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이수현-1
나한테 안긴 여성, 그러니까 여동생이겠지?
머리카락색이 다른 게 좀 미심쩍긴 하지만 각성하면서 머리카락색이 달라지는 건 흔한 현상이니까.
아무튼 여동생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왤까? 내가 기억을 잃은 걸 알아챈 걸까? 역시 기억이 없는 상태로는 완벽히 연기할 수 없는 건가?
"오라버니….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응? 나는 괜찮다고 했는데?"
"분명 자기를 오라버니라고 지칭 하셨죠?"
거기서 실수를 했나?
"오라버니, 제 이름이 뭐죠?"
여동생이 내 몸에서 떨어졌다.
어쩔 수없네, 그냥 진실을 밝혀야지.
"미안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것 같아."
"기억을 잃었다고요? 루시아 그년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루시아? 아마 내 기억을 날린 거로 추정되는 여자인 모양이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근데 오라버니 진짜 기억 잃으신거 맞죠? 장난 치시고 계신 거 아니죠?"
"왜?"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연히 자연스럽지. 나는 기억만 없을 뿐 모든성격은 네가 아는 이수현과 동일할 테니까.
"당연히 자연스러워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잃은 건 기억이지 인격이 아니야. 오히려 네가 모르는 성격이 튀어나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그건 오라버니 말이 맞는데요..."
"그렇게 비슷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네, 조금 당당해 지신 걸 제외하면 너무 비슷해요. 오라버니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진짜 장난을 치고계신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요."
흠, 당당해졌다?
"너, 나쁜 동생이었구나?"
"네? 나쁜 동생이라뇨? 전혀 아니거든요?"
"나보고 당당해졌다면서,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건데, 지금의 내가 당당해 보인다는 원래의 내가 너한테 주눅이 들어있었다는 이야기 아니야?"
"그건…. 오랜만에 만난데다가, 제가 S급 각성자다보니 오라버니가 부담되셔서 그런 걸거에요."
흠, 충분히 부담을 느낄 법했네. 일단은 믿어줘야겠지? 여동생의 말이니까.
"하연 언니! 먼저 가시면 어떡해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아, 연하 왔냐? 괜찮아. 오라버니 맞아."
이름이 하연이었구나?
그건 그렇고 저 사람은 누구지? 일단 머리색은 하얀색... 눈동자는 황금색... 이름도 하연이랑 비슷하고...
동생이 하나 더 있었나 보구나?
"연하 왔어?"
친근하게 말을 걸었는 데 두 여동생이 나를 어이 없다는 듯이 쳐다 봤다.
왜지? 기억을 잃기 전에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걸까? 하연이가 오랜만에 만났다고 했던 걸 보면 연하와도 오랜만에 만난 걸 테니 확실히 어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 연하는 우리 가족이..."
"맞죠! 맞습니다 오라버니! 하연 언니의 오라버니면 당연히 제 오라버니이기도 하니까요."
"야!!"
자매간에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다.
"하연아, 여동생 너무 핍박하고 그러면 안 된다."
"맞아요 언니!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을 괴롭히시면 안되죠."
연하가 내 뒤에 와서 숨었다.
동생들의 반응을 보니 연하와는 티격태격하는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친절하고 부드럽게 말을 걸었을 때 둘 다 당황했던 거겠지.
"일단, 기억을 잃어버리신 건 확실한 것 같네요."
역시 완벽한 연기는 안 되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오라버니, 루시아가 어딨는지는 기억하고 계세요?"
"나 납치한 여자? 응, 기억하고 있지. 일어나서 나를 왜 납치 했냐고물으니까 기절하더라."
"그러면 이틀 전부터 돌아다니고 계셨던 거에요?"
이틀? 왜 이틀이야, 일어난지 얼마 안됐는데.
"아니 얼마 안됐어. 2시간쯤 됐나?"
연하의 얼굴이 고민으로 가득찼다.
"어딘지 기억하시면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래 알려줄게."
그 뒤로 시간이 굉장히 빨리 끝났다.
루시아라는 여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뭔가 엄청 무서워 보이는 구속도구로 그녀를 구속하고나는 그냥 방에서 쉬고 있으라기에 방에서 앉아서 기억을 떠올리려다가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길 2시간,
루시아와의 이야기가 끝났는지 두 여동생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수확은 있었어?"
"좋은 소식이 하나랑 나쁜 소식 하나가 있... 악!!! 언니 왜 때려요?"
"장난 치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힝... 좋은 소식은 별 다른 조치 없이도 오라버니의 기억이천천히돌아올 거라는 거고 나쁜 소식은 지금 당장 기억을 복구할 방법이 없다는 거에요."
"함부로 빼냈다간 정신이 완전이 나갈지도 모른데요."
하연이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괜찮지 않아? 영원히 이 상태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오빠의 다른 면을 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겠어?"
"그래도요..."
S급 각성자라더니 마음은 아직 여린 소녀인 모양이다. 일어나서 한 번 꼭 안아줬다.
별로 안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이건 몸에 익은 습관인 걸까?
"기억을 잃었어도 오빠는 오빠야, 너무 상심하지 마."
"오라버니."
하연이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3분 정도 꼭 끌어안은 상태로 있다보니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시작했다.
"하아... 하아..."
숨을 거칠게 쉬고 있다.
왜지? 슬픔 때문은 아니야. 울음기가 전혀 없어.
어디가 아픈가? 그럴리가, S급 각성자가 갑자기 아플 일이 뭐가 있겠어.
눈동자를 돌려 하연이의 얼굴에 약한 홍조가 깃들었다.
미약한 흥분, 뭐지? 여동생이 오라버니한테 껴안겨 있을 때 나오는 반응이 아닌데?
알 수 없는 위기감에 하연이를 슬쩍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요."
울음기를 연기하려는 것 같은데 오빠한테는 그런 거 안 통한단다.
아무리 숨기려 해봤자 목소리 깊은 곳에서 흥분과 설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나쁜 여동생 맞구만.`
오빠를 좋아하는 여동생이라, 이수현이 왜 하연이한테 당당하게 대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네.
"하연아."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왜 하연이를 밀어내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S급 각성자의 위용에 겁먹고 억지로 시선을 피한 걸 수도 없고 나는 모르는 어떤 기억에 의한 걸 수도 있다.
가령 책임감 같은,
근데 내 알 바 아니잖아? 나는 얘랑 어떤 기억도 없다고, 내가 하연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얘는 내 동생이라는 거고 동생과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오빠가 부탁할게, 떨어져."
꿈쩍도 안 한다. 이거 오빠취급도 안 해주는데? 이수현 너 가정교육도 안 한 거야?
"마지막으로 말한다. 안 떨어지면 평생 너랑 말 안 해."
"뭐라고요?"
어쭈? 이젠 째려보기 까지 해? 이거 미친년 아니야?
하긴 이수현도 꽤 미친놈인 것 같으니까, 그 동생이라고 다를 거 있겠어?
S급 각성자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묵직한 압박감이 나를 눌렀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그냥 넘어가 줬나 본데 지금 네가 하는 짓, 남매 사이에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란 거 알지?"
차가운 내 한 마디에 그녀가 나에게서 떨어졌다.
"기억을 잃으셔서 모르시나 본데 우리 오라버니는 그런 말 안하시거든요?"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본심에 더 가까울 걸? 동생이 S급 각성자라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겁을 먹은 상태에서 너를 대하는 거랑 지금 내가 너를 대하는 거랑, 어느 게 더 본심에 더 가깝겠어?"
"당연히 이전의 오라버니죠. 오라버니와는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그만큼 너를 배려해줬다는 거지. 네가 상처 받기 싫어했으니까, 너의 사랑을 알아차리면서도 억지로 시선을 피해가면서 말이야."
허리춤에 걸려 있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다르거든? 결국, 너는 내 여동생이잖아? 여동생이 엇나가지 않게 오빠로서 잘 조율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여동생이 좀 무섭다고 피해선 안 되지."
권총을 관자놀이 바로 옆에 댔다.
"뭐하시는 거에요."
무거운 기세가 나를 꾹 눌렀다.
숨조차 쉴 수 없었고 총을 쥔 손도 바들바들 떨렸다.
"제 앞에서 자살하는 게 가능할 거로 생각하세요? 당장 그 총 내려놔요."
"그래, 네 앞에서는 안 되겠지. 근대 24시간 나를 감시할 수 있겠어?"
동생한테 자살한다고 협박하는 오빠라니쓰레기 같지만 어쩔 수 없지? 동생도 만만치 않은 쓰레기니까 정신 차리게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커흠커흠. 잠시만 집중해 주시겠어요."
숨죽은 듯 조용히있던 연하가 입을 열었다. 하연이를 앞에 두고 감히 시선을 돌릴 여유는 없었지만 정신의 일부분을 연하에게 배정했다.
"그, 둘이 의남매라는 거, 오라버니는 알고계시죠?"
응? 피 안 섞였었어? 그럼 문제 없는데?
잠깐 긴장을 푼 순간 하연이가 나를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