는 하연이의 이미지는 딱 그 느낌이었다.
"그건 일 적으로 처음 만난 사람한테나 보여주는 성격이에요. 인터뷰를 하는 데 평소 성격을 드러낼 순 없잖아요? 나름 진지하게 하려고 노력한거에요."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무서워 보이던데? 나 너 오랜만에 만났을 때도 무서워서 쓰러질 뻔했잖아."
"쓰러지셨잖아요."
분명 하연이가 길에서 빠져나간 다음에 넘어졌는데 도대체 언제 본거지?
"그래, 오빠 쓰러뜨려서 참 좋겠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지내 셨어요?"
"나? 그냥 평하게 지냈지, 총포상에서 일하면서 돈 벌고, 일 다 끝나면 집 가서 자고,"
"거짓말, 평범하게 지낸 사람이 어떻게 암흑가에서 호위임무를 해요?"
그야, 그 때를 기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으니까.
"월하 지켜주는 걸 마지막으로 평범하게 살았거든?"
가끔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워낙 흉흉한 세상이니까 그 정도는 평범한 삶에 포함되겠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월하 말고 다른 여자를 또 구하거나 하진 않았죠?"
아니, 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일단 머릿속을 탐색할 필요 없이 한 명이 떠올라 버렸으니까.
"오라버니? 왜 대답을 못 하세요?"
은근한 기세가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인제 와서 없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겠지.
"오라버니? 진짜 있는 거예요?"
"아니…. 나도 사람이니까…. 위험한 사람 있으면 구해주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도대체 어떤 평범한 사람이 위험한 사람을 구해주냐고요?! 보통은 그런 사람 버리고 도망간다고요."
"아니, 구할 수 있는 데 안 구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나를 누르는 기세가 강해졌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흠칫하면서 이쪽을 쳐다보는 걸 보니, 기세를 제어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연아, 장사 방해되겠다. 조금 진정해봐."
"지금 여기 장사 잘 되는 게 중요해요? 어떤 년이에요. 어떤년을 구해 줬어요?!"
"이름도 몰라, 그쪽도 내 이름 모르고, 별 사이 아니니까 너무 화내지 말고 진정 좀 해봐."
간곡히 부탁하자 그제서야 기세가 누그러졌다.
평소에는 착하고 귀여운 여동생인데 여자 얘기만 나오면 너무 사나워진다.
"일단, 놀러 나온 거니까이쯤에서 넘어가 드릴게요. 나중에 집에 가면 제대로 해명하셔야해요."
"해명까지야…."
하연이의 기세가 약해진 틈에 빠르게 달려온 사장님이 라면만 놓고 도망가셨다.
"라면 나왔으니까 먹죠."
"그래…."
아무래도 사장님께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긴 한데, 지금은 나 하나 살기도 힘들 것 같은 분위기라서….
나중에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있다면 꼭 사과 드리자.
라면의 퀄리티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월하의 집에서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던 내 눈에도, 이건 개 쩌는데? 싶을 정도였으니까.
일단 면은 겉으로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면이었다. 젓가락으로 살짝 집어보니, 적당한 탄력 있고 쫄깃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면 외에 다른 건더기들도 훌륭했다. 몬스터 고기인지동물의 고기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고기가 꽤 많이 들어있었고, 채소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숙주도 꽤 많이 들어있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말하기 번거로울 정도로많은 건더기가 들어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고 한 젓가락 먹어보자, 내 생각보다 훨씬 맛있는 면발에 충격을 받았다.
국물 맛을 논하기 이전에 너무 탄력 있고 쫄깃한 면발에 도대체라면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싶었다.
국물도 적당히 매우면서 깔끔했다. 뭐로 우려낸건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국물만 먹어도 든든해질 것 같은 맛이었다.
실제로 숫가락으로 조금 떠서 먹으니 마음이 충만해지는 만족감을 선사했다.
"와…. 진짜 맛있다."
"제가 말했죠? 진짜 맛있는 곳이라고요. 가격이 좀 비싼 게 흠이긴 하지만요."
"얼마나 하는데?"
"한 그릇에 15만원이요."
-덜그럭.
붕어빵이 만 원씩 하는 세상이었지만 라면 한 그릇이 15만 원이라니…. 너무 비쌌다.
역시 이렇게 맛있는데 손님이 별로 없는 데엔 이유가 있었어.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들이 한 끼 식사에 15만원씩 쓸 수 있는 부자들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주눅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어서 자주 먹는 곳이었어요."
"네가 밥 먹는 데 부담되는 가격이 있어?"
"백만원씩 하는 데는 매일 먹기엔 조금 무리가 있죠? 식비로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도 싫어서요."
백만원짜리 밥은 어떤 맛일까? 맛과 비용이 정비례하진 않겠지만, 하연이가 백만원을 내고 먹는 식당이라면 그 정도 가치가 있다는 거니까, 확실히 맛있겠지?
일단 라면이나 더 먹어야겠다.
근데 젓가락이 어디 갔지?
살짝 시선을 돌려보니 식탁에 떨어져 있는 젓가락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 한 그릇이 15만원라는 말에 놀라서 떨어뜨린 모양이다.
젓가락을 들고 다시 라면을 먹었다.
한 젓가락 먹을 때마다, 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내 돈 15만원을 주고사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남의 돈 15만원, 그것도 S급 각성자인 하연의 지갑에서빠져나가는 15만원짜리 음식이라고 생각하니 돈이 아깝지 않았다.
반절 정도 먹고 고개를 들어보니 하연이는 이미 국물까지 다 먹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먹는 속도가 좀 느리지?"
"아니에요, 맛있게 밥을 먹는 오빠는 귀여우니까 모든 게 용서돼요."
일단 용서를 한다는 건 잘못은 하고 있다는 거지?
수준급 돌려 까기다.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일단 젓가락질 속도를 늘렸다.
"진짜 맛있게 먹었다."
양도 적지 않은 편이라서, 배부르게 먹었다.
"여긴 다 좋은 데 여러 그릇을 시킬 수 없는 게 문제에요. 늘 양이 부족하다니까요?"
S급 쯤 되면 식사량이 늘어나는 걸까? 나는 꽤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하연이한테는 아무래도 부족 했나 보다.
하긴 평소에 집에서 밥 먹을 때도 밥 3공기는 금세 비우는 애니까.
단순 계산으로 따지면 라면도 3그릇은 비워야 배가 차겠지.
"자 이제 디저트 먹으러 가요."
계산하면서 말하는 하연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기대감이 차올랐다.
분명 맛있는 곳이겠지? 너무 만족스럽게 식사를 해서 디저트도 자연스럽게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