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이수현-4
"흠, 제 눈에는 기사님이 훨씬 귀여우신 데 말이죠."
모르는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누구지? 루시아의 목소리도 아닌데, 누구지?
"누구야?!"
연하가 내 앞을 막아 섰다.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 했건만 시꺼먼 흑발을 지닌 여성이 이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솔의 경비대장쯤 되시는 분이라면 제가 누구인지는 금방 짐작하실 것 같았는데 말이죠."
"너구나? 언니가 말했던 월하 라는 여자가."
도대체 누구지? 도저히 추리가 되지 않았다. 느껴지는 기세나 아무런 전조 없이 방에서 뿅하고 나타난 걸 보면 틀림없이 S급 각성자 인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나를 기사라고 부르고 있다.
뭐지? 내가 저 사람 밑에 소속되어 있었나? 경호역할을 수행해서 기사라고 부르는 거지.
'근데 S급 각성자한테 경호원이 필요한가?'
설마 그 기사가 아니라 기사를 쓰는 기사인걸까? 아니 뭔소리야 기사를 쓰는 사람은 기자라고 하지 기사라고 하진 않잖아. 그렇다고 내가 무슨 바둑기사를 한 건 아닐테고.
정보가 없어서 추리가 되지 않기도 했지만 접점을 찾아낼 수가 없다 보니 정보가 더 늘어난다고 해서 추리가 잘 될 것 같진 않았다.
"기억을 잃으셨다는 게 정말이네요. 그런 표정으로 저를 바라 보는 기사님, 낯설긴 하지만 귀여우시네요."
자꾸 귀엽다 귀엽다 하는 걸 보니 나보다 연상인 모양이다. 설마 다큰 남성을, 그것도 자기 보다 나이 많은 오빠를 귀엽다고 부르진 않겠지.
"누님은 누구십니까?"
"풉... 누님이요? 저 보고 하신 말씀이세요?"
여성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하긴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누님은 잘 안 어울리긴 하지.
"월하씨?"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월하님?"
"저희는 굉장히 친한 관계였어요."
설마? 아니겠지? 괜히 틀렸다고 맞진 않겠지.
"설마 월하?"
"빙고."
이수현 이새끼 뭐 하던 놈이야. 비각성자라는 놈이 S급 각성자 두 명한테 반말을 썼다고? 하연이는 여동생이라서 그렇다고쳐도 저런 누님한테도? 아니, 이름으로 부르는 시점부터 이미 누님이 아닌가?
"저희는 어떤 사이였나요?"
"기사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죠."
어릴 적 일이구나. 도대체 나란 인간은 어릴 때 얼마나 많은 양의 플래그를 꼽고 다닌 거지?
-똑똑
"들어가도 돼요?"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연하의 표정을 보아하니 나를 찾아온 사람은 아닌 듯 하고 아마 월하를 따라온 사람이 아닐까?
"응, 들어오렴."
"하아..."
연하의 한숨이 땅을 꺼뜨릴 것 처럼 무겁게 뿜어져 나왔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보인 것은 남자아이였다. 그런데 양 옆에 여자아이들이랑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아이가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는 데도 여자아이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아이의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고 있었다.
"수현이 형! 저 좀 도와주세요."
내가 아는 애인걸까? 당연히 아는 애겠지?
나를 알고 있고 어느정도 의지해야만 나올 수 있는 절박한 표정으로 간청하는 게불쌍해 보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고통받아라 핫하!
"미안 내가 지금 기억이 없어서..."
"사현이 너는 우리랑 붙어있는게 싫어?"
"바부! 오빠는 너랑 붙어있는 게 싫은 거거든? 네가 지금까지 우리 오빠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
"앞으로 잘 하면 되잖아!"
어린 애들이 살벌하네. 간절히 나를 바라보는 남자아이의 시선을 억지로 피했다.
네 인생은 네가 해쳐나가야 하지 않겠니? 남한테 도움만 바라다간 스스로 헤쳐나갈 실력을 기르지 못 할 거란다.
"월하, 가 데려온 거에요?"
"네, 같이 지내던 아이들이니까요. 기사님이 아프시다고 하니까 따라가겠다고 해서 데리고 왓죠."
"제가 아픈 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다 방법이 있죠."
음습하게 웃는 걸 보니까 절대 정당한 방법으로 알아차린 건 아닌거 같은데?
일단 연하의 뒤에 숨었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쪼그리니 연하의 뒤에 완전히 숨어들어갈 수 있었다.
키 좀 더 커야겠다 연하야 너무 불편하다.
"오라버니?"
"기사님? 그년이랑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저보다 그년을 더 의지하시는 거죠?"
"얘는 본지 3시간 됐고 월하는 본지 3분도 안 됐는 걸요. 무려 60배의 차이라고요!"
연하의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가는 게보였다.
"오라버니랑 솔의 경비대장은 아예 일면식이 없던 걸로 기억을 하는 데 말이죠. 그 년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믿지 않으시는 게 나아요."
"자기입으로 오늘 처음 만났다고 했습니다! 월하의 말과 일치하는 데 그러면 월하의 말도 의심해야 하나요?"
벌써 익숙해진 건지 텐션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아무튼 그년 뒤에 숨어 있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그러다가 다쳐요."
"연하는 하연이가 저를 맏기고 간 동생입니다. 방금 처음 본 당신 보다는 연하가 훨씬 더 의심스러워요."
"아, 하연씨가요? 이건 계약 위반인데..."
계약?
"무슨 계약인데?"
"기사님은 모르셔도 돼요."
왜? 나랑 관련되어 있는 계약 아니야?
대충 예상이 갔다. 아마 나를 사이에 두고 압묵적인 합의를 이끌어 낸 게 아닐까?
그런데 내가 왜 몰라야 하지? 나에 대한 계약이잖아.
"기억을 잃기 전의 저도 모르는 계약이었나요?"
"알 필요 없다니까요?"
이수현, 네가 참 대단한 놈이라는 건 인정하겠는 데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여동생이 자길 사랑하는 건 이해 할 수 있어 어차피 진짜 남매도 아니니까.
그 마음을 확고하게 쳐내지도 못 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는 건 알겠어. 우유부단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이건 아니잖아? 자기가 없는 곳에서 둘이서 자신에 대해 멋대로 합의한 걸 모른 척하고 있었다고?
너 정도 눈치면 모를 수 없었잖아? 알고도 모른 척한거지?
왜? S급 각성자라서 무서웠나? 아니야. 단지 그 뿐이라면 지금 나도 월하한테 쫄아서 연하 근처에서 벗어났겠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
근데 뭐? 나는 그냥 이 상황이 짜증나거든?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가지고 멋대로 합의하고 나를 맘대로 다룬다? 참는 게 병신이지.
기억이 돌아오면 또 이런 상황이 반복 될 거 아니야. 이수현을 위해서라도 이 관계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아까 날아갔던 총을 찾아서 한 손에 쥐었다.
"기사님? 뭐 하시는 거에요. 진짜 저한테 반항하시려는 거에요?"
또 그래? 하연이나 월하나 내가 뭐만 하면 기세부터 흩뿌린다. 이수현도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참아준 것일테지만 절대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아니, 이렇게 살바에야 그냥 죽으려고."
관자놀이에 총을 가져다 댔다. 이 짓만오늘로 두 번째 하는 것 같은데? 아이들도 서로 싸우는 걸 멈추고 숨을 죽인 채 내 쪽을 바라봤다.
애들한테는 미안하네, 어쩌면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제 와서 얘들아 형이 곧 자살 할 건데 좀 비켜주지 않겠니? 하고 부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정말정말 많은 데 딱 한 마디만 할게."
월하의 표정은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내가 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쏴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월하의 표정은 화난 채 나를 노려보는 모습 그대로였다.
진짜 미친년일세 하연이도 조금의 동요는 보여줬는데 저렇게까지 평정을 유지한다고?
"나는 너희들 장난감이 아니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분명 관자놀이에 대고 총을 쏘았음에도 총소리는 뒤에서 울려퍼졌다.
역시 S급 각성자, 막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코 앞까지 다가와 있는 월하. 시큰 하게 아파오는 손목.
'많이 급했나보다?'
저렇게 창백한 표정을 하다니, 아무리 S급 각성자여도 이런 자살까지 막는 건 힘들었던 걸까? 아니면 진짜로 할 줄은 몰라서 당황한 것에 불과할까?
어찌되었건 내가 원하는 반응은 200% 이상 끌어낼 수 있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이 썅년아.