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화 〉루시아-2 (33/265)



〈 33화 〉루시아-2

정신이 몽롱하다.
몸이 무거웠다.

천천히 눈을 떴다. 무겁기만 한 눈꺼풀이었지만 어떻게든  수는 있었다.

무슨 일이지?

천천히 기억을 되새겨봤다.
뇌에 구름이 낀 듯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누구지?


`17호? 아니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을 지워버렸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잠깐 의식의 흐름을 놓아 버리는 것 만으로 과거의 이름 따위는 사라졌다.
이젠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이었기에 아쉽지도 않았다.


`이수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이미 용이 되어 떠나간 내 옛 친구가 지어준 이름,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
정신의 일부분을 이름에 할당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정신을 놓았다간 언제 떠나갈지 몰랐다.


"일어났어?"


누군가의 말소리에 정신이 깨었다.
아직도 모든 기억은 흐릿했지만 사물을 구분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누구지?`


기이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외모의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분명 인간의 몸이거늘 색의 배치가 기괴했다.

피부의 색은 분명 인간이었지만 오른쪽 동공은 붉은색이었고 왼쪽 동공은 보라색이었다.
머리카락도 하나의 색이 아닌 수십 가지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어떤 통일성도 없이 난잡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눈에 정신을집중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을 자세히 바라보니 체모의 색조차 일정하지 않았다.

"아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거야."


그녀가 기쁘다는 듯 웃었다.
왜? 나와 그녀는 무슨 사이지?
특별한 관계였나?
어떻게 내가 기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그녀가  기억을 지운 사람인가?
흐릿한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기억은 안개로 가득 차서 이름조차 겨우 떠올릴 수 있었을 정도니 그녀에 대한정보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구... 세요?"


내 목소리는 이런 목소리였구나, 미성이라면 미성인 목소리였지만 평범하게 들으려면  평범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오래 잠들어있었는지 살짝 잠겨있었지만 말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나? 네 주인님이지. 설마 다 잊어버린 거니?"

주인님? 나한테 주인님이 있었나?
나는 노예였었나?


당연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조차 겨우 기억해 내는 와중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노예였을까?


본인을 주인님으로 칭한 사람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기쁨, 환희, 기대, 반가움.
노예를 대하는 감정이라기엔 지나치게 어색한 감정들이었다.

"어제도 제가 노예였나요?"
"그래,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너는 줄곧 내 노예였어."


그래, 일단 저 여자가 나한테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판별할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단순한 추리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노예가 아니다.
노예라고 하더라도 저 여자의 노예는 절대 아니겠지.

그렇다면 왜 그녀는 나를 노예로 칭하고 있는가?
기억나는 것이 없었기에 무의미한 의문만 반복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손이 부족한가? 나를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거지? 왜 나를 속이고 있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기쁨에 관련된 긍정적인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나를 노예로 삼게 되어 기쁜가?

"그런데 우리 노예, 왜 주인님 눈을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니?"

거대한 고통이 온몸을 덮쳤다. 신경 하나하나가 불타는 듯한 고통이었지만 왜 인지 모르게 익숙했다.
이런 고통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다니 역시 나는 그녀의 노예였던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내가 일어 난지 3시간이 지났다.
3시간이나 일어나 있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 했다.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내 이름이 이수현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 했다.
이름을 누가 지어줬는지 조차 까먹어 버렸다.

대신 주입 당한 지식은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주인님이 진짜 주인님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것.
거부권은 없었다. 주인님은 내가 명령에 불복종하는 낌새만 보여도 나에게 고통을 가했으니까.


도대체 무슨 원리로 고통을 가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픈  싫으니까 말을 듣기로 했다.
그렇게 어려운 명령들도 아니었다.
수건으로 주인님의 발을 닦아드린다던가, 주인님을 사랑한다는 노래를 부른다던가, 주인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주 간단한 일들이었다.
이럴거면  주종관계를 강요하는 지 모를 정도로 쉬운일들뿐.

"자, 이제 슬슬 자자."


주인님이 나를 끌어안고  망가진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근데 이게 매트리스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나를 덮친 수마에 저항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


잠에서 깨자마자 일단 기억나는 걸 읍조렸다.
나는 이수현이다.
디행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어났어?"

그리고 개운하다는 듯 몸을 쭉 피는 여자.
이 여자는 주인님이 아니다. 다행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멀쩡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누구지?
내 기억을날린 사람인가?
사람이 다른 사람의기억을 없앨 수 있나?


누구에게 향하는지도 모를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였다.
특수한 권능을 각성한 A급 각성자라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없애는 건 물론 조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누가 대답했는지 모르는 답이었지만 한 가지의 정보가 추가됐다.
나를 납치하고 내 기억을 없앤 사람은 A급 각성자다.

모든 걸 포기하고 노예로사는 게 편하지 않을까?
A급 각성자를 상대로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없어진 기억을 되찾고 그녀의 손에서 해방될  있을까?

아무리 열심히 발악해도 그녀가 권능  번 발휘하면 그동안 쌓아 놨던 모든 것이무용지물이  것이다.
겨우 떠올려낸 3글자의 이름을 언제든 빼앗길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무력감이 내 몸을 지배했다.
그냥 죽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럴 없어.`


시체는 쓸모없으니까.









나는 쓸모 없어지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모양이다.
죽을까 마음 먹자마자 떠오르는  쓸모 없어지니까 죽으면 안 된다니,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수많은 생각을 계속 반복해서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어가면 나는 내가 누군지 알  있지 않을까?


 누구한테도 물을 사람이 없었다.

"주인님, 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너?  잘 듣는 노예였지, 지금처럼 멋대로 질문하지도 않았고. 아주 착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나요?"
"처음 만났을 때?"


감정을 숨기는 것엔 익숙하지 않았는지 기억을 끄집어내는 표정이 명확하게 보였다.

"듬직하긴 했지, 비각성자라고 하기엔 비정상적으로 강했어. 그리고 오지랖이 넓었고 착한 사람이었지."


여자의 눈이 과거를 떠올리듯 몽롱해졌다.


"방금 말한  그냥 잊어."


묵직한 공기가 코를 통해 몸으로들어왔다.
기억이 더욱 흐려지다가….


그 누구한테도 물을 사람이 없었다.

"주인님, 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경악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를 보니 아마 미친놈이었던 모양이다.

"주인님?"
"어... 말 잘 듣는 노예였어. 멋대로 입을 열지도 않고 아주 착한 노예였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나요?"
"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충직한 노예였어."


아무런 정보도 얻을  없는 말이었지만,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었다.

`한 번 기억을 잃은 모양이네.`


8시 1분을 가리키던 시간이 한 순간에 8시 3분이 되었으니까.
아마 중요한 정보를 흘린 모양이지?

"나는 식량 구해 올테니까 어디 나가지말고 가만히 있어!"

녹색 기체가나를 감싸더니 그대로 굳어서 나를 구속했다.
단단하다기 보다는 끈끈한 감촉이 온몸을 묶었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  하는 것이탈출은 불가능할  보였다.


어차피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나에 대해 알기 위해선 그녀의 곁에 붙어 있을 필요가 있으니까.


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나는 흐릿한 기억을 헤집었다.
이름 세글자도 겨우 건져낸 곳이었지만 이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30분이나 기억의 바다를 헤집고 나서야 나에 대한 평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강하고, 오지랖 넓고, 착한 사람.`

아무래도 이수현이라는 사람은  멋진 사람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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