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루시아-1
이게 얼마 만에 마시는 신선한 공기인지.
맨날 무언가가 썩어가는냄새만 맡다가 이런 연약한 공기를 맡게 되니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태양길드 놈들, 말로만 우리를 척결한다, 없애 버린다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됐잖아?
너희도비각성자들을 한 번쯤은 눌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의도는 뻔했다. 아마 우리를 날뛰게 해서 도시에 전체적인 혼란을 일으키고 그걸 제어하면서 지배력을 확고히 하려는 셈이겠지.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됐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겠지.
`지금 이 도시엔 S급 각성자가 없다.`
길드장은 게이트 공략을 떠난다는 명목으로 도시를 비웠고 백하연은 옆 도시로 발령 났다.
전달받은 정보에 의하면 반란의 기운을 아예 모르고 있다고 하니,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것이다.
`A급 최강.`
그게 내가 가진 별명 중 하나였으니까.
`일단 벌레들 좀 괴롭혀 줄까?`
일단 주변엔 벌레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A급 빌런이 갇혀 있는 곳 주변엔 살고 싶어하는 사람 따위는 없겠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번화가로 나섰다.
내가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벌레들이 한가롭게 번화가를 거닐고 있었다.
천천히 내 권능을 발현시켰다.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번화가를 가득 채워나갔다.
권능이 발현되고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번화가 전체가 독한 가스에 뒤덮였다.
벌레들의 비명이 내 귀를 즐겁게 해줬다.
어차피 독성도 없는데 뭘 저렇게 괴로워하는지.
입꼬리가 씰룩씰룩하고 올라갔다. 약자들이 내 권능 속에서 고통받는 모습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래, 약자는 강자한테 복종해야지. 그게 당연한 거잖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약하다는 이유로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었는 데 너희는 그렇게 행복하게 있으면 안되지
아무 생각 없이 걸어만 가도 비명이 가득 울려 퍼졌다.
한참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때 각성자로 보이는 이들 몇 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A급 각성자 하나에 C급 각성자 2명,
참나, 이 정도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같은 A급 사이에도 엄연히 격이라는 것이 있다.
저런 쩌리 A급따위 3명이 동시에 덤벼들어도 상대해줄 수 있었다.
나를 막으려면 백하연이나 길드장 정도는 데려와야지, 하다 못해 김서연이라도 데려와야 유의미한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다.
"왜 나를 막는 거지? 나는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건데 말이야."
"무고한 시민을 해치는 걸 가만히 볼 수 없다."
무고한 시민? 웃기고 자빠졌네. 이 세상에 무고한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도시 외곽에서 위험해 처한 이들은 도와주지도 않는 놈들이잖아? 무고한 시민이 아니라 부유한 시민이겠지.
내가 그렇게 고통받을 때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으면서.
죽여버릴까 고민이 들었지만일단은 살려두기로 했다.
그들은 남을 지배할 권리가 있는 강자들이었으니까.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아서 이러는 것 뿐이다.
번화가 전체에 휘감았던 기체들을 모아 A급 각성자를 압박했다.
뭔가 권능을 발현하려는 듯 하는 것이 보았지만, 너무 미약했다. 기체의 독기를 천천히 끌어올리다 보니, 3분 만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른 각성자들? 이미 내 독기에 쓰러진 지 오래다.
그래도 그들의 저항이 의미가 없진 않았다.
뭉쳐있던 벌레들이 뿔뿔히 흩어졌으니까.
쓰러진 각성자 중 한 명에게다가갔다.
"이봐, 시민들이 모여있는 곳 없나? 내가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곳 말이야."
말해 줄 수 없다는 듯 째려보는 놈의 시선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수 많은 벌레들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지만, 이런 신념을 박살 내버리는 것도 재밌지.
"커헉!!! 꺄아아아아아아악!!!"
살상력은 없지만, 인간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독소를 녀석의 호흡기관을 통해 집어넣었다.
내가 처음 잡혔을 때 당했던 고통의 수십 배는 가볍게 넘길 압도적인 고통이 녀석의 몸을 잠식하고 있겠지.
"ㅇ….알려…. 알려 드리겠습니다."
역시 각성자고 비각성자고 고통 앞에선 별 것 아닌 모양이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빌고 있는 놈을 내버려 둔 채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시민들이 대피하고 있는 곳을 알려줬으니,벌레들이 도망칠 일도 없겠지.
역시 한 명을 괴롭히는 것보단 여러 명을 동시에괴롭히는 것이 즐겁다.
다수의 약자를 압도적인 힘으로 지배하는 쾌감은 아마 그 누구도 모르고 있겠지.
어차피 길드장이 오면 다시 감옥으로 잡혀 들어갈 거, 신나게 즐겨두자.
녀석이 가리킨 곳으로 쭉 걸어가니 초등학교로 보이는 시설이 보였다. 체육관 쪽에서 미약한 마나가 느껴지는 게 저곳이 대피 장소인 듯 싶었다.
`선수 친 놈이 있네.`
문제 없었다. D급 밖에 안되는 나약한 빌런이니 내가 나선 다면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이 맛있는 먹잇감들을 나에게 양보하리라.
당장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의 눈에 재밌는 광경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분명 비각성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빌런에게 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나약한 D급 빌런이라도 비각성자 하나 잡는 데엔 3분도 걸리지않겠지, 딱 저 놈 하나만 저 녀석한테 양보하자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과 반대되게 빌런이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저 녀석 뭐 하는 놈이지?`
각성자의 마력을 흘려내질 않나, 단검 하나만 가지고 각성자와 맞서 싸우지 않나.
마력에 노출 되고도 박살 나지 않는 단검도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은 채 부드럽게 빌런을 상대하고 있는남자의 실력이 더 놀라웠다.
그리고 그가 권총을 꺼내 들었을 때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싸움법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설마 각성자를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비각성자가 그 말고 또 있을 수 가 있을까?
그는 분명 옆 도시의 사람인데 이곳에 있을 수가 있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가다가, 그가 빌런을 무찌른 그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분명 그 사람이다. 내가 아직 약자였을 때, 강자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당연했을 때, 나를 구해 줬던 사람.
결과론 적인 이야기지만 내가 강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이제는 강자인 나에게 지배 되어 마땅한 사람.`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깊게 눌러 쓸 로브 사이로 미세한 두려움이 보였다.
"찾았다."
기체로 그의 몸을 휘감았다.
아직 그에게 고통을 가할 때는 아니다. 고통 없이 잠들 수 있는 수면독을 끓어 올리자 금세 잠들었다.
마력으로 인한 저항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틀림없는 비각성자인데 왜 이렇게 싸움을 잘하는지,
각성자를 잡는 비각성자라니, 맨손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게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어디 보자, 목격자가…."
백명 정도 되는 인원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한 두명이면 몰라도 이 정도 되는 인원이면 어디가서 말하지 말라고 협박을 한다고 해결 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람이 5명이 보이면 그 중 한 명은 병신이라는 데 100명이나 있으면 어떻겠어?설마 진짜 죽을까 의심하면서 말하는 놈도 있을 테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입을 여는 놈도 있을 테지.
그렇다고 전부 죽여버리기도 찝찝했다. 내 권능 특성상 내가 한 짓 인 걸 명확히 알 텐데 그러면 굳이 목격자를 죽이는 이유가 없어진다.
어쩔 수 없지.
대피소를 전부 기체로 채우고 망각독을 끓어 올렸다.
막대한 마력이 소비되었지만 그렇게 아깝지는 않았다. 당장 싸울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벌레들 모두의 표정이 몽롱해진 것을 확인한 후 그를 들쳐멨다.
마른 체격이나 키가 작은 건 아니었지만, 각성자인 나에게 느껴지는 그의 무게는 가볍기만했다.
`어디로 가는 게 좋으려나.`
원래는 마음껏 날뛰다가 길드장한테 잡혀서 감옥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 데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어떻게 만난 `은인`인데 이대로 보넬 수는 없다.
은인이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고쳐주는 것이 당연한 도리아닌가.
처음도움을 받았을 땐 내가 힘이 약해서 도와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미 악명 높은 빌런인 내가 잡히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겠지만, 그 전까지 그의 가치관을 바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사람이라 해도 결국 고통앞에선 누구나 똑같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